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페이퍼를 쓰려고 브리짓을 꺼냈다. 그리고 벌써 다섯번도 넘게 읽은 책을 두 권임에도 짧은 시간에 읽어 버린다. 엉뚱한 브리짓의 모습에 웃고, 개성 강한 친구과 그녀의 멋진 남자친구를 부러워했다. 난 어느덧 그녀와 같은 나이와 같은 입장이 되어있다. 30대의 직장 여성이며 남자 친구를 가지고 싶은, 하지만 일단 시급한 과제는 다이어트. 물론 그녀처럼 귀엽게 엉뚱하지도, 개성 강한 세명의 친구들도, 멋진 남자친구도 없었지만.그럼에도 그녀에게 난 강한 동질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브리짓 존스가 마크와 오해로 2틀간 서로 연락을 안했다. 브리짓은 초조하다. 그녀는 그를 너무 사랑하고, 마음에 없는 말을 뱉긴 해지만 절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가 먼저 연락을 하길 바란다. 하지만 마크는 연락이 없다. 브리짓은 모른 척하고 싶어도 도저히 그래지지가 않는다. 지극히 그녀스러운 방법으로 자신의 사랑을 확인 할 뿐.   

마크의 집 앞을 지나치며 불이 켜져 있나 확인한 횟수 2번(왕복한 걸 감안하면 4번). 단지 자동응답기에 남겨진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141로 전화. 그가 1471(상대방 전화번호 추적하는 서비스번호)로 확인할 때 내 전화번호를 추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한 횟수 5번(나쁨. 하지만 메시지를 남기지 않은건 매우 좋음). 나 스스로에게 그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해 마크의 전화번호를 전화번호부에서 찾아 본 횟수 2번(잘 억제하고 있음). 그가 전화 할 경우를 대비해서 휴대폰으로만 전화한 확률 100퍼센트. 걸려 온 전화가 마크에게서 온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원망스러운 기분이 되고(마크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온 전화 제외), 마크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막을까 봐 될 수 있는 한 빨리 전화를 끊은 확률 100퍼센트.        <브리짓 존스의 애인 p. 142>

그리고 그녀는 드디어 중대한 결심을 한다. 오랜(2틀간의) 냉전을 깨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겨우 결심을 한다. 먼저 전화하기로. 그러지 않고는 그녀가 먼저 죽을 것 같으니까

밤 9시 - 좋아. 마크에게 전화 걸어야겠다.
밤 9시 1분 - 자, 한다.
밤 9시 10분 - 마크 다아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조하고 거의 울부짖다시피 하는 목소리로 "여보세요?"하고 말했다. 축구 중계를 보고 있던 중이었는지 전화기를  통해 관중의 함성이 들렸다. 나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나야, 브리짓"하고 속삭였다. "브리짓! 당신 미쳤어? 지금 무슨 일이 있는지 알기나 하는거야? 이틀 동안 전화를 하지 않더니 지금 가장 중요하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안 돼에! 안 돼에! 이 바보 같은, 빌어먹을...... 젠장. 이 얼간이....... 심판 바로 옆에서. 그건 반칙이야! 넌 이제...... 심판이 경고하고 있잖아. 퇴장이다. 에잇, 빌어먹을. 이봐, 끝나고 전화할게."  <브리짓 존스의 애인 p144>

오오 브리짓 브리짓.
도대체 먼저 전화한 네가 잘 못 한거니. 아니면 하필이면 축구 중계를 하는 그 시간에 전화를 한 게 잘 못 된거니?
둘 중에 하나만이라도 아니었으면 좀 더 상황이 나았을텐데.


2부. 

선을 봤다. 그 사람도 나도 시간 내기가 힘들어 겨우 날짜는 맞춘게 연락온 지 근 한달이 지나는 저번 일요일이었다.

내키지 않았다.
난 아직 결혼에 흥미가 없다.
하지만 결혼은 해야 한다. 

둘째 딸은 조만간에 결혼을 할텐데 그 전에 큰 딸을 먼저 보냈으면 하는 부모 마음을 모른 척 할 수 없다가 첫번째.
두번째는 해야하는 거라고 주변에서 말을 하니까. 혼자이고, 내 생활 하면서 즐겁게 지내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결코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그런 주변의 시선에 자유로울 수가 없었으니까. 그럴 자신이 없으니까. "괜찮아요. 전 혼자 살아도 되고, 지금도 좋은데요"라고 말하는 진심이 진심으로 들리지 않을테니까. 어느새 나 또한 그 말이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을 순간이 오는 걸 아니까. 그리고.

나이는 먹어가고, 마음에 담아 둔 사람과는 시작조차 되지 않는 (시작할 수도 없는) 상황.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웬지 배신(?)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해도 이왕이면 좋은 사람이 나와 이 지긋 지긋한 머릿속을 정리해줬으면 했다. 정말 그랬다.
실현 가능성 없는 일에 계속 마음을 담아두고 "사랑의 기적"을 믿는 순진한 여자가 아니기에 내키지 않는 마음을 안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실망하고 그 사람에게 "혹시나"를 생각하고, 기대와 배신을 적절하게 섞어 또 다시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간다.

