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스테인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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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는 어쩐지 선뜻 손이 안 가는 작가였다. 그런데 '흑인임을 숨기고 백인 행세를 한 남자가 등장하는 소설'이라는 구절을 어디선가 읽고 강렬한 호기심이 생겼다. 비록 구입한지 몇 달 지나고 페이지를 펼쳤지만 금세 독파한 책.

일종의 액자 구성의 소설이다. 60대 작가인 네이선은 남들과의 교류없이 혼자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이웃의 콜먼 실크라는 그리스 고전문학 교수가 그를 방문한다.

평생을 학자로 살아왔고 대학에서는 학과장을 맡아 혁신적인 인사와 제도를 도입한 콜먼. 하지만 그는 강의에 계속 결석하는 학생들을 무심코 'spooks'라고 불렀고 이것이 인종차별로 몰려 결국 강단을 떠난다. (콜먼은 'spooks'를 '유령'으로 말한 것이었지만 다른 뜻으로 '흑인, 검둥이'라는 의미가 있었던 것.)

콜먼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작가인 네이선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줄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런 분노도 잠시, 70대인 콜먼은 청소부인 30대 여성 포니아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고또 한번 세간의 비난과 소문을 일으킨다.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오명으로 평생의 불명예를 얻은 콜먼이 사실은 흑인이었고, 젊은 시절 자신의 흰 피부와 푸른 눈으로 백인, 그중에서도 유대인으로 행세했다. 그가 부모 형제와 절연하고 유대인으로 인종을 세탁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이게 가능할까 의심이 들었는데 콜먼의 가계를 훑어 올라간 설명까지 덧붙여지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다. 실제로 미국인 중 어떤 인종인지 잘 모르겠는 경우도 가끔 있으니까.

평생 다른 사람들(심지어 아내와 자식까지)을 속여온 콜먼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오해를 받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역설적이다. 그밖에도 젊은 하층 여성과의 만남이 불러일으키는 갖가지 소문, 오해와 편견이 주는 섬뜩하다. 또 진실보다는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듯 하다.

콜먼과 포니아 뿐만 아니라, 포니아의 전남편 레스터, 콜먼을 음해하는 프랑스인 여교수 델핀, 그리고 네이선까지. 모든 이들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무척 깊이있다. 인간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탐구하고 또 입체감있게 쌓아올리다니. 필립 로스라는 작가에게 절로 경이감이 들었다.

소설의 배경은 1998년, 빌 클린턴이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 섹스 스캔들로 뜨겁던 때였다. 당시 클린턴의 성추문 자체 보다도 그의 위증이 미국인들을 더 분노케 했다고 한다. '거짓말과 그것을 둘러싼 소문'이라는 현상을 보고 아마도 작가는 이 이야기를 쓰지 않았나 싶다. 여러모로 주제를 탁월하게 접근한 작가다.

몰입감도 있고 장르적이기까지 하다. 2003년 안소니 홉킨스와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필립 로스, 완전 인정.
그 동안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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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천국 가는 날
전혜진 지음 / 래빗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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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사람들, 그리고 보통의 음식이 갖는 특별함.

열 편의 연작소설집이다. '김밥천국'은 아마도 편의점이나 노점을 제외하고는 가장 손쉽고 저렴하게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곳일 것이다. 이 책은 이토록 흔한 분식집 메뉴를 소재로 다양한 인물들에게 조심스럽게 렌즈와 스피커를 들이댄 듯한 이야기를 담았다.

학습지 교사, 워킹맘, 삶의 끝자락에 있는 싱글 동성애자, 민원에 시달리는 공무원, 이주노동자, 성폭력 피해자 등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열 편의 이야기들 중 서로 연결되는 것들도 있지만 제각각 다른 상황과 서사를 지니고 있다. 읽으면서 든 생각은 작가가 그동안 정말 다양한 인물들을 관찰하고 수집했겠다는 것이다.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 소설의 배경이 동인천이라는 것도 알았다. 각종 분식 맛집이 포진해 있는 그곳을 떠올리니 더 실감났다. 에피소드로도 나오는 '쫄면'이 최초로 개발된 곳도 동인천이라던데, 소설에 등장하는 식당을 조만간 가봐야겠다.

