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반. 당시 난 열 다섯명 남짓의 오프라인 회원을 가진 인터넷 동호회 회장이었다. 딱히 회장이 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고, 원래의 회장과 관계가 틀어 지기 전 부회장이었다. 거의 대부분이 중학생과 고등학생이었고, 나와 나이가 같은 남자 회원 한명과 그나마 나이가 많다는 대학생 친구들 세명이 포함 된 멤버였는데 그 중 한명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부터 알던 회원으로 해가 바뀌어 대학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기존 멤버 이외에 나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좀 더 많은 회원이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동호회 분위기를 장악하고 있었던 어린 학생들의 분위기에 적응을 못 한 탓인지 쉽게 활동을 그만 둔다. 난 나이가 제일 많았고, 직장인이었다. 그 시기에 내 지갑은 배부른 월급날의 포식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계속되는 약속과 행사에 비명을 지를 정도로 굉장히 바빴는데 난 가난해지는 지갑 걱정보다 사람을 만나고 즐기는 것에 큰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난 회장이었다. 

동호회 활동은 짧았다. 하지만 동호회를 떠나서 몇명은 친분을 계속 유지 하고 있다. 지금도 가끔씩 안부를 주고 받는 회원까지 포함한다면 모두 다~ 는 아니어도 절반 이상은 되니 나름 성공적인 동호회 활동이었다고 생각한다. 갓 대학생이 었던 회원 세명 중 두명은 그때부터 상당한 시간 동안 아니 불과 얼마 전까지 나의 주 술자리 상대였는데 (한명은 서울로 옮겨가서 두명이 됐다) 지금은 온라인 게임에 같은 혈원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다. 세월이 흘러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은 직장인이 되었고, 그 보다 좀 더 어렸던 학생들은 대학생들이 되었다. 지난 주말 서울에 갔다. 순전히 술자리를 위한 이동이었다. 자주 얼굴을 보던 두명을 빼고, 근근히 연락만 전하던 회원 두명을 6년 만에 보는 자리였다.

동호회 활동 시절 갓 대학생이었던 남자 세명과 고등학생이었던 여동생, 그리고 그때도 지금도 직장인 나. 나 빼고 그렇게 자주 모였단 말이에요? 이제는 20대 중반이 된 여동생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풋풋함에 20대의 세련미가 더 해졌는데 예뼜다. 얼굴이 아니라 젊음 그 자체가 예쁜 동생이었다. 난 언제나 그녀 보다 앞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날의 난 그녀보다 열 걸음. 어쩌면 그보다 더 멀리 후퇴한 느낌이었다. 질투가 난다. 예쁘게 큰 그녀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난 그녀를 좋아한다. 앞으로도 좋아할 것이다. 바라지만. 예전처럼 아무 이유 없이 그녀를 좋아했으면 한다. 너는 고등학생이었으니까. 내 말에 그녀가 음음. 너 말고 여기 세사람은 다 성인이었으니 술자리가 많았어. 그런데 좀 자주 모이긴 했다. 일주일에 두 세번? 어쩔땐 그보다 더 모이기도 했어. 그땐 그랬다. 우린 정말 자주 만났다.  

서울을 다녀와서 한동안 어지러운 생각에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는데 오늘 새벽. 의도한 건 아닌데 이불에 눕자 서울에서 그들과의 대화가 떠오른다. 차분하게 그리고 세세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추억 이야기에 보이지 않게. 하지만 내 눈에는 보이는 질투를 했던 것 같다. 고등학생이었던 그녀의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유가 어쨌든 아쉬움은 있는 모양이다. 자신만 제외하고 가지고 있는 추억이. 그것도 꽤나 자주 모여 친목을 다졌다는 것이.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는 것이. 맞다. 난 그녀가 모르는 추억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그녀가 절대 가질 수 없는 추억이 있었다.
그건 온전히 나만의 것이다.


