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 교대 시간이었다. 피곤이 둥둥 뜬 얼굴엔 자꾸만 내려오는 눈꺼풀을 힘겹게 올리는 싸움이 한창이다. 선배님은 열심히 인계 중이고 다음 교대자인 팀장님과 또 다른 선배님은 열심히 듣는 중이다. 반대편에 앉은 나는 정신을 잃어 고개가 떨어질까봐 연신 오른발로 왼쪽발을 누르고 있다. 나이를 먹으면 힘이 약해지는 건지, 아픔을 느끼는 게 둔해지는 건지. 아니면 둘 다 인건지. 힘을 주어 누르는데도 아프지가 않다. 야근을 뛰어도 이렇게 감당 못 할 정도로 눈이 감기진 않았는데 나도 이제 나이를 타나 보다. 보약을 한재 지어먹을까? 고민에 빠진다. 난 분명히 고민을 하고 있었다.

고개 들어라
.
고개를 들었다. 더불어 정신도 번쩍 든다. 해태 눈을 한 팀장님이 희멀건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웃음은 냉랭했다. 노구를 이끌고 일 할려니 힘들지. 인계 후 팀장님이 말했다. 나이는 먹어가는데 인원은 줄어들고, 일은 많아지고. 이번에는 선배가 말했다. 우리 늙으면 줄줄이 실버타운 가죠. 거기 들어가면 비싸잖아. 돈 많이 벌어야겠네. 팀장님이 웃었다. 그리고 오통통한 손가락으로 역시나 오통통한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노처녀가 많으니 늙어 외로우면 다 모이겠지. 결혼을 해. 남편이 얼마나 좋은지 아나? 맞는 말이다. 분명히 맞는 말인데. 친구들은 아이들 대학 보내는 시점에 이제 중학생이 된 큰 아들을 가진 팀장님 말이 당연하게도 쉬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팀장님이 어깨를 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서
 어서어서 시집이나 가. 좋은 나이 다 지나간다. 생각했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사람이라...
  
 난 낯가림이 심하다. 실제 사람 상대하는 것만이 아니라 얼굴이 안 보이는 인터넷에서도 마찬가
 지다. 좋은 글을 읽고 거기에 대한 글을 써 주는 게 마땅한 일이긴 하나 그 글 올리는 것 조차 쉽
 지 않다. 그러니까 댓글을 다는 것은 정말 정말 마음에 드는 글들인데. 그것조차 글쓰기 전부터
 고민을 시작해서 글을 다 쓴 후에 저장 버튼을 누를때까지 고민을 한다. 오히려 오프라인은 좀 낫
 다. 하는 일이 사람 상대하는 일이다 보니 년차가 올라갈 수록 능글함이 더 해져서 먼저 인사하
 고, 말 을 건네는 것은 예전보다 쉬워졌지만 여전히 난 새로운 사람은 힘들고, 어색한 사람과는
 한 공간에 있는 것이 너무 싫다. 왜?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으니까.

낯가림이 심했던 어릴 적. 난 학교 다니면서 처음으로 점심 시간이란 걸 경험한다. 초등학교 3학년때로 기억하는데 밥을 먹고 나면 주어지는 자유시간에 남자 아이들을 운동장에서 고무공을 주먹으로 쳐서 하는 야구 놀이를 하고, 여자 아이들은 비좁은 통로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며 오랑캐를 무찌르러 다녔다. 그놈의 오랑캐는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었다. 학년 초라 난 아직 친구들 보다 학급 문고와 더 친했는데 표지도 떨어져서 제목도 알아보기 힘든 책을 단지 고무줄 놀이 하자고 할까봐 무서워서 읽었었다. 이 무슨...
 
학급 문고에는 한 30권 정도의 책이 있었다. 대부분이 초등학교 3학년에겐 낮은 수준의 동화책이다. 하지만 엄지공주와 신데렐라와 백설공주를 넘으면 "모모" "80일간의 세계일주" 있었다. 내가 너무나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모모"와 "80일간의 세계 일주"

   

  

 

 "모모" 는 지금도 인기 있는 책이지만. 어릴 적엔 어린이들이 많이 읽는 책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학급문고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침마다 하던 TV어린이 유치원에서 삐삐롱스타킹과 함께 제일 많이 인형극으로 나오기도 했다. 1995년도 작가인 미하엘 엔데가 죽었다는 말에 (선생님이 알려주었는지 뉴스에서 봤는지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제서야 "모모"의 작가가 그 사람임을 안 성의없는 팬인 나는 그 길로 동네 서점에 달려갔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모모를 찾았는데 없었다. 동네 서점에는 없었다. 좀 더 걸어 시내의 큰 서점으로 가느냐 고민은 떡볶이에 항복을 했고, 회색인간들은 직장 들어가고 얼마 후에 텔레비전 영화로 네버엔딩스토리를 볼 때까지 잊혀졌다. 나름 미하엘 엔데의 글이 무엇이 있는지는 아는. 성의 없는 팬에서 조금은 아는 팬으로 바뀐 이후였기 때문에 네버엔딩스토리를 보고 당장에 컴퓨터 검색을 한다. 그리고 구입. 네버엔딩스토리 와 모모. 다음 해에 삼순이 열풍이 불어 덩달아 열풍은 맞은 모모를 보며 그때문에 모모를 구입하게 된 모든 사람들이게 (친한 친구를 포함) 웬지 모를 질투가 일었다. 

