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엔 식구들 얼굴 보다 직장 동료 얼굴들을 더 본다.
아버지와 난 교대근무라 생활이 둘쑥날쑥인데 보통 남들 일하는 시간에 자고, 남들 잘때 일하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9시 출근에 6시 퇴근이라는 다소 공통적인 직장인 생활 중.
하지만 여동생은 퇴근 후 바로 집에 온다는 것은,  
놀아도 놀아도 끝이없는 직장인 2년차의 룰에 위배되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바빠서가 아닌 순전히 노느라 쥐어버린 입술을 자랑으로 여기며 쉬 집에 들어오질 않는다.
제일 부지런한 생활을 하는 어머니는 일이 끝나면 곧장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텃밭으로 간다. 
잠깐의 밭 일 후 근처 저수지를 돌며 산책 겸 운동 그리고 바로 수면이라는 꽤 규칙적인 생활 중. 
하지만 집에 있는 시간이 적은 탓에 규칙적인 어머니는 불 규칙적인 가족들과 만나는 일이 나보다 더 쉽지 않다.
핸드폰이 있지만 큰딸인 나완 근무중엔 통화도 힘들어서 혹여 심부름 시킬 일이 있으면 쪽지로 남기는 편이다.
"가스불 켜놨다. 물 끓으면 꺼라"
"세탁기 돌려놨다 빨래 널어라"
"청소기 돌려라"  기타등등
남동생은 취업에서 대학원으로 루트를 바꿔 작년부터 학생 신분으로 돌아갔는데 전공이 바뀐 탓에 모르는 공부 따라가느라 열공모드. 현관을 나서면서 "다녀올께~"로 시작. 하교 후 새벽에 들어오면서 "다녀왔어"로 끝난다.
문을 사이에 둔 채로 대화만이다.

며칠 전 오랫만에 세 남매가 모였다.
난 야근을 들어가기 전이었고, 여동생은 체력 고갈과 가난해진 지갑때문에 약속 장소에서 급 귀가를 한 상태.
실험 중인 남동생에게 당장 중단하고 큰 누나 출근 전까지 어서 먹을 것을 사오라
"어서 어서" "빨리 빨리" "급 급" --> 라고 몇 십분간 광란의 카톡질을 했다.
사와야했으니 (우린 많이 먹는다. 정말 많이 먹는다. 해도 해도 너무 먹는다)
큰 지출 뒤 떨떠름한 표정의 남동생을 앞에 두고 여동생과 난 희희낙락 볼 터지게 상추튀김을 입에 넣었다.

"셜록홈즈가 왓슨 시각에서 쓴거였어?"

 

 

  

뜬금 없는 물음에 (너무 당연한 물음이었기에) 젓가락질을 중단하니 남동생이 손에 들린 "주홍색 연구"를 흔든다. 남동생은 나와 함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의 "셜록홈즈" 영화도 봤고, 내가 받아둔 영드 "셜록"도 본 상태였다. 셜록역의 베네딕트에게 감탄사를 연발하는 내게
"연기 잘하던데. 검시관보고 뒤 돌아있으라는 장면에서 배꼽 잡았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남동생이 묻는다. "왓슨시각에서 쓴 거였어?" 라고!


"책 안 봤나? 셜록홈즈. 엄청 유명한 책 이잖아"
"안 봤는데. 나 왓슨이랑 같이 한다는 것도 영화 셜록홈즈 보고 알았는데"
"셜록 홈즈는 알아?" 
"알지"
"코난 도일은?"
"당연히 알지"

