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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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예약 주문해두었던 책이 도착하자 상자를 열어 실물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손바닥 위에 올려 무게를 재보고 두께를 가늠한 후 잠시동안 고민했다. 휴가를 낼까말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밤마다 가림막 뒤에 숨어 미끄럼틀을 바라보며 덴고를 기다리던 아오마메의 간절함에 비교할 수 있을만큼 기다리던 책이 왔으니까. 집을 치우고 창문을 활짝 열고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여름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공들여 읽고 싶었다. 1Q84년으로 들어가려면, 달이 두 개 떠있는 그 세계로 나도 함께 들어가려면 최소한 이만큼의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내 두 발이 딛고 있는 세계는 네살배기 큰 딸이 좋아하는 희고 밝은 하나의 달만 떠있는 2010년의 세계임을 슬프게도 부정할 수 없었기에 토트백에 책을 담아 출근했다. 주차장과 사무실 사이의 길에서도 걸으며 읽고, 유축실에서 둘째에게 먹일 젖을 짜면서도 읽고, 문상 가고 오는 길의 자동차 안에서도 읽고, 화장실에서도 읽고, 책상에 앉아 논문 읽는 척 하면서 슬쩍슬쩍 읽어 사흘만에 마지막장을 덮을 수 있었다. 무사히 1984년으로 돌아와 콩깍지 안의 콩알 두 개처럼 나란히 누워있는 아오마메와 덴고를 보고 있노라니 슬쩍 눈물이 맺혔다.

그날 저녁 퇴근길에 큰 딸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극장에 갔다. 우리의 첫 영화는 '오션스'. 감탄을 멈출 수 없는 아름답고 장엄한 화면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이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참으로 적구나.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바다에 그 크기가 가늠조차 되지 않는 혹등고래라는 커다란 생물이 살고 있다. 지구의 신비와 오래된 지혜를 알고 있을법한 깊은 눈빛을 지닌 혹등고래도 바다 사이가 너무 멀어 외로운가보다. 그가 짝을 찾아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고 있으니 눈물이 났다. 손가락 마디 하나 길이보다 작다는 알에서 갓 깨어난 바다거북들이 바다를 향해 기어간다. 무자비한 새떼의 공격에서 홀로 살아남은 한 마리 바다거북이 난바다로 나아가는 모습을 부감으로 보여주는 화면은 웅장했고 아름다웠고 슬펐다. 반드시 살아남을 것, 그리고 너를 부르는 나의 노래가 너의 귓가에 닿을 수 있도록 애쓰는 것, 그것이 만물에게 주어진 의무인 것일까. 노랫소리를 따라 만난 한 쌍의 고래처럼 바다거북도 아득히 먼 해변 어딘가에서 홀로 살아남은 다른 바다거북과 끝내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럴 것이다. 차갑고 쓸쓸하고 잔인한 바다에서 꼭 제 짝을 만나 따뜻한 해변으로 많은 알을 낳으러 갈게다. 덴고와 아오마메처럼.

20세기 최고의 연애소설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었다면 21세기 최고의 연애소설은 '1Q84'가 되지 않을까? 21세기가 다 가려면 아직 90년이나 남았으니 너무 섣부른 예측일까? '상실의 시대'를 읽으며 스물이 된 나는 죽은 연인의 그림자에서 허우적거리던 와타나베를 보며 사랑은 덧없고 인생은 본디 외로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30대가 되어 그저 살아있는 일의 존엄을, 외로워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일의 위엄을 알게 되었다. '1Q84'는 그래서 고맙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이렇게 숨막히는 연애소설을 쓸 수 있는 하루키가 존경스럽다. 이 두꺼운 세 권의 책을 읽는 내내 다음장이 궁금해 빨리 넘기고 싶은 마음과 남아있는 양이 줄어드는 것이 아쉬워 차마 넘기지 못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속편을 이렇게 애타게 기다려보기도 해리포터 7권 이후로 처음이다. 그때와 달리 원서는 일찌감치 나왔는데 까막눈이 번역본을 기다리는 처지인지라 비참하기까지 했다. 만만한 내용이 아닌 만큼 웬만한 실력이 되기 전까지는 원서로 읽을 엄두는 못 낼 것 같지만 번역이 워낙 훌륭하게 잘 된 것 같다. 여운이 워낙 길게 남아서 앞으로도 한동안은 나도 1Q84년의 세계를 드나들게 될 것 같다. 이 땅 위의 외로운 이들에게 모두 어딘가 수도고속도로에서 나오는 비상계단이 있음을, 차가워도 차갑지 않아도 신은 이 곳에 있음을 잊지 말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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