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보게됐다. 쉬는 날이었고, 책도 컴퓨터도 지겨워 이불 속에서 몸부림 치고 있을 때였다. 여동생은 내 옆에서 삑삑거리며 어플 게임이 한창이었는데 마지막이 얼마 안 남았다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playfirst 의 dash 게임이었다. 게임을 좋아하는 내가 유료로 다운 받은 게임이다. 여동생은 돈을 주고 게임따위(?)를 받는다며 궁시렁거렸다. 음악을 듣기 위해 동기화를 하던 중 자신의 아이폰에 유료 게임이 무료처럼 다운 받아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여동생은 쓸데 없는 것이 들어왔다며 난리를 치더니 다운 받아진 4개의 게임 중 3개를 차례로 깨고, 지금 마지막을 달리고 있다. 심심하여 건들기라도 하면 으르렁거린다. 무섭게시리.

 여동생에게 물릴까봐 건드는 것은 관두고 채널을 돌리니 추억의 드라마라며 2003년도 방
 송 됐던 "남자의 향기"를 축약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와 남자의 향기다. 옛 생각이 난다.
 교복의 양갈래 머리를 하고, 로맨틱한 사랑에 두 손 모아 진심으로 황홀해 했던...
 학창시절 소설 "남자의 향기"는 엄청난 화제였다. 피가 섞이지 않은 남매의 사랑, 헌신,
 그리고 죽음. 누가 처음 소설을 교실에 가져왔는지는 생각 나질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은행에서 번호표를 뽑듯이 순서를 정해 자기 차례를 기다렸고, 도미노 처럼 앞선 친구의
 눈물에 건네받아 눈물로 뒤 차례의 친구에게 전해주었다는 것.
 친구들의 눈물에 그리고 스포성 이야기에 감동이 반감되어도 여전히 재미있었고, 여전히
 슬퍼서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엔 온통 은혜와 혁수이야기였다. 여학생들은 눈을 빛냈다.
 

나도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을 받고 싶다. 

세월이 흘러 다시 보게된 "남자의 향기"는 학창시절의 추억을 생각나게 했지만 그때 받은 감동까지는 가져오지 못했다. 촌스러운 화면과 어쩡정한 전개의 드라마 때문이 아니었다. 순수함이 자리 잡던 마음에 아무리 기다려도 백마탄 왕자는 오지 않는 다는 현실이 들어 찬 까닭이다. 난 냉정해지고, 시각이 조금 어쩌면 많이 삐뚤어지기까지 했다. 지금의 나에게 "남자의 향기"는 초절정 민폐 여주인공의 종결자 은혜와 현실을 모르는 무대포 혁수의 집착으로 결론지어 버린다. (으악~) 폭력을 쓰는 나쁜 놈이긴 하지만 적어도 솔직하기는 했던 철민이 은혜의 손에 죽고 그녀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혁수를 보며 여동생에게 물었다. 네 남자친구도 저럴까? 네가 살인을 하면 감싸주고 대신 감옥에 갈 수 있어? 여동생은 으르릉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아니. 오빠는 나 창피하다고 버리고 도망갈꺼야. 응?  -0-  

기억이 난다.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모여 혁수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고 괜찮다며 서로를 위로하며 다독였다. 우리는 경쟁하듯 울었다. 나는 제일 많이 그리고 크게 서럽게 울었다. 좀 덜 울던 친구가 화장지를 주고, 나를 안아줬다. 그게 큰 위로가 됐다. 나는 어린애처럼 울었고, 그 친구는 엄마처럼 내 등을 쓰다듬었다. 그땐 그랬다. 그때의 나는 그랬다. 


2.

자주가는 홈피가 있다. 자유 여행가였고, 책도 쓰면서 나름 유명하다면 유명한 홈피다. 그녀의 글이 마음에 든 이유는 여행지과 정보가 아닌 여행지 사진에 담긴 이야기 위주 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이야기보다 정보 위주로 글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또 비교적 최근에 결혼을 해서 홈피를 이루는 주 내용이 육아와 가족이야기다. 예전의 그녀의 글이 훨씬 좋았지만 난 아직도 종종 홈피에 들어간다. 그리고 새로 업데이트 된 정보보다 예전의 그녀가 써 둔 여행기를 읽는다. 그녀는 나보다 4~5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용기와 자신감은 그 보다 몇 배는 나보다 많다. 활기찬 그녀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난 늘 가고 싶은 욕구를 누르려 애썼는데 그 중 최고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이었다.