그런데 책은 안 봤단다. 왓슨의 존재를 몰랐고, 모리어티 교수도 모른다. 여동생을 돌아보니 그쪽도 사정은 마찬가지.
그런데 중요한건 동생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알고 있지만 읽지 않은 책이 셜록홈즈 만이 아니라는 것.
<작은아씨들><빨강머리앤><소공자> <소공녀> <셜록홈즈시리즈> 심지어 <들장미 소녀 캔디> 도 안 봤다.
특히 여동생이! (나와 2살 터울이다)
너무 좋아해서 과장 안 보태고 열번도 넘게 읽었던 그 책들. 소장한 게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쪽 머리에선 학급 문고가 없었나? 도서관에 없었나? 친구들이 안 읽었나? 어떻게든 읽게 되던데.
50권짜리 문고판 홈즈시리즈는 모른다 치더라도 <작은아씨들>도 안 본것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위에 말한 책들 중 유일하게 소장중인 빨강머리 앤을 꺼냈다. 읽어. 일단 읽어라. 합이 열권이다. 끝나고 나면 저기 오즈의 마법사도 읽어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읽었어? 아니야? 그럼 그것도 읽어. 거울나라까지 다 읽어. 거울나라는 뭐냐고? 거울나라의 앨리스. 이상한나라 다음편이라 생각해. 그리고 모모 읽어. 그건 읽었어? 어떻게 그건 읽었데. 맞다 삼순이. 그럼 모모말고 끝없는 이야기. 같은 작가꺼야. 꼭 읽어봐라. 재미있으니까. 동물농장은? 물어본 내가 바보지. 그것도 읽어. 그게 끝나면 나랑 같이 쥘 베른이랑 제인 오스틴 시작하자. 다시 읽어보고 싶어.

그러다 찾았다.
구석에 박혀 주인에게 존재를 잊혀가다가 이렇게 책을 들어내다 보면 우연을 가장하여 보물처럼 튀어나오는 책을.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 베티 스미스 

어릴 땐 난 늘 조우가 되고싶었다. 그리고 앤이 되고 싶었다. 도로시와 캔디도 좋아했지만 그녀들은 단지 좋아할 뿐이었다.
상상력이 풍부한 글쟁이 거기에 로오리와 길버트라는 멋진 남자친구도 있었던
(비록 한쪽은 제부, 한쪽은 남편으로 각각 결과가 달랐지만)
활달하고 거침 없으며 자신만만한, 무엇보다 자신의 꿈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그녀들처럼 되고 싶었다.
식구들과 친구들이 나를 코딜리어라고 불러줬으면 했고, 에이미가 불태운 원고가 내 것인양 안타까웠다.
만년필 촉에 잉크를 뭍혀 촛불에 의지해 글을 쓰던 조우처럼,
널따란 창문턱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앤처럼 되고싶었다. 정말 그렇게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초를 켜면 불장난 한다고 야단을 맞았고, 오래된 한옥집엔 창문이 없었다.(게다가 1층집이다)
글쓰기에도 재주가 없었는데 끈기도 없어서 해마다 챙기는 일기장은 안네처럼 이름만 지어주기를 반복했다. 
키티옆엔 새로운 키티, 다음해엔 새로운 키티가 생겼다. (몇명의 키티는 살아남아 책장에 숨어 나와 술래잡기중이다)

몇년 전 구입한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첫번째로 나오는 작가 재클린 미처드는 지인에게 선물받은 책을 보고 눈물이 샘솟았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바로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의 초판본. 자신도 조우처럼 되고 싶었다던 재클린은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의 프랜시가 자신과 더 닮았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작가도 제목도 처음 듣는다. 내 인생을 바꾼 한권의 책인데 거기야 이유야 어찌됐든 제일 처음에 등장하는 책이다. 바로 구입을 결정했고,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이 도착하고 이틀이 지나 도착했다. 그리고 <내 인생을 바꾼 한권의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순식간에, 아주 쉽게 두 번을 읽어 버렸다. 킬킬거리다가, 울다가, 벤의 고백에 가슴이 두근거리다가...맙소사. 난 재클린에게 감사했다. 아니 그 전에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에 감사했다. 득템의 탄성을 질렀고,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을 있게한 모든 것들에 감사했다. 프랜시 놀란. 바로 그 프랜시 놀란이었던 작가 베티 스미스에게도....

읽는 내내 이제라도 발견하여 읽은게 다행이라는 생각과 좀 더 어릴때 읽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랬다면 난 조우나 앤보다 프랜시 놀란처럼 되길 바랬을 것이다. 틀림 없다. 프랜시 놀란처럼 얼음조각을 담아 사탕 접시를 가지고 창문을 기어 나가 비상구에 앉아 하늘나무를 가림막 삼아 그늘에서 책을 읽기를 바랬을 것이다.
나는 프랜시 놀란이었고, 프랜시 놀란은 나였다. 그리고 그건 프랜시의 일기장에 이르러서 더 확실해 졌다. 
웃음이 나왔다. 뭐야 프랜시는 재클린보다 나를 더 닮은거 아냐? 

프랜시는 열세번 째로 맞는 생일날에 일기 첫머리를 다음같이 장식했다. 

