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곰선생님 > [신경숙 낭독회]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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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을 처음 만난 것은
아주 오래 전이었다.
그것도 글이 아닌,
그저 이름으로.
세상의 모든 짐을 지운 채,
힘들게 간병하러 가던 '어머니'의 오른손.
그 손에 들려 있던 유일한 문화적 산물 속에서,
신경숙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신경숙의 이름 보다는,
책 속에 담긴 어머니의 메모에
더 눈이 가던 나이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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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인연이었을까?
스치듯한 인연은
결국 만남을 가져왔다.
애독자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독자라는 핑계와
사실은 내면 속 그 사람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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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저마다,
저마다 신경숙과 얽힌 이야기들로 분주했다.
적어도,
어머니가 병간호 길에 산 책으로 처음 뵈었다와 같은 소소함은
넘어 서는 듯한 눈빛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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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회의 사회자는 문학평론가 신형철님이었다.
그는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두고,
이런 글을 남겼다.
'네 명의 청춘이 유리병에 넣어 띄운 편지가 오늘날 청춘들의 마음에 온전히 가 닳기를.
그들의 아픈 시간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픔들을 잊지 않으면서,
마침내 아픔이 없는 시간 쪽으로 걸어가기 위해서.'
미치도록 공감하는 평이다.
뒤에 어머니의 생각을 조금 밝히겠지만,
아마도 신경숙씨의 가장 큰 매력은 온전히 가 닿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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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씨가 보였고,
그 손에 들린 책의 간지들이 보였다.
새삼 소통을 위하여,
그는 몇 번의 곱씹음이 있었을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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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은 꽤 오래도록 이어졌다.
작가가 직접 자신의 글을 낭독하는 것은
언제나 어떤 모양으로나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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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야기들도 오갔다.
작가와 작품과 독자와의 관계가 무시된
약간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그저그런 질문을 포함한 이야기들 속에서 (지극히 주관),
새삼 주인공이 대부분 죽는다던 신형철씨에 대한
일침이 선득하게 졸음을 깨웠다.
'딱 죽었다고 서술한 적은 없는데요.' 라는 식으로.
처음으로,
어머니가 간병을 하기 위해 산
'오래전 집을 떠날 때'를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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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우리 어머니는 신경숙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
아마도, 생각해보면.
신경숙을 싫어하기 보다는,
슬픔과 같은 것들이 아주 '온전'하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와닿게만 하는
그 절절함을 싫어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글을 읽고 있다.
마치 이별 상황의 연인들이
이별의 노래를 미치도록 반복하여 듣는 모습처럼.
그렇다.
정확히 말하면, 애증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슬픔을 딛고.
어느새 다시금 그의 소설을 빼어 들게 하는.
가장 큰 매력이라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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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우리는,
독자로서 그를 사랑해 마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