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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환대
장희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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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환대>로 2020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던 장희원 작가의 단편소설집. 그 작품에 남은 기억이 좋아서 기대하며 읽었다. 다른 듯 닮은 아홉 편의 작품들이 촘촘하게 실려있다.

표제작인 <우리의 환대>는 재현과 아내가 아들 영재를 만나러 호주로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들이 공항에서 3년 만에 영재와 만나는 순간부터 영재의 공간에서 보내는 모든 순간에 이질감이 느껴진다. 제대로 된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한국에서부터 준비해온 것을 전해주지도 못하고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그들은 영영 아들을 잃었음을 직감한다.

지지하지 않는 인물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은 묘한 체험이었다. 심정적으로는 영재를 응원했다. 재현과 한국에 자신을 맞출 수 없었던 영재가 그동안 어떤 시간을 거쳐 지금의 담담한 또는 단단한 모습이 될 수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은 재현의 시선을 따라간다. 자신의 뜻대로 자라지 않고,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영재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재현. 그리고 그런 재현을 바라보는 나(독자). 이런 기묘한 체험에서 양가적 감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책을 덮고 나서 여운이 길었던 건 <폭설이 내리기 시작할 때>나 <남겨진 사람들>이었다. 공통적으로 누군가의 죽음 이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방식은 저마다 달라서 같은 존재를 잃었다고해도 '우리'가 될 수 없다. 그러고보니 책 속에는 표제작의 제목이 '우리(畜舍)의 환대'라고 적혀있다. 화자와 공통점을 공유하는 우리라기보단 서로 다른 특성을 지녔지만 하나의 공간(우리)에 존재할 뿐인 인물들의 이야기라고 읽어도 될까. 모든 시간이 끝나지 않을 시행착오처럼 보이는 이야기에서 '간단하게 우리를 규정짓지 말고 다른 개인으로 존재하되 다른 마음 곁에 있자'는 메시지를 읽었다.

상실한 사람들이 다시 만난다. 그렇다고 상실이 극복되지 않는다. '극복되지 않음'을 손에 쥐고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 기쁘게 기다리는 환대(歡待)가 아니라 돌아오길 기다리는 환대(還待) 같다. 겨울에 잘 어울리는 소설집이고 마지막에 실린 평론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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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나날
알리스 브리에르아케 지음, 모니카 바렌고 그림, 정림(정한샘).하나 옮김 / 오후의소묘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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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 바렌고의 그림은 섬세한 결이 살아있다. 빛바랜 색감의 그림 위로 가느다란 선과 결이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어둡고 무거운 구름으로 둘러싸인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도 결국은 모두 흘러내릴 거라고, 실은 내 안에 심어둔 씨앗이 꽃이 되기 위한 시간이라고 말해주는 따뜻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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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나날
알리스 브리에르아케 지음, 모니카 바렌고 그림, 정림(정한샘).하나 옮김 / 오후의소묘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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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어요?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잠시 고민한 후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굳이 다시 태어나고 싶진 않아요. 그렇지만,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그렇다면 구름이 되어 보고 싶어요. 구름. 그 구름을 그림책으로 다시 만났다.

📖
그림책은 최소한 세 번 읽는다. 처음에는 그림과 글자를 함께 읽고, 두 번째는 그림을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며 다시 읽고, 마지막에는 두 번의 읽기를 통해 생각한 것들을 돌아보며 한 번 더 페이지를 넘겨본다. 활자만 가득한 책을 읽을 때는 행간을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그림책을 읽을 때는 화간을 읽으려고 한다. 『구름의 나날』을 읽으면서 나의 시선을 사로 잡았던 건 시계와, 바이올린과, 구름.


