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PD의 미식기행, 목포 - 역사와 추억이 깃든 우리 맛 체험기
손현철.홍경수.서용하 지음 / 부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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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목포에서 전복 양식업을 하신다. 그덕에 나는 늘 '목포 유지'라는 농담같은 별명을 달고 다녔다. 전복은 비싼 식재료니까 그렇게 비싼 녀석을 키워서 내다 판다면 꽤나 부유하지 않겠냐는 논리인데, 그렇게 따지면 억대의 대지와 건물을 중개하는 대한민국 부동산 중개업자는 모두 재벌들인가. 여튼 전복은 비싸지만 유통 과정의 차액은 상식적인 수준인지라 지역의 유지라는 건 망상에 불과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전복만큼은 질리도록 많이 먹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전복 양식을 하기 전에 우리집은 원래 20년 넘게 김 양식업을 했다. 굴 껍데기에 구멍을 뚫어 포자를 심으면 길죽길죽한 김이 쑹쑹 자랐는데, 그 덕에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집에서 가장 흔한 음식은 바로 김이었다. 지역 유지는 커녕 일곱 식구가 근근이 먹고 사는 수준의 평범한 집안이었지만 부엌에는 늘 김이 넘쳤고, 밥상에는 조기나 갈치, 고등어 같은 생선이 빠지는 법이 없었다. 중요한 일이 있는 날에는 홍어와 묵은지가 상에 올랐고, 나는 일곱 살에 이미 산낙지를 질근질근 씹어넘겼다. 가끔 낙지의 빨판이 입천장에 들러붙어 으앙으앙 울곤 했지만 그래도 나무젓가락에 돌돌 말아주는 산낙지를 꿀떡꿀떡 잘도 먹었다. 할아버지가 막걸리에 콜라를 부어 새끼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내게 건네면 한방에 쭈욱 들이키고 캬아- 하는 감탄사까지 흉내내며 '할부지 한 잔 더!'를 외쳤다.

 

여름이면 엄마표 콩국수를 목을 빼고 기다렸다. 불린 콩을 믹서에 갈아 콩물을 만들어서 국수가락보다는 굵고 우동 면발보다는 얇은 면을 투척하면 콩국수가 완성됐다. 콩국수에 얼음을 넣고 오이를 채썰어 올려 한 접시를 깨끗하게 비우면 그해 여름은 그것으로 족했다. 겨울에는 콩국수의 콩이 팥으로 바꼈다. 고소한 콩국물 대신 달짝지근한 팥국물이 만들어지고, 밀가루 반죽을 밀대로 밀어 샥샥 채를 썰면 칼국수 면발이 척척 쌓였다. 아랫목에 모여 앉아 무릎까지 담요를 덮고 사방에 팥국물을 튀기며 팥칼국수를 후루룹후루룹 먹고 나면 뱃속까지 뜨뜻해졌다.

 

돌이켜보면 우리 집의 경제력과 상관없이 목포는 먹을 것이 참으로 두둑한 지역이었다. 동네 어디를 가도 집집마다 널려 있는 무화과 나무에서 잘 익은 무화과를 아무때고 따 먹었고, 시장에 다녀오는 엄마의 장바구니에도 자주 무화과가 담겨 있었는데 이 과일을 남도 지역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스무 살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어쩐지 서울에 오니 생무화과는 없고 온통 말린 무화과 투성이더라니.

 

초등학교 안에는 석류나무가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과 우르르 몰려나가 가지를 흔들어 석류를 따먹었다. 그런데 세상에나, 석류가 그렇게 비싼 과일이었다니...! 집에서 조금 걸어 나가면 항구가 나왔는데, 골목마다 오징어와 쥐포를 말리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엄마 손을 잡고 항동시장에 가면 대야에 담긴 낙지와 해삼, 멍게 같은 것들을 구경하기에 바빴다. 아빠는 횟집의 회는 비싸다며 종종 수산시장에서 거대한 민어 한 마리를 사다가 날렵한 손놀림으로 회를 떠줬다. 그때 나는 어른이 되면 모두가 그렇게 회칼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게 되는 줄 알았다.

 

세 명의 베테랑 다큐 PD가 목포 지역 음식의 맛과 시간을 더듬어가는 미식기행기, <세 PD의 미식기행, 목포>에는 내가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접했던 그 풍요로운 맛에 대한 이야기가 그득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수탈 1번지로 일제의 잔재가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쇠락한 항구 도시 목포가 어떻게 미식가들의 기행지가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이 곁들여지기도 하고, 지리적 조건이 식재료 생산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간다. 단순히 맛있는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지방 소도시의 맛집 기행이 아니라 민어, 홍어, 낙지, 콩물, 꽃게장, 팥죽 등 목포에서 맛볼 수 있는 그 맛의 정체과 고유성을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가령 조선시대에는 그토록 전국적으로 풍요로웠던 민어가 이제는 남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귀한 생선이 되었는지, 어쩌다 홍어를 삭혀 먹게 되었는지, 왜 세발낙지는 다른 낙지에 비해 그토록 연하고 맛이 좋은지에 대한 속시원한 설명과 목포에서만 먹어볼 수 있는 특유의 요리법들을 소개하는 것이다. 이렇게 음식의 맛을 쫒다보면 목포 사람들의 삶과 일상이 보인다. 어릴 때는 모든 게 너무나 당연하고 흔하게 닿아 있던 식재료들이 목포라는 지역색으로 세심하게 설명되니 읽는 내내 나도 모르게 새삼 그 맛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책을 보자마자 단숨에 읽어내리다가 책 속의 알록달록 식감 돋는 사진들에 심호흡을 하기도 하고, 흐르는 침을 닦아내기도 하면서, 밤에는 되도록 펼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나의 유년과 그곳의 시간을 함께 여행했다. 책을 읽고 나니 갑자기 엄마가 해준 음식들이 먹고 싶어졌다. 엄마 냄새와 목포라는 공간, 그리고 유년의 시간들이 뒤섞여 공감각적인 식욕이 솟구치기 시작한 것이다.

 

* 물론 목포에 간다면 꼭 가봐야 할 식당들도 깐깐하게 선별해 소개하고 있다.

자랑을 한마디 곁들이자면, 이 책에 소개된 맛집들은 대부분 나의 고향집 반경 2km 이내에 있다. 푸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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