이 책이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책이었던가. 
     
어릴적 난 쥘 베른에 빠져 살았다. 지금이야 쥘 베른이란 이름을 알지만 어릴 적엔 알리가 있나? "80일간의 세계일주""15소년 표류기" " 해저 2만리" 를 차례로 읽어가며 포그씨와 함께 다니는 파스파르투가 되었고 (포그씨는 될 수 없었다. 어릴 적에도 그의 완벽함을 해내기엔 역 부족이라 생각했었나보다.) 대통령이 되어 애들을 지휘하고 싶었고, 동물을 잡아 기름으로 만들 수 있다는 초에 대해 진실인지 아닌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도 했다. 그리고 노틸러스호를 타고 여행을 다니며 정말 바닷 속 깊은 곳은 뜨거운 물이 있어서 부글 부글 끊는다고 확신했다. 이미 존재를 알고 있는 잠수함이지만 쥘 베른이 글을 쓰던 시대에는 잠수함이 발명되기 전 이었으니 그가 얼마나 대단한 상상력을 지녔으며, 얼마나 많은 책을 썼는지도 그땐 몰랐다. 차례로 읽은 세권이 모두 한명의 작가라는 것도 몰랐으니까. 단지 너무 재미있어서 쉬는 시간만 되면 상상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딱 초등학교 3학년 다운 지식과 생각만 있을 뿐이었다. 

작년 말 술자리에서 지인들과 대화중에 질문을 하나 받았다. 제일 처음 읽었던 책이 뭐에요? 제일 처음? 완독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완독이 아니어도 읽어봤던 책을 말하는 건가? 그게 달라요? 지인이 의아하게 물었다. 당연하지. 내가 가진 첫 책들은 동화책들이었는데 그 책들은 모두 읽을 나이를 한참 넘은 후에 봤어. 그것도 제대로 읽지도 않았어. 나에게 동화는 이솝우화가 다야. 나머지는 그냥 들은 이야기들 이거나 듣지 않아도 텔레비전에서 만화로 본 것들. 그리고 중학교 때 창고에 책들 정리하면서 읽었어. 아마 그때 파랑새를 제대로 읽었을 걸. 동화책을요? 응. 동화책 보다 그 때엔 읽기 힘든 책을을 주로 읽었거든. 어릴때 주말마다 할아버지 댁에 갔었는데 할아버지가 세계문학을 열권 정도 가지고 계셔서 주로 그 책을 봤어. 내용도 모르면서 그냥 읽었던 것 같애. 몇 살때요? 글쎄 글 읽기 시작한 후에 바로였던 것 같은데. 그럼 동화책 말고 처음 그냥 봤던 책은요? 생각했다. 그리고 기억했다.

나타샤가 자신의 첫 사랑인 보리스에게 입맞춤을 하기 위해(그 전에 자신의 오빠가 키스하는 장면을 몰래 지켜보고) 의자가 올라가 보리스의 얼굴을 안는 장면. 나타샤가 키스를 하기 위해 방해되는 머리카락을 흔들어 정리를 했었다. 내 기억엔 그랬다. 웃음이 나왔다. 왜 그래요? 갑자기 웃는 나에게 지인이 물었다. 아냐. 그냥 생각나는 장면이 키스씬이라서. 역시나 어릴때부터 밝힘증이. 당연하지 그게 어디가겠어? 마주보고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전쟁과 평화" 처음으로 읽었던 책은 전쟁과 평화였어. 이해도 못하면서 그냥 있으니 읽었어. 할아버지 댁에선 달리 할 일이 없었는데 그땐 지금 처럼 케이블도 없어서 텔레비전 보는 것도 제한이 있었거든. 어릴때 그걸 봤어요? 응. 내가 좀 빨리 읽었어. 그런 것은. 그때 젊은 베르테르 말고는 다 읽었을 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편지로 되어 있어서 재미가 없었거든. 그 느낌이 지금도 남아 있어서 아직도 못 읽었어. 책은 있는데... 

지인이 다시 물었다. 그럼 제일 처음 완독 한 것은 뭐에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당연히 "80일간의 세계일주". 봤어? 안 봤다고? 내용은 알아? 성룡이 나오는 그 영화는... 아니 그런거 말고. 영화를 보더라도 제대로 된 걸 봐야지. 아니 뭐 틀리다는 것은 아니고, 아니야 틀려. 틀린 게 맞아. 안 봤으면 봐. 재미있다. 유치하지 않아요? 지인의 말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재미있어. 하지만 그건 재미하고는 다른 문제야. 꼭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지금 네가 읽으면 당연히 재미 없을 수도 유치하다고 생각 할 수도 있거든. 좀 빌려줘요. 지인의 말에 멈칫했다. 왜요? 없어. 네? 안 가지고 있다. 그 책을.

