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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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래 장편소설 <타국에서의 일 년>. 낯설고 독특한 책이다. 제목만 보면 일 년간의 타국에서의 경험이 주인공을 변화시키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소설은 그것보다 방대하다. 정체성의 문제와 불안, 엄마로부터 기인한 결핍을 안고 유영하듯 삶을 따라가는 주인공 소년은 더 나은 무언가로 스스로를 탈피하기보다는 세상 속으로 스며든 것으로 보인다. "나는 사라지고 싶었다. 삶으로부터 사라지는게 아니라, 삶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주인공 틸러는 한국인의 피가 조금 섞인 '거의 백인'인 20대 청년이다. 소설은 틸러가 공항에서 만난 밸과 그녀의 아들 빅터 주니어와 함께 지내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틸러가 밸을 만나기 전까지 보냈던 타국에서의 일 년은 중간중간 틈틈이 드러난다. 구성이 선형적이지 않아 독특하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의 흐름이나 사건의 인과관계가 아닐지도 모른다. 지난 일 년간 틸러는 접시닦이 일을 하다가 우연히 만난 중국계 사업가 퐁 로우를 따라 세계를 돌아다녔다. 집을 나간 어머니와 무관심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아버지는 틸러에게 안정이나 애착을 주지 못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틸러는 퐁을 거의 아버지처럼 여기며 그와의 여정에 몸을 맡긴다.

이 소설의 독특한 지점은 또 하나 있다. 틸러가 퐁을 따라다니며 겪은 일 년간의 여정에서 눈에 띄게 성장하거나 변화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소설이 조명하고자 하는 바는 그 일 년간의 경험이 틸러가 밸과 그녀의 아들과 지내는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스며들었는가다. 특별한 경험이 반드시 성장 혹은 변화를 가져와야만 하는가? 글쎄. 어쩌면 우리가 '영영 그 곳에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그 경험들은 우리 안에 녹아들어 우리를 '준비된 채로' 만들어주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 뭐지?' 하면서 결코 짧지 않은 이야기를 계속 읽어내려갈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이창래의 문장이 그려내는 어딘가 씁쓸하고도 무겁지는 않은 정서 때문일 것이다. 이창래의 소설을 읽어본 분들이라면 전작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이 책이 각별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말미에 틸러가 아버지와 전화를 나누는데, 이때 아버지가 '뭐든 통하는 방법을 쓰면 되지' 하고 남겼던 말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그래. 뭐든 통하는 방법을 쓰면 되지. 종착역에 결코 도착하지 못하더라도.

오랜만에 (좋은 의미로) 독특한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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