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리던 4월의 새벽에 이 책을 다 읽었다. 어두운 책들의 무덤에서 발견한 내 인생의 소설책 한 권. 밤을 새워 읽게 만드는 이야기의 마력을 가지고 있었고, 게다가 지구상에 남아있는 마지막 한 권이라는 희귀성의 신비까지 덧입은 그 책은 소년의 손에 들어오자 마자 그의 인생에 조금씩 파고들어와 뿌리를 내리고 소년과 함께 자란다.

책은 첫사랑의 여자를 만나게 하고, 책을 통해 그 열정을 키우게 하고, 배신과 절망을 느끼게 하고, 다시 제자리였던 무덤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책을 쓴 사람과 한 권의 책을 숨겨놓은 사람,  나머지의 책을 모두 불태운 사람, 그리고 그들을 쫓는 사람에 대한 가슴 아픈 이야기가 전후의 음산한 바르셀로나 거리를 바탕으로 흥미 진진하게 펼쳐진다. 소년은 그들의 이야기와 비밀을 조금씩 알아내며 그들이 위태롭게 이루고 있던 균형에 균열을 내고 스스로 책 속의 주인공이 되어간다. 어두운 도시의 뒷골목,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골목의 삐걱이는 집, 완전히 쇠락해버린 도시외곽의 거대한 저택을 헤매이며 소년은 사랑을 배우고 삶을 배우고 조금씩 청년이 되어간다.

다만, 어두웠던 전쟁의 시절이 끝난 것처럼, 소년에게는 불행한 출생의 비밀 대신 인생의 가장 큰 후원자인 아버지가 있었고, 닮은 길을 갔지만 끝내 그의 사랑은 해피엔딩을 맞이하였다. 혼자 빗소리에 놀라며 캄캄한 바르셀로나 뒷골목을 헤매던 나는 그래서 안도하고 기뻐하며 책을 덮고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여전히 소설의 핵심은 이야기의 힘이다. 한 번 잡은 순간 끝을 보지 않고는 책장을 덮을 수 없게 만드는 끈끈한 흡입력 덕분에 간만에 즐거운 독서를 경험하였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에게 걸맞는 문체와 속도를 가지고 표현된 덕분에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으며, 치밀하게 계산된 플롯은 탄탄한 긴장감을 선물한다.

우연히 만난 책과 인생을 공유한 것은 소년만은 아니었다. 내 인생에도 1950년대 바르셀로나에서의 추억이 삽입되었다. 이 책은 멀리 한국에서 번역되어 우연히 내 손에 들어와 나와 이틀밤을 함께 했고, 그 후로도 며칠간 내 머릿속에서 되새겨지는 기쁨을 누렸다. 읽고 사랑하고 또 다른 책과 새로운 비밀과 추억을 나누며  설레임 속에 사는 것. 이것이 아무런 부가가치도 주지 않는 소설책 읽기의 진정한 이유라는 걸 오랜만에 다시 깨달았다. 사폰의 다음 소설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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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sdom 2005-05-27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네 덕에 아이오페 받았지롱.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