맞다. 우습다. 너무나 우습게도 난 그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 책을 보라고 재미 있다고 권해주고는 정작 난 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내 생애 처음으로 완독한 책이고, 몇번이고 읽어서 지금도 장면, 장면이 기억 나는데 책은 가지고 있지 않다. 게다가 쥘 베른을 좋아한다면서 얼마전에 개봉한 영화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가 그의 책인 지구속으로를 모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이 그 책의 존재도 몰랐다.

빨간 표지의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으면서 몰랐던 사실을 새로 알았다. 포그씨는 엄청난 지식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의 집엔 서재도 책도 없었다. 수학적 정확성을 가진 사람으로 서두르지 않으며, 한 걸음도 쓸데 없이 내딛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지식은 모두 신문과 책을 통해서 얻은 것이지만 모두 자신이 이용하는 혁신클럽에 있었다. 쓸데없이 집에 서재를 만들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이었던 거다. 책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 필리어스 포그였다.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책에 대한 욕심이 없다니 얼마나 대단한 생각을 가진 인물이지? 어릴적에 알지 못한 새로 발견한 사실에 배신감과 질투같은 감정이 살짝 든다.

파스파르투는 말한다. 진짜 기계 같은 사람. 그래, 그계를 섬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그런가? 그는 기계니까. 기계니까 욕심이 없는 거다. 그래서 책에 대한 욕심이 없는거다.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들고 서울에 갔다. 그리고 작은 핸드백을 탓하며 그의 책가방에 억지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그가 잊기를 바랬다. 헤어질 때 돌려주지 말고 그냥 가져갔으면 했다. 그래서 그가 나에게 연락을 할 하나의 구실이 생겼으면 했다. 하지만 헤어지기 바로 전 무리의 여동생에 의해 책 이야기가 나왔고, 그가 깜빡했다며 나에게 책을 건넸다. 그에게 그리고 책 이야기를 꺼낸 그 여동생에게 상처(그들은 알지 못하는)를 받은 이후였다. 책을 받아 들고,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돌려받은 책이 내 마음인 것 같아서 그래서 너무 슬펐다. 나와 그와의 만남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그건 그 여동생도 마찬가지다. 그때마다 난 책을 돌려 받는 아픔이 반복될 것이다.

새로운 사람. 그래 새로운 사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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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1-04-07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댓글을 다는 것은 정말 정말 마음에 드는 글들인데.".....

참고로 버벌님은 제 서재에 댓글을 남겨주셨습니다..(으쓱으쓱)

버벌 2011-04-08 00:09   좋아요 0 | URL
알아주셔요. 그 댓글 다는게 굉장히 힘들었다는 것을.. ^^ 고민 많이 하고 달아요. (으쓱으쓱) 해도 되요. 그만큼 좋았어요. 진짜루요 ^^

다락방 2011-04-08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아파하면서도, 아픔이 반복되리란걸 뻔히 알면서도 그를 끊어내지 못하는걸까요?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고 싶은걸까요, 버벌님?

버벌 2011-04-08 09:05   좋아요 0 | URL
제가 묻고 싶어요. 왜 그러냐고 정말 묻고 싶어요. 내 상황을 아는 지인은 나보고 정신차려-> 라는 말을 거침없이 써요. 그보다 더 한 말도 들은 것 같아요. 하지만 도무지 중단 되지가 않아요. 오늘도 내일도 네이트에 그가 접속 하기만을 기다릴꺼에요. 그리고 혹시나 그가 말을 걸어줄까봐 기다리고 있겠죠. 온라인 표시가 된 그의 아디가 오프라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요. 제가. 그래요. 아파요. ^^

노이에자이트 2011-04-08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쥴 베른의 작품을 성인이 되어 완역본으로 읽는 사람은 드물거예요.어린애나 읽는 책이라는 편견을 완고하게 지니는 사람들도 많고요.

버벌 2011-04-09 00:18   좋아요 0 | URL
ㅎㅎ 그렇죠. 제 여동생 마저도 왜 애들 책을 읽냐고 했으니까요. 저는 그런거 다 접어두고 그냥 너무 좋아하는데 책을 보유하지도 않았고, 어느 정도 책을 읽는다 싶은 나이엔 쥘 베른을 읽지 않아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선 안 될것 같아서. ^^ 아. 예전에 모비딕을 읽으려고 책을 찾는데 어린이 책으로 분류가 되서 조금 놀라기는 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4-09 15:55   좋아요 0 | URL
어린 시절 읽은 책은 반드시 성인이 되어 완역본을 읽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그러면 어릴 때엔 눈에 안 들어오던 것도 들어오고 지식이 넓어지지요.삶에 대한 통찰력도 생기고요.

모비딕 완역본으로 한 번 읽어보십시오.아이고...정말 논문을 써놓은 대목이 어찌나 많은지...종교사 이야기도 좍 나오는 곳도 있고...그냥 해양모험 장면만 있는 대목은 재밌습니다만...

버벌 2011-04-10 00:38   좋아요 0 | URL
제가 가진 책은 대교 눈높이에서 나온 "모비딕"입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샀는지 모르겠어요. 구입한지 어림잡아 6~7년 되는 것 같은데. 생각난 김에 완역본 구입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