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에세이를 단숨에 읽어내려갔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씁쓸함이 나를 가득 채우는 것이 느껴진다. <나의 살인자에게>는 친오빠를 법정에 세워야했던 여동생의 이야기다. 수십년간 오빠 빌럼으로부터 세뇌, 폭행, 협박 등을 받으며 그의 범죄행위를 알고도 돕거나 숨겨야했던 여동생 아스트리드. 그녀는 빌럼이 형부의 죽음을 지시했다는 사실을 알고 점차 빌럼의 속박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다. 아스트리드와 그녀의 언니 소냐, 빌럼의 동거인이었던 산드라 셋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빌럼에게 대항했다. 빌럼은 교도소에 수감되어있지만 자신의 동생들의 청부살인을 지시했음이 드러나고, 현재 아스트리드는 신원을 숨긴채 이동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유년시절로 거슬러올라가는 아스트리드의 고백은 너무나 충격적이다. 폭력적이고 위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어머니와 네 형제는 서로를 의심하며 자라야만했다. 그녀는 자신에게도 폭력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내가 남자아이였으면 오빠처럼 자라났을지도 모른다.(267)‘ 세대를 거쳐 대물림되는 가정폭력의 굴레 속에서 모든 구성원들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혹은 그것이 상처인줄도 모른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라지자 그 자리를 대신한 큰오빠 빌럼. 매력적인 사이코패스. 모든 가족들은 그를 위해 복무한다. 공포에 질려서.
아스트리드와 소냐는 빌럼에게 이용당하는 생활이 계속되는한 언제든 자신들도 죽임을 당할 수 있음을 알았다. 고발을 해도 죽고 안해도 죽는다면 하자,는 것이 그녀들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아스트리드의 갈등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어쨌든 빌럼은 그녀의 오빠인것이다. 수십년간 그의 충실한 조언자 역할을 했던 아스트리드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끝없이 시달린다. 하지만 그녀는 빌럼을 법정에 세웠고 철창에 가뒀다.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결심. 수백번 수천번 흔들리더라도 행동에 옮기는 순간 삶이 달라진다는 것. 후회와 분노와 협박으로 일상이 점철되더라도 행동하고 결과를 책임지는 것. <나의 살인자에게>를 읽으면서 내가 배운 것이다. 아스트리드와 소냐, 산드라 세 여성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빌럼을 생각하면 끝없이 아찔해진다. 나라면 그의 협박과 회유에 걸려들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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