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문학이나 영화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기억의 전부 혹은 일부가 상실된 사람의 이야기는 오래되고도 다양하게 변주된 소재 중 하나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모습이 담겨있는 빛바랜 한 장의 낡은 사진을 들고 낯선 거리를 헤매거나 스스로의 몸에 잊지 말아야 할 말들을 새기며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또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기억들은 정말 휘발성이 강해서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내가 그런 적이 있었나. 내가 정말 그랬단 말이야. 어떤 기억들은 정말 그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그 일을 찍은 사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그 일에 대해 얘기해준 엄마의 말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옛 집의 모습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고 믿었으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결국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오래된 사진 속의 집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카메라 앵글 바깥 부분의 집의 모습은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 기록되지 않은 기억이란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사실 나는 국경을 넘어야했던 2차대전 당시 프랑스 거주 외국인들의 급박한 상황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유야 어쨌든 눈 덮인 산에서 그는 애인을 잃고 기억도 잃어버렸다. 너무 큰 충격이라 상실되었을 이 기억을 찾기 위해 그는 내내 고군분투한다. 그 여정은 조각 몇 개를 잃어버려 도저히 완성할 수 없는 커다란 퍼즐을 맞추는 일처럼 고단하고 안타깝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그는 여전히 마지막 한 조각은 찾지 못했다. 모두들 어디로 가버린걸까. 내가 누구인지 말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놀랍도록 매혹적이고 유려한 소설이다. 건조한 문체 속에 주인공의 안타까움과 절망감이 고스란히 녹아서 잔뜩 흐린 파리의 뒷골목 같은 느낌을 준다. 나 역시 묻는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잘 알고있나. 모두 기억하고 있는가. 그리고 생각한다. 잊지 않기 위해 기억의 영속성을 위해 기록하자.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사소한 사실도 이렇게 기록하여 기억하자. 매혹적인 프랑스 소설. 고풍스러운 번역.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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