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삶
실비 제르맹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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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표지의 소설, 실비 제르맹의 <숨겨진 삶>. 왜 예상하지 못했을까. 소설의 중심에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 있다는 것을.



소설 속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남편 조르주를 잃은 사빈과 네 아이, 그들의 삶에 불현듯 등장하는 과거를 알 수 없는 남자 피에르. 사빈의 시아버지 샤를람은 피에르를 못마땅해하고 결국 그를 내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샤를람의 누이이자 조르주의 고모인 이디트가 있다. 오래 전 조카 조르주에게 욕망을 품은 바 있으며 이후 평생 독신으로 살고 있는 그녀.



피에르의 과거는 소설의 후반부에 가서야 밝혀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야기한 비극과 광기가 그의 과거를 잠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과거가 밝혀지는 바로 그 순간, 그가 사빈의 가족들을 떠나 ‘소 예수’로 불리웠던 8년간의 시간이 비어버린다. 숨겨진 삶에 덧씌워진 또 다른 숨겨진 삶이다. 독자들은 영영 피에르를 알 수 없다.



그리고 로스코의 그림. 피에르가 방 한 켠에 두고 매일 바라보았을, 노을을 닮은, 노란색과 주황색의 색채가 만발하는 그림. 사빈의 큰아들 앙리는 피에르의 방에서 그 그림을 발견하고는 ‘이 그림을 동반자로 삼은 남자가 정말로 나쁜 사람일리 없다’고 결론내린다. 또한 소설의 중간중간 사빈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은 노을빛을 그대로 통과하여 그들 자신의 숨겨진 모습을 찾는 것처럼 묘사된다. 마치 로스코가 그림을 그릴 때 그러하듯이. 소설의 결말부에 재등장하는 ‘구원받은’ 피에르 또한 마찬가지다. 사실 그 장면에 이르러서는 소설 전체가 로스코의 작품에 바치는 헌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 로스코와 그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다. 수많은 이들에게 그러하겠지만 내게도 특별한 로스코의 작품들. 15년도 예당 로스코 전시라던지(마지막 ‘레드’ 전시장에서 사진 촬영 허용 정말 너무 끔찍했다. 어떻게, 하필, 레드 앞에서. 지금 떠올려도 악몽같다.), 테이트 모던의 작품들이라던지, 시즌 별로 수차례 관람하는 연극 <레드>라던지, 한강의 시 등등. 한때 침대의 벽면을 로스코의 다양한 레드 포스터와 엽서로 채웠던 적도 있었는데 돌이켜보니 매일 밤 그 작품들을 바라보며 잠들던 날들은 어떤 의식 - 죽음과 광기에 가까웠다.)



섬세하고 시적인 표현이 아주 매력적인 소설이다.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68혁명과 제 2차 세계대전의 잔재가 인물들의 행동이나 과거사를 통해 소설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숨겨진 삶>은 결국 그 모든 시기를 통과하는, 사랑과 죽음과 사생아와 성적 정체성과 다른 모든 비밀들을 내포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많은 순간 모호하지만 결국 어떤 색채로, 로스코의 그림으로, 기억으로, 감정으로,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로 표현되는 우리들의 삶 말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은 나는 엉뚱하게 넷플릭스 드라마 <메시아>의 어떤 장면을 떠올렸다. 나체로 국경을 건너는 소년. 나의 가장 나약한 모습인 채로, 그저 인간인 채로, 헐벗은 채로 당신의 총구를 향해 다가가는 나를, 당신은 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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