'오므라이스'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가족의 식단을 책임지는 삶에 대한 동질감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좋았다. 이를 분식 메뉴와 연결시킨 아이디어도. 소수의 특권자들이 아닌 이런 보통 사람들의 힘을 느끼게 해준 최근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더 특별하게 읽었다.


※ 도서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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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프를 발음하는 법
수반캄 탐마봉사 지음, 이윤실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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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반캄 탐마봉사'라는 작가 이름이 낯설었다. 도무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어서 확인하니 라오스 계 캐나다 사람이다.1978년 태국 농카이에 있는 난민촌에서 태어나 한 살에 캐나다로 이주하여 토론토에서 자랐다. 저자를 설명하는 이력이 작품의 많은 것을 설명한다.

열 네편의 단편 소설이 담긴 책이다. 표제작인 '나이프를 발음하는 법'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작품이 라오스 이민자들의 삶을 그렸다. 언어, 문화적으로 너무도 다른 낯선 곳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부모를 보는 자식의 시선, 그리고 이민 1.5세대로서의 좌절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다.

나이프(knife)라는 단어의 첫 글자 k는 왜 발음하면 안되는지 부모는 알려주지 못했다.(나이프를 발음하는 법) 또 해골 코스튬을 입고 부자 동네 집들의 문을 두드리며 '트릭 오어 트릿'대신 아빠가 알려준 '치-카-치'라고 소리치면 사탕을 얻는다.(치-카-치!) 이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엄마는 결국 다시 라오스로 떠난다.(세상의 가장자리)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아닌 다른 라오스 이민자들의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이들은 결코 주류 캐나다인으로 살 수 없다.

네일샵 직원인 전직 복서는 단골 손님을 짝사랑하지만 그녀는 다가갈 수 없는 대상이다.(매니 페디) 캐나다 이민 후 스쿨버스 기사로 사는 남편은 아내가 알바하는 카페 사장과 바람을 피워도 뭐라고 하지 못한다.(스쿨버스 기사)

그밖에도 70대 할머니가 옆집 30대 남자와 사랑에 빠진 '슬링샷'(2019년 오헨리상 수상작)도 여운이 대단했다.

단편소설만이 줄 수 있는 강렬함과 페이소스가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서늘한 이야기, 웃픈 이야기들이 섞어있어 읽는 재미가 있었다.

읽다보니 초기 이민을 떠난 한국인들의 이야기도 생각났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도 떠올랐다. 캐나다 사람들이 라오스 이민자를 대하듯이 우리도 그들을 대하고 있지는 않을까. 언젠가 한국어에 능통한 외국 이민자 작가가 등장해서 탐마봉사처럼 한국 사회를 꼬집는 문학작품을 내놓는 날이 올 것 같다.

책 표지가 예뻐서 독서가 더 즐거웠다. 원서보다 훨씬 디자인이 좋더라.(디자인 표지 최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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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와 거장 - 위대한 창의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데이비드 W. 갤런슨 지음, 이준호 외 옮김, 박성원 감수 / 글항아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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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의 관점으로 분석한 예술가의 두 가지 유형.

재미있는 관점의 책이다. 저자 데이비드 갤런슨은 미국 시카고대학 경제학과 교수다. 그는 대학시절 우연히 듣게 된 현대 미술사 수업에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유명한 예술가들이 대부분 매우 어린 나이에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예술가들도 많으니 이는 어떤 차이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이것을 계기로 그는 예술가들의 창작 방식과 나이에 따른 성취의 차이를 분석하게 된다.