며칠 전에도 그녀가 쓴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여행기를 읽었다. 그리고 한 문장을 발견한다. 그녀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생일 선물로 걷기로 결심을 한다. 그때의 그녀의 나이는 지금의 나와 같은 나이였다. 내가 20대 후반부터 걷기를 꿈꾸던 산티아고는 어느덧 그녀가 걷기 시작한 나이가 되어있었다. 난 아직 그대로인데. 아니다. 30대만큼 나이를 먹고, 30대만큼 경험을 하고, 30대만큼 생각이 자라고, 30대만큼 현실을 안다. 이상한 기분이다. 가슴은  터질 것 같고, 머릿 속은 쾅쾅 거리는 게 진정이 되질 않는다. 막연한 기대. 난 늘 막연한 기대감만을 안고 살았다. 그건 내 생활 어디에서나 적용되었다. 난 냉정해지고, 시각이 조금 어쩌면 많이 삐뚤어지기까지 했는데 자신에게는 늘 관대하기만 했다. 난 여전히 생각만 한다. 생각만으로는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발견하고 후회하고 생각하고, 타협한다. 그리고 반복한다.

학창 시절의 순수함이 그립다. 10대처럼 생각하고, 10대처럼 즐거워하던, "남자의 향기"를 읽고 10대처럼 울 때가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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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4-14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의 향기를 저도 10대때 만났기 때문에 욕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20대나 30대에 남자의 향기를 읽었다면 저는 엄청나게 욕을 퍼부었을 거에요. 버벌님이 지적하신 '민폐 여주인공의 종결자 은혜와 현실을 모르는 무대포 혁수의 집착' 에다가 폭력미화라는 이유까지 곁들여서 말이죠. 남자의 향기는 그러니까, 사춘기때 만나야 하는 그런 책인가봐요. 어쨌든 그 주인공들로 안재모와 한은정(김은정과의 사이에서 이름 엄청 헷갈렸어요)은 저 역들에 안어울렸어요. 으윽. 전 보진 않았지만 말예요.

아주 오래전의 일이네요. 아주 오래전.

버벌 2011-04-14 12:02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전의 일이네요. 라는 다락방님 말을 곱씹고있어요. 저도 그때 당시 드라마도 영화도 보지 않았어요. 주인공이 안재모와 한은정이었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네요. 다락방님 말처럼.. 남자의 향기는 사춘기때 만나야하는 책이에요. 그렇게 생각해요 저도

2011-04-14 1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4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4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4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4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4-18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티아고 순례길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꽤 가더군요.

버벌 2011-04-18 22:14   좋아요 0 | URL
네 그것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4-23 15:52   좋아요 0 | URL
음...

노이에자이트 2011-04-18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한은정 누나! 좋아요! 우리 옆집에 이사오면 좋겠어요.

버벌 2011-04-19 03:23   좋아요 0 | URL
ㅎㅎ 누나인가요? 저에게도 언니.. 가 맞나? ㅠㅠ 우리 옆집에 이사 오는건 반대요. ㅡㅡ;;

노이에자이트 2011-04-20 14:30   좋아요 0 | URL
저는 이쁜 여자는 다 누나라고 한답니다.이렇게 부르는 거 요즘 유행인데 모르시나봐요.버벌 님도 이쁘면 제가 누나라고 불러줄 수 있어요.

버벌 2011-04-20 18:32   좋아요 0 | URL
모르셨나보군요. 전 예쁜 여자가 아니랍니다. 전 "게임하는 질투 많은 여자" 에요 ^^

노이에자이트 2011-04-20 22:59   좋아요 0 | URL
으음...설마...

버벌 2011-04-21 00:34   좋아요 0 | URL
정말임. 하늘땅 별땅 나눠먹기 땅땅땅.

노이에자이트 2011-04-21 14:25   좋아요 0 | URL
버벌 님이 만약 한은정 닮았으면 우리 옆집으로 이사오세요.

버벌 2011-04-22 22:36   좋아요 0 | URL
움. 그럼 절대로 이사 갈 일이.......... ㅡㅡ;;;

노이에자이트 2011-04-23 15:52   좋아요 0 | URL
음...그렇군요.

노이에자이트 2011-04-24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장입고 호피무늬 얼룩진도견을 안고 있는 사진을 찍어서 올려주세요.어떤 연예인을 닮았는지 확인해 봐야죠.

버벌 2011-04-25 11:59   좋아요 0 | URL
연예인을 닮아야 사진을 찍어 올릴 수 있는 건가요? 누구나 한번쯤 들어왔을. 너 누구? 닮은 것 같다. 라는 말을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 는... 데....요.....

노이에자이트 2011-04-25 16:44   좋아요 0 | URL
연예인보다 더 아름다울 수도 있으면 더 좋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