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나에게 어떤 희망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그건 집안을 일으킬 새로운 활력소 내지 돌풍 같은 존재가 될 거라는 믿음이었다.
허나 자식은 언제나 부모에게 배반의 장미일 뿐.
세월이 갈수록 자기 양에 차지 않고 허튼 수작만 하자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셨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 절망상태였다. 그때 아버지의 죽음은 벼락같이 왔다.
내 나이 마흔이 넘고 아버지의 절망이 느껴졌다. 그 절망이 나를 덮쳐 왔다.
자식을 칠남매나 낳고 벅찬 희망을 품었을 아버지에게 해드린 게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가신 후에 보니 그랬다.
이제야 내 절망을 거울삼아 아버지의 절망이 심장을 짓누르는 고통이었음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이 절망을 다른 식으로 돌리고 싶다.
죽음에 이르는 절망이 아니라 창조적인 절망으로 이끌고 싶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할 말이 남아 있다.
이것들은 어쩌면 아버지가 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른다.
나의 말을 복원하는 일. 그것은 곧 아버지의 말을 복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나는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이건 먼먼 사람살이의 한순간이기도 하다.
내 삶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역사인 것.

집짓기는 구체적인 일이고 몸으로 체득할 수 있는 자기 실천의 양식이다.
무너진 것을 일으켜 세우고, 흩어져 있는 감각들을 응집한다.
집짓기는 재건의 의미가 있다.
말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듯 집짓기는 말짓기다.
몸으로 하는 말의 복원이라고 할까?
집짓기라는 구체적인 활동이 나의 피를 돌게 하고, 아버지를 이끌어내고,
종국에는 내 피로 아버지의 절망을 새로운 기억으로 물들이고 싶다.
아버지의 주름진 절망을 이제 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