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소설집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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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있어서 주말을 견딜 수 있었다.



3-4년쯤 전에 한국문학은 못 읽겠다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도저히 못 읽겠다고 말하던 시기가 있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쓰인 글들이 소설집으로 묶여 나오던 시기였다. 곪은 상처에 소독약을 들이붓는 것 같았다. 그때 못 읽겠다고 덮어버린 책들은 요즘도 잘 펼쳐보지 못한다. 그랬던 내가 왕성하게 한국문학을 찾아 읽게 된 것은, 그중에서도 동시대 여성 작가들의 글을 특히나 열렬히 기다리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아직 멀었다는 말>은 권여선 작가가 <안녕 주정뱅이> 이후 4년 만에 펴낸 소설집이다. 인터뷰에서 저자는 ‘슬픔의 마에스트로가 아닌 슬픔의 피에로‘가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나는 어쩐지 ‘슬픔의 마에스트로‘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너덜너덜해진 페이지들을 지나 중간쯤에 있을 법한 주인공들이 이번 소설집에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황혼 녘을 고요히 등지고 선 이들 같다. 고난을 묵묵히 받아내거나 의아해하거나 승화시키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겪어내는 이들같다. 그래, 무력감. 소설 속에서 이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력감이다. 그러나 해설에서 백지은 문학평론가가 주지하듯 이 무력감은, 이들이 겪는 고통은 ‘그들 개인에게 귀속되는 불행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책임을 물어야 할 부당함, 불공정, 불평등‘이다. 그래서 독자인 내가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도 ‘이건 아니잖아‘ 싶은 의아함, 뒤이어 ‘이래서는 안되잖아‘ 하는 분노다.



가장 내 마음을 끌었던 작품은 ‘모르는 영역‘과 ‘너머‘,‘송추의 가을‘,‘전갱이의 맛‘이다. (수록작의 절반이나 되잖아?) 앞의 세 작품은 소설 속 인물들에게 개인적인 상황을 이입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고 마지막 ‘전갱이의 맛‘은 ‘기억되거나 발견되는 나만의 말‘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로서의 말이 아니라 그냥 나 자신만을 위한 말. 이 이야기가 이혼을 거친 두 사람 사이에서 전해지는 형식의 소설이라 더욱 좋았다. 두 사람의 관계에 어떤 쓸쓸함이 감돌고 있어서 좋았다.



문학은 소설은 분명히 힘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다시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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