첫 장을 넘기면 세 개의 시계가 등장한다. 모두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잘 가던 시계가 어느날 갑자기 맞지 않는 이상한 날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고, 책에 등장하는 하루동안의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살펴보는데 마지막 시계를 발견하고 웃음이 나왔다. 이건 고양이 털이잖아(!)
우리집 고양님은 빗질을 좋아해서 매일 1회 이상 작정하고 빗어줘야 한다. 심한 날은 하루 1회 만으로도 연근 모양의 털꾸러미가 나오지만. 털갈이 시즌이 아닐 때는 빠져나온 적당량의 털을 매일 지퍼백에 모아두고 있다. 모아뒀다 털공을 만드려고. 아주 큰 초대형 털공을 만들어서 고양님을 놀래키려고.
책에서 털공으로 만든 시계를 발견한 뒤로는 더욱 적극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이번에 나오는 구름은 털공일까 아닐까?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다음 페이지를 넘겨보는 것이 두 번째 읽기의 또 다른 재미였다. 과연 털공이 또 나올까? 털공을 스윽 그려넣은 이유는 뭘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
구름의 나날을 보내는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따뜻한 차, 몽글몽글한 고양이, 그리고 음악. 그 중에서도 바이올린을 켜는 장면이 나오는데, 한 번은 평범한 옥타브로, 한 번은 아주 높은 옥타브로 연주한다. 자연스레 인물의 기분과 옥타브의 높낮이를 연결해서 읽게 되었고. 몇 년 간 바이올린을 켰던 경험으로 연주 장면을 관찰해 보면 그는 능력있는 연주자다. 여유롭고 평온한 표정, 그리고 정확하고 곧게 편 새끼손가락이 말해준다. 아마도 음악은 구름만큼이나 그의 곁에서 오랫동안 함께 해 온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구름. 다시 태어나면 구름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그것이 흐르기 때문이었다. 구름은 구름이면서 구름이 아니다. 언젠가 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것. 정처없이 흐르는 존재가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 떠오른 것이 구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구름의 나날』에도 그런 구름이 나온다. 작은 구름은 점점 더 자란다. 크고 무겁고 울창해진다. 너무 커서 때론 구름이 나를 잡아먹고 내가 그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러나 구름은 반드시 흘러내린다. 꽃을 피우는 데 꼭 필요한 물이 되어.

나는 『구름의 나날』에 등장하는 모든 오브제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들이라 생각하며 읽었다. 나를 억누르고 내 눈을 가리는 것도, 나를 달래주고 위로해주는 것도, 무슨 일이 있어도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는 것도. 모두 다 마음에 있는 것.
출판사 오후의 소묘는 모니카 바렌고를 '부정적인 감정에서조차 낭만과 다정이 우러나'는 작가, '세상을 향한 특유의 따듯한 시선과 낙관'을 가진 작가라고 소개한다. 낙관보다 비관을 믿는 나는 혼자 있으면 자주, 그리고 쉽게 구름을 만나고. 그래서 낙관을 이야기할 줄 아는 이를 곁에 두려 한다.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모니카 바렌고의 그림도 곁에 두고 자주 보고 싶다.

💭 <구름의 나날> 리뷰어로 선정되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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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픽션 -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 테마 소설집
조남주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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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파트, 종묘, 광화문 교보문고, 밤섬, 전주, 울산. 부동산, 지진, 사직서, 불면증, 가상현실, 관람차, 시간 거품. 조남주, 정용준, 이주란, 조수경, 임현, 정지돈, 김초엽. 『시티 픽션,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는 이렇게나 다양한 배경과 소재가 버무려진 일곱 편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부동산을 소재로 한 작품들. 조남주 작가의 「봄날아빠를 아세요?」와 조수경 작가의 「오후 5시, 한강은 불꽃놀이 중」이 그랬다. 현대 한국에서 부동산은 가장 핫하고 가장 예민한 주제가 아닐까? 부동산 문제를 빼놓고 자산을 이아기할 수 없는 도시인들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난다. 지역구민들이 가입한 온라인 카페에서는 'OO동 집값의 진실'을 논하는 글이 올라오고, 다른 한편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저축해도 부동산 한 방을 이길 수 없음을 진작 깨달은 인물이 영혼없이 일하며 월급을 챙기고 시간이 날 때마다 부동산 투어를 다닌다. 관심이 있기는 한데 뉴스에 매일 나오는 부동산 정책이 막연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소설을 통해 간접적인 공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리얼하다. 부동산이 현대사회에서 가장 강렬한 욕망의 대상이 되어버린지 오랜데 이렇게나 적나라하게 그려낸 작품들이 나와 반가웠다.