약속한 일요일. 일찍 일어났다. 기대해서 가슴이 떨리던가 하는 그런건 아니다. 거의 삼주째 돋고있는 두드러기가 났다면 가라 앉는 데 시간이 걸리므로 일부러 알람을 맞춰놓았다. 상대방 남자가 내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그 사람에겐 예쁘게 보이고 싶은 게 심리. 또 말하지만 난 마음 속 다른 남자가 있었지만 그 사람을 위해 일부러 좋지 않은 얼굴로 나가는 순정 만화 속 주인공이 아니다. "혹시나"란 기대가 있으니까. 그러나 이럴 어쩌나. 좋지 않은 예상은 늘 맞는다. 알 수 없는 원인 중에 그나마 제일 근접한 것이 기력저하와 스트레스인데 "선"이라는 나름의 스트레스가 더 해졌으니 들어가던 두드러기도 돋는 게 맞겠지. 시간이 안 맞아 이미 3주 정도를 미뤄 놓은 상태이니 약속을 더 미룰 수는 없는 일.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다. 

두 뺨과 이마에 모기가 물린 듯한 크기의 두드러기가 넓게 퍼져있다. 안 그래도 부은 얼굴이 이젠 터질 듯한 호빵이 되어버렸다. 중단했던 피부과 약을 찾아 먹고, 한약 까지 마셨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얼굴이 진정 되길 기다린다. 이게 마음이 급해지지 두드러기가 들어갈 생각을 않는다. 화장으로 가려볼까 하고 안 하던 파운데이션 까지 발랐는데 붉은기만 가렸을 뿐 부은 얼굴은 그대로. 대략 낭패다. 이것도 운명이거니 생각하고 집을 나서려는데 여동생이 잡는다. 얼굴이 너무 심란하니 아이라인이라도 그려보라는 것. 백만년 전에 그려보고 안 해봤는데. 내가 그려줄께. 여동생이 새로 샀다며 아이라이너를 잡았다. 번지면 어떻게 하고? 이거 안 번진데. 그래? 쌍꺼풀 없는 눈이라 조금 두껍게 그려준다. 거울을 보니 그나마 시선이 눈으로 가 부은 얼굴과 언뜻 보이는 붉은기가 조금 가려진 느낌이다.

"혹시나"는 "역시나" 였고, 한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을 이야기 후 둘 다 미련 없이 일어섰다. 카페 앞에선 한 눈을 팔다 넘어지고 만다. 조심하세요. 남자가 부축하며 두터운 팔뚝을 잡는다. 넘어진 것 보다 잡힌 팔뚝의 두께가 낭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쇼윈도 창으로 잠깐씩 보이는 얼굴이 조금 이상해 보인다. 조짐이 이상하다. 아파트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안의 거울로 눈이 향하는 순간. 난 경악했다. 백만년 만에 그려진 아이라이너는 눈 밑에 2센티 정도의 진한 그것도 아주 진한 다크서클을 만들어 놨던 것. 그제야 이해가 된다. 대화 중 상대방 남자가 왜 그렇게 얼굴을 뚫어져라 봤는지. 집에 오는 길에 사람들이 왜 그렇게 힐끔 거렸는지. 맙소사.

눈이 그게 뭐야? 여동생이 묻는다. 몰라서 물어? 나 이대로 그 남자랑 마주보고 내내 이야기 했어. 중간에 얼굴을 좀 살피지 그랬어? 도착해서 인사하고 화장실도 안가고 한시간 이야기 했어. 중간에 확인할 틈이 어디 있니. 괜히 그렸다. 그치? 아냐. 그리는 건 상관 없어. 아이라이너가 번지든 두드러기든 둘 중에 하나만이라도 없었으면 좀 더 나았을꺼야. 두드러기가 죄지. 어땠어? 남자는? 잠깐의 침묵 후 말했다.

도대체 어느 남자가 팬더와 호빵의 조합을 좋아하겠냐?














 

덧붙임 사진.

 

진흙길을 뚫고 온 아만다를 보고 "생기있다고" 생각 했을 다아시. 책 읽는 척 하면서 몰래 아만다를 훔쳐보는 모습에 왜 가슴이 두근거리지? 다아시역의 배우가 잘생겼으니 좋느니 그런 감정보다 정말 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의 모습 하나 하나에 눈이 쏠리고, 마음이 간다. 이러다 나도 아만다 처럼 그 시대의 낭만을 찾다보면 영영 결혼이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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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3-31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물의 추천입니다, 버벌님. 저도 아이라인 했다가 집에와서 거울보고 이얼굴로 마주앉아 있었다니! 경악을 금치 못하고 내 다시는 아이라인을 하지는 않으리라, 아니 하지 않던걸 대체 오늘은 왜 했단 말인가, 하면서 완전 좌절했었어요. 저는 무려! 좋아하는 사람 만나러 간거였는데. 예쁘게 보이고 싶었거든요. 눈 좀 더 커 보이면 더 선명해 보이면 예뻐 보이지 않을까..
아, 그날이 선명하게 기억나요. 눈화장 한걸 알아봐주고 말을 걸어주던 그의 앞에서 부끄럽고 쑥스러웠던 일, 그러나 집에 오니 팬더가 되어있었던 일.

왜 이런글을 쓰셨어요, 왜요, 왜왜왜왜왜왜왜왜!!!!

버벌 2011-03-31 10:47   좋아요 0 | URL
쓰지 않으면 폭발할 것 같았거든요~~~~ ㅠㅠ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팬더라니. 팬더와 호빵의 조합보다 더 할듯. ㅠㅠ 선본 그날 저녁에 마음에 둔 그사람과 채팅을 했어요. 선에대한 말은 하지 않았는데 순간적으로 너니? 네가 일부러 그렇게 만든거니? 잘되지 마라고 그렇게 바란거니? 라고 계속 모니터에 대고 묻고 있었어요. 사이코패스가 된 것 처럼.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