"12월 15일. 오늘 나는 열세 살이 되었다. 열세 살이 되면 어떤 일이 생길지 궁금하다."
....... 중략. (해가 넘어 다음 10월)
"10월 25일. 일기를 쓰는 게 점차 지겹게 느껴진다. 그래서 일기장을 거의 다 썼다는 게 굉장히 기쁘다. 중요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딱 한 페이지가  남았다. 프랜시는 마지막 장을 펼쳤다. 그래. 이제 이 장만 채우면 더이상 일기를 쓰는 일로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겠지. 프랜시는 연필 끝에 침을 적셨다.
 p. 190

다행이다. 우리의 프랜시는 성장 소설의 주인공이 갖춰야 할 똑똑한 재능많은 아이지만 꾸준한 일기쓰기는 하지 않는다. 귀찮아 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나와는 다르게 한 권을 다 써내는 끈기는 보여준다. 그럴수 밖에 없다. 프랜시는 주인공이니까. 

 
프랜시는 출퇴근하는 뉴옥 사람들의 초를 다투는 리듬에 적응하게 되었다. 출근하는 일이 신경을 혹사하는 전쟁처럼 되었다. 9시 1분전에 도착하면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고, 1분 후에 도착하면 사장이 혹시 그날 심기가 불편할 경우 속죄양이 되어야 했다. .......(중략)

한번은 집에서 10분 일찍 나와보았다. 서두를 필요가 없는데도 기차 문 앞에 미리 가서서 있었고, 계단을 뛰어 내려 갔고, 거리를 가로질러 갔고, 가득 찬 엘리베이터에 쑤시고 탔다. 그래서 15분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커다란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고, 프랜시는 외롭고 쓸쓸했다. 다른 사람들이 9시 몇 초 전에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자기 혼자만 배신자처럼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프랜시는 10분을 더 자고 원래 시간으로 돌아갔다.  
 p. 261

 난 아침 잠이 너무 많다. 일한지는 오래지만 후배가 많지 않아 아직도 막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데, 위 아래 구분이 확실한 곳이어서 후배는 좀 더 일찍오고, 늦게 가는 것이 암암리에 지켜지는 규칙. 아침 잠을 버리고 새벽에 남들 보다 먼저 도착하지만 느끼는 자유로움은 별 다른 것도 없었고, 좀 더 빨리와서 일이 더 쉬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근무 시작 전 커피 마시는 시간이 좀 더 늘었을 뿐이었다. 눈에 띄지 않게 출근 시간을 늦췄고, 지금은 다른 선배님들과 같은 시간에 출근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뭐라 하지 않는다. 진작 그럴것을 이렇게 되기까지 근무지가 바뀌고 딱 일년이 걸렸다. 난 지금 일년 전 보다 30분을 더 잔다.  

재클린 미처드는 조우 마치가 되고 싶었는데 결국 프랜스 놀란이 자기와 더 어울리다는 사실을 알았다. 난 조우 마치와 앤 셜리가 되고 싶었는데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은 없다. 프랜시 놀란이 좀 더 매력적이지만 10대에 읽었던 조우와 앤은 30대에 읽는 프랜시와 비교가 될 수 없다. 재클린 미처드는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을 열한번 읽었다고 한다. 난 이제 2번을 읽었고, 곧 있으면 3번째가 될 것이다. 성장소설이며 가족소설이다. 딱딱하지 않고, 주저리 주저리 설교를 늘어놓지도 않는데 가슴은 온갖 감정으로 풍부하다.

내 어릴 적 나와 함께 했던 책 <작은아씨들> <빨강머리 앤> 그리고 현재의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

나도 누군가의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안녕. 프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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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3-25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검색 들어갑니다. 내 인생을 바꾼 한권의 책. 그리고 나를 있게한 모든것들은 장바구니에 넣고요. 슝~

버벌 2011-03-26 00:47   좋아요 0 | URL
ㅎㅎㅎ 나늘 있게 한 모든 것들은 꼭 보시라고 하고 싶어요. <작은아씨들>과 <빨강머리앤>을 좋아하신다면 더더욱. <내 인생을 바군 한권의 책>은 재미로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행히 재클린의 글은 제일 첫장에 나와있어서 쉽게 권유 받은 책을 구입했지만 그 뒤로는.... ㅡㅡ;;; 좋은 정보가 담긴 책이라 생각하세요. ㅎㅎㅎ

도서출판 더숲 2011-11-03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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