김초엽 작가의 「캐빈 방정식」도 좋았다. 세계적인 물리학자였던 언니에게 내려진 '시간지각 지연 증후군'이라는 선고. 모두가 지각하는 시간을 훨씬 느린 속도로 받아들이는 언니가 어느날 갑자기 편지를 보낸다. '백화전 옥상 관람차 있잖아. (..) 거기 진짜로 뭐가 있을 거야. 혹시 시간 되면 한번 가볼래?' 알고보니 그곳은 온갖 괴담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도시의 외딴 놀이공원(시설)에 얽힌 괴담과 관람차를 탈 때 느끼는 울렁거림이라는 보편적인 소재들이 시간을 지각하는 능력과 물리학을 만나 또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최근 인문학적 사유와 과학적 설명이 아름답게 배합된 SF 작품들이 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김초엽 작가님도 믿.보.작 중에 한 명이시고. 이번 단편도 역시나 좋았다. 영화 <인터스렐라>도 떠오른다. 이제부터는 관람차를 타는 모든 순간이 특별하게 느껴질 것이다.

서울에 지쳐 지방으로 내려간 귀향을 소재로 한 「별 일은 없고요?」도 좋았다. 버틸 때까지 버티다 사직서를 내고 엄마가 거주한 지역으로 내려간 '나'. 상처입고 너덜너덜해진 마음에 누군가 툭 치기만 하면 터질 것 같은 상태가 저절로 그려지며 기형도의 시 「조치원」이 떠올랐다.

🔖
서울에서 아주 떠나는 기분 이해합니까?
고향으로 가시는 길인가보죠.
이번엔, 진짜, 낙향입니다.
달걀 껍질을 벗기다가 손끝을 다친 듯
사내는 잠시 말이 없다.
(..) 서울 생활이란 내 삶에 있어서 하찮은 문장 위에 찍힌
방점과도 같은 것이었어요.
조치원도 꽤 큰 도회지 아닙니까?
서울은 내 둥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지방 사람들이 더욱 난폭한 것은 당연하죠.

(중략)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주니까요. 덕분에 저는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

- 기형도, 「조치원」 중에서

이주란 작가의 「별 일은 없고요?」은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서울이 아닌, 낯선 곳으로 간다. 새로운 인물을 향한 수군거림에 답하고 오해를 풀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곳에서 느리지만 정직하게 나를 다시 찾아간다.

🔖
"깊은 새벽에 책상에 홀로 앉아 있으면 이상한 감정이 들어요. 아... 그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꼭 장소인 것 같다니까요. 그 기분과 그 느낌이 종묘라는 생각이 들어요. 갈 수도 있고 머무를 수도 있고 볼 수도 있고 그래서 묘사할 수도 있는 곳."
이도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감정이 장소인 것 같다는 서유성의 말을 곱씹었다. 감정이 장소다. 감정이 장소다.

- p.89, 「스노우」 중에서

도시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여 현실을 입체적으로 감각하게 도와준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조금씩 다른 속도와 모양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도시인들을 위한 단편 모음집. 무엇보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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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색 공책 1 - 도리스 레싱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판 창비세계문학 73
도리스 레싱 지음, 권영희 옮김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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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작가가 한 명 있습니다. 이름은 ‘애나 울프’. 한때 문단의 주목을 받았던 그녀는 이제 딸 재닛을 키우는 싱글맘입니다. 평범한 삶을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녀를 ‘자유로운 여자’라 부릅니다. 또다른 ‘자유로운 여자’ 몰리는 애나에게 어서 다음 책을 쓰라고 재촉합니다. “돈이 다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그 작품이야 다행히 성공했지만, 인세도 언젠가는 끊길 거 아니니?”(1권, p.100)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는 애나는 어딘가 많이 지쳐보입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지만 애나는 끊임없이 쓰고 있었어요. 검정, 빨강, 노랑, 파랑. 네 권의 공책을 빼곡하게 활자로 채웠어요. 독자는 애나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공책을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리며 그녀의 다양한 자아를 만납니다. 검은색 공책에는 작가로서의 애나, 빨간색 공책에는 사회주의에 빠져들었던 젊은 시절의 애나가 담겨있습니다. 애나는 노란색 공책에 가상의 인물 ‘엘라’를 만들어 다음 소설을 써내려가고, 파란색 공책에는 진짜 ‘일기’를 씁니다.

