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서랍 - 이정록 산문집
이정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 의자 >

                   이정록 (1964~ )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 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 놓는 거요.

 

<<의자>>, (문학과 지성자 ) 2006

 

시인의 어머니는 허리가 아프다. 허리가 아프니 세상의 모든 것이 의자로 보인다. 허리가 아픈 이는 의자에 앉아서 휴식을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꽃과 열매도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 꽃은 꽃받침에 앉아 있는 것이다. 참외와 호박 밑에 지푸라기 깔개를 깔아주는 것도 의자를 받쳐주는 것과 같다고 한다. 참외와 호박 마저도 식구로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은 분명 농사 천재다운 발상이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게는 장남이 시인이 의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이 참 마음에 든다. 인생 뭐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데다가 의자 몇 개 내 놓는 거라는 시인 모친의 말씀이 참 세상이치를 다 관통한 듯 하다. 구수한 입말체가 살아있는 이 시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사실 우리가 캠핑을 갔을 때, 마음이 푸근해지는 순간은 바로 텐트를 다 친 뒤 준비해 간 의자에 앉아서 풍경을 바라볼 때이다. 바닷가에 해수욕을 할 때도 신이 나지만, 물놀이를 마친 뒤 파라솔 그늘에 의자에 앉아 푸른 바다를 바라볼 때 그 아늑함이야말로 여름휴가의 진수다. 굳이 자연 속으로 떠나는 여행이 아니어도 커피향이 나는 카페에 앉아 있을 때의 편안함도 있다. 집을 살 때도 전망이 중시된다. 여행을 할 때도 뷰가 중시된다.

 

시인의 어머니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모두 시가 된다. 시인 이정록은 1889<농부일기>로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공주사범 한문교육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천안의 한 고등학교의 교사이기도 하다. 시인은 모든 말의 뿌리는 母語임을 강조한다. 그의 산문집인 <시인의 서랍>(한겨레 출판, 2012)에는 어머니와 주고 받는 대화가 <의자> 시 만큼이나 와 닿는 글이 바로 그늘 농사에 관한 거다. 시인의 어머니는 동네 청년들로부터 농사 천재라고 칭송받는다. 그 비법을 여쭤보니,

 

그늘을 잘 다루는 거라고 한다. 젊어서는 햇살만 좇아 농사를 지었고, 그늘이 뭔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동네 가로등이 생긴 후에 동네 주차장으로 땅을 내준 후 ,조금 남은 땅에 비닐하우스를 씌워 방울 토마토를 심어 놓으니, 낮에는 햇빛을 받고 밤에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잘 자라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을 정도로 자랐다고 한다.

 

그 뿐인가? 텃밭 귀퉁이 호두나무 밑에다 심어놓은 취나물 20포기도 2년간은 꿈쩍 않더니, 몇 년 전 부터는 낫으로 베서 온 동네 사람들과 나눠먹게 되었단다. , 담벼락 후미진 곳에 심어둔 아삭 고추 네 그루는 그늘이라 맵게 여물지 못하고 맨날 연한 풋고추만 자라니, 동네사람들한테 한 바가지씩 나눠준다 한다.

시인의 어머니는 농사비법을 알려준 뒤 덧붙여 말한다.

 

인생농사도 그늘 농사라고 혔지. 아내 그늘, 자식 그늘, 지 가슴속 그늘! 그 그늘을 잘 경작혀야 풍성한 가을이 온다고 말이여.”

 

돈이니 여자니 술이니 화투니, 재밌고 따순 햇살만 좇아다니먼 패가망신 쭉정이만 수확허니께, 그늘 농사가 중허다고 말이여. 걱정거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겄냐? 그 그늘진 담벼락에서 고추도 나오고 취나물도 나오는 거니께 말이여. 어미 말이 어떠냐? 그늘 농사 잘 지어야 늘그막이 방울토마토처럼 주렁주렁 풍년이 되는 거여.”

여기서 그늘은 그 사람의 상처나 아픔이라고 해도 되겠다. 아내와 자식이 어떤 걱정이 있는지 돌아봐주고, 또 자기 가슴 속 그늘을 잘 다스려야만 늘그막에 고생을 안 한다. 시인의 어머니가 들려주는 인생을 살아가는 비법은 자기 가슴속 그늘을 잘 경작하고, 풍경 좋은데 의자 몇 개 놓는 거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나도 큰 욕심 부리지 말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의자가 되어주고,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의자가 될 수 있도록 마음을 비우고 첫째와 둘째의 그늘을 잘 살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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