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평점 :
수 많은 화제작을 낳은 소설가 박민규. 그의 매력은 한마디로 `新언문일치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소설가 김영하는 "박민규에게서 뭔가를 빼앗아올 수 있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가 창안하여 우리에게 덥석 안겨준, 그 놀랍도록 새로운 문장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의 개성 있는 문체의 특징은 뚝뚝 끊어지는 듯 문단 나누기를 통해한 리듬감이라고 할 수 있다. 저만치 뚝 떨어져 있는 문장, 혹은 단어들은 독자들의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박민규의 첫 소설집 <카스테라>(문학동네. 2005)는 `新 언문일체`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두 번째 작품,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는 독특한 줄거리와 이야기 형식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학 록그룹 싱어로 학교에서 이름을 날리던 주인공은 졸업을 앞두고 대기업 인턴사원으로 취직을 한다. 운좋게도(?) 40대 인사부장은 그에게 호감을 보였고, 단 둘이 술을 마시는 기회도 생긴다.
인사 부장이 첫 잔을 따라주며, "회사 생활은?"라고 묻자, 주인공은 간단히 "좋았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리고 한 줄 뚝 떨어져, 첫 번째 "마시게"가 등장한다. 두 번째 잔을 연이어 따르며 인사부장은 "내가 최대한 힘을 써볼까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라고 다시 묻는다. 주인공은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말로 잔을 받는다. 그리고, 다시 "좋아. 마시게"로 마무리 된다.
이렇게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장면에서 중간에 저만치 홀로 떨어져 추임새처럼 반복되는 “마시게”라는 표현은 독자를 끌어들이는 흡입력을 발산한다. 연신 채워지는 술잔을 연달아 비운 주인공은 아찔하게 취기가 오르고, 이는 독자들에게까지 전해질 듯 생생하다.
잔뜩 술에 취한 인사 부장은 늦은 밤 택시 속에서 주인공의 허벅지를 쓰다듬는다. 24시간 사우나에 도착한 두 남자는 결국 부적절한 성관계를 맺는다. 흔치 않는 두 남자의 농밀한 정사 장면은 낯설고 어색할 법 하지만, “마시게”의 짙은 여운이 이를 무마시켜준다.
알코올 기운과 사우나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인사 부장에게 몸을 내 맡긴 주인공은 담담히 되뇌인다.
"잠깐이다. 후회는 없다. 돌이켜보면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던 청춘이다. 경쟁자는 많고 취업은 힘들고, 세상은 엉망이었다. 잠깐이다. 잠깐이다. 잠깐이다."
하지만, 잠깐 후 주인공은 더욱 쓸쓸해지고, 눈물이 난다. 이때, 자욱한 수증기를 뚫고 등장한 너구리. 어쩌면 너구리야 말로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너구리가 환상적인 비누칠을 선보이자 주인공은 그만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릴 뻔한다. 그리고 이 작품의 제목을 힘차게 외친다.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아리송하기만 했던 이 작품의 제목이 절로 이해가 된다.
하지만, 왜 꼭 사람이 아닌 너구리를 등장시킨 걸까? 소설은 끝났지만 궁금증은 남는다. 그저 작가의 상상력으로 치부해버려도 그만이지만, 독자로서 나름의 추리력을 발휘해 보았다.
단서는 작가 박민규가 너구리에 대해 내린 정의이다. 그는 '너구리는 즐거움 그 자체로 세상 사람들의 혼을 빼 놓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도망 다녀야 하는 힘겨운 운명에 처한 멸종 위기의 동물`이라고 설명했다.
즐거움, 재미는 최첨단 사회에서 유일한 위안이며 살아가야할 이유이면서도 동시에 인생을 파멸로 이끌어갈 수 있기에 최대한 피해야만 할 것이 되어 버린지 모르겠다. 작가는 인간의 본성인 쾌락과 즐거움을 억누르고 외면하여 그것이 주는 따스한 위안까지도 잊어버리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자극을 주려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작가 박민규의 소설이 깨달음이나 가르침을 대놓고 전하는 부류는 절대 아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작가의 목소리는 거칠거나 무겁지 않다. 작가 스스로의 고백처럼, 결국 그가 독자에게 바치고자 하는 것은 한 조각의 빵, 카스테라니까. 보드랍고 따스한 위안을 안겨주는 달콤한 카스테라 한 조작, 딱 그 만큼 박민규의 작품은 유혹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