애나의 공책들을 읽으며 일기장 검사를 받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일기장 검사를 받았고, 중학교에선 모둠별 교환일기를 썼어요. 누군가 이 글을 볼 거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자기검열을 하게 되죠. 글감을 정하는 과정에서 어떤 내용을 쓰지 않아야 할지 구분하게 됩니다. 부모님이 서로를 증오하는 말을 쏟아내던 날 어떤 다짐을 했는지, 학교 생활을 하면서 고립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애쓰고 있는지. 이런 것들은 절대 쓰지 않았어요.

나이를 먹으면서 구분하는 능력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논리적인 것과 감상적인 것,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게 되었어요. 어떤 것을 쓰고 어떤 것을 쓰지 않았는지는 다들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애나의 공책에는 그런 구분이 없었어요. 가장 무거운 주제인 정치도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요. 자본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생각한 또래 친구들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어느 국가로 날아가 어떻게 허송 세월을 보내는지, 영국에 돌아와 가입한 공산당이 어떻게 익숙한 세력다툼으로 변질되는지. 거룩한 정치 이념이나 위대한 지도자는 등장하지 않아요. ‘1950년대 영국 정치’로 책을 쓴다면 절대 실리지 않을 인물과 장면들이 그녀의 빨간색 공책에는 가득합니다.

파랑색 공책에서 생리가 갑자기 시작됐던 날을 이야기할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원하지 않는 타이밍에 생리가 시작됐을 때 탐폰을 밀어넣으며 느끼는 불쾌함이라든가,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생리혈이 새어나올지 몰라 허벅지 안쪽에 힘을 주며 긴장하는 모습들. 여자라면 누구나 경험하지만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않는 장면들을 생생하게 묘사한 페이지들을 보며 깨달았어요. 아, 애나는 정말 모든 걸 다 쓰기로 했구나.

『금색 공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랐던 점이 바로 이거였어요. 애나의 모든 감정과 이야기들이 모두 적혀 있는 것. 우리가 사회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교육받았던 것들, 무의식적으로 배제시켜 왔던 것들,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까봐 숨겨왔던 것들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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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최초의 탐폰’이라는 평가나 페미니즘 문학에서 도리스 레싱의 위치를 고려했을 때 『금색 공책』을 읽기 전 기대했던 것들이 있었어요. 그러나 애나는 종종 그 기대를 배신해요. 애나, 당신 자신을 위해 제발 그러지마, 이렇게 말하고 싶은 순간도 많아요. 독자로서 지지할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것까지. 제가 기대한 것이 해답이었다면 레싱은 현실을 보여줬어요.

책을 다 읽고 나니 애나 울프, 그리고 도리스 레싱에게 고마웠어요. 이렇게 날 것의 이야기를 남겨줘서 고맙다고요. 네 권의 공책을 쓰는 이유를 묻자 애나는 이렇게 답해요. “그야 물론 나 자신을 찢어놔야 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지금부턴 딱 하나만 쓸까해.”(2권, p.343) 그렇게 써내려가는 마지막 단 하나의 공책이 ‘금색 공책’이에요.

고요한 밤 책상에 앉아 공책을 바라보는 애나의 뒷모습을 떠올려봐요. 검은색,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공책으로 자아를 찢어놓을 수 밖에 없었던 애나의 뒷모습을요. 여러분의 공책은 어떤 색인가요? 아니, 몇 권으로 나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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