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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얼굴 - 문학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죽어가는가
최문규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북리뷰] 삶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아
태어나면서 살아가는 중에 우리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낀다. 삶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다. 삶을 다시 시작하고도 싶고, 이 삶이 내 삶이 아니기를 바라는 때도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에겐 타임머신도 삶을 리셋 할 방법도 없는데.
살아간다, 산다, 삶이다라고 할 때
우리는 말 그대로 몸에는 체온이 있고, 인식을 할 수 있고, 말을 하고 움직일 수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죽음은 이 모든 행위를 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죽음을 이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죽음. 살아 생전에 우리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 죽음은 타인의 경험을 빌려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상태일
뿐이다. 죽음에 대한 정의가 무수히 많은 것도 아마 경험해 보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내용은 이 책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죽음을 경험했다고 말할 경우, 그 경험은 사실 자기 자신의 죽음과 무관한, 대체로 타자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 p 91 )
죽음을
이야기하기 앞서 우리는 사람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부터 생각해보아야 한다. 시크릿 가든에서 보면 주인공의 정신이 바뀐다. 주위 사람들은 정신이 바뀐, 즉 육체만 갖고 있는 정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신이 바뀐 사람을 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 그 사람인 것인가? 몸뚱이는 그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이
드라마에서 ‘몸이 바뀌고 정신이 바뀐 상태.’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존재는 정신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존재. 있는 상태. 그것은 보이지 않는 정신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자신의 끝을 맞이할 때, 즉 죽음에 도달할 때 그 현존재는 더 이상 현존재가 아니라 "'현'이라는 존재를 상실한
것"이다.” ( p 89 )
이
“현”이라는 존재를 상실할 때, 죽음이라고 했다. 우리들의 삶에서 죽음은 상실로 나타난다.
베르린
대학의 문화학자토마스 마호는 이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죽음(der Tod)이 아니라 죽은 자(der Tote)"라고 말하면서 "죽음의 새로운 가시성"으로
전환할 것을 강조한다.
마호의
주장에 의하면, 근대 사회가 금기시하고 배제하려 했던 것은 엄밀히 말하면 죽음이 아니라 죽은 이들의 모습이었으며, 이제 근대에서 탈근대로
전환하는 지금 "죽은 이"의 구체적인 모습과 담론이 복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 p 72 )
샤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를 의식하면서, 인간을 “상황-내-존재”로서 규정한다. (112)
샤르트르는
하이데거와 약간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져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중요한 관점인지가 중요할 수
있을까? 이렇게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는 것도 다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에 나오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보드리야르는
또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죽음과 관련하여 보드리야르 시각의 핵심은 “실제적인 것의 죽음”에 있다. 바로 이 점이 하이퍼리얼리즘적 세계의
특징이기도 하다.” ( 146 )
“세계”, “상황”, “실제” 등 각 철학자의 해석은 다르지만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 한가지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은
어떨까?
“삶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울까? 만일 그렇다면, 죽음은 고통스러운 삶에 비하면 어쩌면 더 평화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 p 375
)
삶과
죽음. 양면성은 아닌 것 같다. 누구나 태어나면 죽는다. 하지만 그 죽음이 오면 모든 것이 끝나기에 죽음이 더 두려울 수도
있다.
죽음을
통해 부활한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 아닌 새로운 삶의 탄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인식만으로
삶과 죽음을 이해할 순 없다. 그렇지만 인간이면 누구나 겪을 수 밖에 없는 죽음. “나 태어날 때 나만 울고 다 웃었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 죽을 때 나도 웃고 다 웃었다.”라고 한다면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