엘라니스 모리셋 - uninvited

그녀의 노래를 처음 들은 그날도 그들과 함께였다. 언제나처럼 이유 없이 만나 이유 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쪽 벽면에 큰 스크린이 달린 술집이었는데 당시 유행하던 뮤직 비디오가 쉴새 없이 비춰지고 있었다. 댄스 음악이 한동안 흘러나오다가 갑자기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먹던 술잔을 놓고 스크린에 집중을 한 것은. you oughta know로 인해 그녀의 존재는 알고 있었고, 당신 팝 전문 프로그램으로 인해 데뷔가 마돈나와 연관 되어 있음도 알고 있었다. 제목이 뭐지? 처음 듣는 노래가 궁금했지만 누구도 대답 해주지 않았다. 스크린에 주목한 것은 나 뿐이고, 다른 이는 자신의 잔에 주목하고 있었다. 오케스트라를 비롯한 세션맨들을 뒤에 두고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엘라니스 모리셋이 특유의 목소리로 쓰러질 듯 몸을 흔들며 열창하고 있었다.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훌륭한 연주에. 집에 돌아와서 검색을 시작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받을 수 있는 그녀의 노래를 모두 다운 받고, 하나 하나 들으며 내 귀가 기억하는 노래와 매치 되는 것을 찾았다. 한숨만 나왔다. 며칠의 검색 끝에 예상되는 곡을 찾게 되는데 그녀가 시티오브 엔젤의 OST를 불렀다는 문장을 읽고 나서였다. 아마도 이 곡일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자주 이용하는 음악 사이트에서 시티 오브 엔젤을 검색 했다. 그리고 드디어 난 화면에 가득한 사라 맥란클란의 "angel" 사이에서 엘라니스 모리셋의 이름을 찾았다. 그날 내 마음을 떨리게 했던 공연의 영상까지. 그 뒤로 몇 개의 엠피쓰리가 내 손을 거쳐갔지만 늘 빠지지 않는 노래 중 하나가 된 엘라니스 모리셋 "uninvited"





나도 노래 가사의 일부 처럼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당신이 나에게 반했다는 게 기쁘지만 난 당신을 초대 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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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4-10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버벌님은 역시, '게임 하는 예쁜 여자' 로군요. 흣.

맨 마지막에 인용하신 가사는 저는 이렇게 바꿀 수 밖에 없어요.

당신은 나를 초대하지 않았지만 난 당신에게 반했어요, 라고.

버벌 2011-04-11 02:39   좋아요 0 | URL
"게임 하는 질투 많은 여자" 가 맞아요. 예쁜....은 저와는 거리가 먼. ㅋㅋ

당신은 나를 초대하지 않았지만 난 당신에게 반했어요.

네.. ^^

에디 2011-04-10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게임 안하는 안예쁜 남자' 에요. 훗 (다락방식으로).

생각해보면 저도 어린 시절! 가끔 만나서 밥을 얻어먹고 하던 동호회의 직장인 누나들이 있었는데, 제가 어른이 되면서 너무 당연한듯 연락이 끊긴것 같네요. 가아끔 생각나요. 10살 가까이 어린 꼬맹이랑 단 둘이 노는건 어땠을까? 물론 전 진심으로 재밌었지만...

버벌 2011-04-11 02:40   좋아요 0 | URL
ㅎㅎ 안녕하세요. '게임 안 하는 안 예쁜 남자' 에디님. '게임 하는 질투 많은 여자'에요. 훗. ^^ 제가 놀았던 친구들도(현재도 놀고있는) 진심으로 재미있다고 생각 했으면 합니다. 종종 이 누나는 왜 자기 또래랑 놀지 않고 우리랑 노는거지? 라는 부류의 생각을... 절대로 안하면 좋겠지만 ㅎㅎ 그래도 가끔만 생각 해 줬으면 좋겠어요. 제가 소심해서 연락을 잘 못합니다. 중간에 연락이 끊긴 몇년이 있었는데 어쩌다 한번씩이었지만 끈질기게 그들이 먼저 연락을 해 주었어요. 그래서 용케도 관계가 이어져왔습니다. 지금은 예전보다 더, 훨씬 더 친해져 버렸어요. (덧붙임 > 저는 나이차가 10살까지는 아니에요... 그래서 연락을 했나??? ㅎㅎ)

다락방 2011-04-12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게임 안하는 질투 많은 여자' 에요. 흣

버벌 2011-04-13 21:4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 속은 좀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