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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나 1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피부색이 다른 인종으로서 미국과 영국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문화 차이를 꼬집어 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페멜루와 오빈제의 사랑이야기이도 하다.
그 중에서도 자신이 ‘흑인’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된다는 것을 나이지리아를 떠나서야 실감하게 된 이페멜루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체득한 문화적 차이를 풀어가는 부분에 푹 빠졌다. 첫 페이지에서 ‘필라델피아에서는 퀴퀴한 역사의 냄새가 났다. 뉴헤이븐의 냄새는 무관심이었다(p.11).’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왔다. 뒤로 넘기자 ‘그녀는 왜 프린스턴에는 자신의 머리를 땋을 수 있는 곳이 없을까 생각했다. 핸드백 속의 초콜릿은 이미 완전히 녹아 있었다(p.12).’라는 문장을 발견하고 확신이 들었다. 이 작품은 어마어마하구나. 이 작가는 엄청난 관찰력과 문장력을 가지고 있구나.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친구들에게 초대를 받아 참석한 연말파티에는 항상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적당히 리드미컬한 음악을 배경삼아 가벼운 알콜을 한 손에 들고, ‘나는 누구고 호스트와 어떤 사이야’라는 대사가 수없이 반복되는 곳. 우리는 빠르게 통성명을 하고 빠르게 공통분모를 찾았다. 완벽하게 다른 조건과 환경에 있으면 하다못해 한국의 음식 중에서 좋아하는 공통분모라도 찾아냈다. 다른 의견을 함부로 판단(judge)하지 않고 존중하는 것이 철저하게 몸에 베어있어서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심지어 자신과 전혀 다른 의견을 말하더라도 ‘맞아, 맞아.’, ‘그럴 수도 있지.’라고 긍정하고 넘기기 일쑤였다. 가끔 비슷한 타이밍에 같이 추임새가 터져나오고 한 두 톤 높은 목소리로 끊기지 않는 대화를 가만히 관찰하곤 했다.
이페멜루가 미국에 도착해 관찰한 풍경들을 읽으며 그 때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다시 떠올랐다. ‘사람들은 자신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기꺼워했고, 자기 얘기가 끝나도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이야기를 더 했다. 정적이 흐르게 두지 않도록 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p.13).’, ‘그녀는 지금 자기 삶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냉장고, 화장실 얄팍한 친밀감을 공유하면서. 느낌표 속에서 사는 사람들(p.210).’, ‘그녀는 그를 아이의 모습으로 상상했다. 너무 많은 알록달록한 장난감에 둘러싸인 아이, 늘 ‘프로젝트’를 실행하라고 격려받는 아이, 평범한 아이디어를 내도 늘 굉장하다는 얘기를 듣는 아이(p.320).‘ 공감가는 문장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경험을 토대로 자신이 의도한 바를 정확하게 표현해내는 작가였다.
1권을 읽었을 때 너무 좋았기 때문에 2권 또한 큰 기대를 갖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2권을 읽으면서는 의문의 연속이었다. 오빈제의 영국 이야기는 왜 넣었을까? 영국의 인종차별까지도 설명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니면 영국과 미국의 문화 차이까지 다루기 위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페멜루가 어째서 오빈제와(코시까지 함께) 아침드라마 같은 뻔한 과정을 밟게 될까?
심지어 책을 다 덮고 뒷면 표지에 적힌 책 설명은 '미국에서 비미국인 흑인으로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하던 어느 날, 그녀 앞에 한층 성숙해진 오빈제가 다시 등장하면서 그녀의 삶은 다시 나이지리아로 향하게 된다.'고 끝나는데, 그것을 읽고도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오빈제가 한층 성숙해진 걸까? 이미 오빈제는 어릴 적부터 성숙하지 않았나? 영국을 다녀온 뒤 오빈제가 이전보다 성숙해지는 변화가 나타난 부분을 내가 놓친 걸까? 더 나아가 오빈제와 이페멜루의 사랑 이야기에 꼭 어떤 방식이로든 재회 또는 결말이 필요했을까?
아디치에의 모든 작품을 다 읽고 나서 돌이켜보면,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은 아디치에와 다르다. 그녀는 현실에서 분명하고 당당한 목소리를 내지만 소설 속 여성 캐릭터들은 그녀의 자존감과 매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대신 방황하고, 좌절하고, 흔들리고,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아파한다.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고 하지 않았어야 할 선택도 한다. 읽는 이가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하도록. 특히 『아메리카나』는 욕하면서도 보는 막장드라마를 보는 느낌으로, 그녀의 소설 중에서 가장 '재미'있고 가장 가까운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