책에서 그는 예술가를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첫번째는 '개념적 혁신가'인데, 이들은 젊은 시절에 창작의 정점에 도달한다. 이들은 명확한 아이디어와 개념을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혁신이 적어지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파블로 피카소를 뽑는다.

두번째 부류는 '실험적 혁신가'. 이들은 경험을 통해 점차 발전해 나가는 유형이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점점 스타일을 발전시켜 나가기 때문에 이들은 주로 나이가 들고서야 창작의 정점에 도달한다. 이쪽의 대표 인물은 세잔이다.

저자는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고가에 판매된 작품을 제작한 나이, 주요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을 제작한 나이 등 객관적인 지표를 토대로 이를 해석한다. 예술작품을 수치화하여 비교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방식도 있다니 새로웠다.

개념적 혁신가와 실험적 혁신가의 특징을 계속적으로 비교하고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또 미술 뿐만 아니라 문학, 영화 등 다른 분야로까지 확장시켜 두 부류의 작가들을 살펴본다.

어느 쪽이 더 낫다는 그런 결론은 아니다. 개념적 혁신가는 '천재'로 여겨질 수 있지만 아이디어가 소진되면 정체기가 올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말년의 파블로 피카소는 젊은 시절보다 덜 주목 받았다. 실험적 혁신가라고 해서 쫄 필요도 없다. 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념적 예술가들보다 작품을 개선시킬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창작이나 역량을 꽃피우는 전성기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예술가의 생애와 창작을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해준 독서였다.


* 도서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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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넘 숲
엘리너 캐턴 지음, 권진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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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쪼이면서 쎄한 느낌의 소설이다. 억만장자, 환경운동가, 아마추어 저널리스트, 작위를 받은 사업가 등 다양한 군상들이 제각각의 욕망으로 파멸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소설 속에서 태연하게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겉과 다른 욕망과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괴리를 책을 읽는 독자만이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점점 긴장감이 고조된다.


제목 '버넘 숲'이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등장하는 것으로 예언과 운명의 필연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뉴질랜드가 배경인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 '미라'가 설립한 환경 단체의 이름이다.


버려진 땅에 불법으로 작물을 가꾸는 환경 단체인 버넘 숲의 설립자 미라. 그녀는 새 부지로 봐둔 '손다이크'를 몰래 정찰하던 중 미국인 억만장자 '로버트 르모인'을 만난다. 르모인은 미라에게 버넘 숲에 거액의 지원금을 주겠다고 제안하고 미라는 그 제안을 받는다.


억만장자와 게릴라 환경단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대가 엮이면서 결국에는 음모와 비극이 시작된다.


르모인은 현시점에서 가장 빌런일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닐까. 돈과 첨단 기술을 무기로 온갖 불법을 버젓이 행하는 정말 악질적인 인물이다. 일론 머스크가 연상되기도 했는데 문제는 현실에서 이런 인물을 악으로 단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씁쓸한 현실을 소설을 읽는 내내 느끼게 했다.


미라, 셸리, 토니 등 버넘 숲과 관련된 인물들도 비슷하다. 겉으로는 환경주의자일지라도 갖고 있는 욕망은 누구보다 속물적이다. 실질적인 변화와 개선을 이뤄내지 못하거나 결국 자본주의 안에서 약자일 뿐인 이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인물들의 내적 심리 묘사가 치밀해서 초반에는 문장을 읽는 것이 다소 버거웠다. 하지만 2부 마지막부터 엄청난 몰입감이 생기더니 3부는 숨막힐 정도였다. 오바마 대통령과 스티븐 킹이 추천했다는데 그만큼 현시점의 사회적 이슈를 잘 파악한 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저자 엘리너 캐턴은 뉴질랜드 출신의 최연소 부커상 수상자다. 소설 속 묘사된 뉴질랜드의 환경과 국제 관계, 계급 문제 등에 대한 부분도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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