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브
알렉스 모렐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서바이브

survive; 살아남다, 생존[존속]하다; (위기 등을) 견뎌 내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마당에 나가 새벽 하늘을 올려다 보는 것이었다. 어떤 이끌림에서 그런 것인지, 그저 충동적인 행동일 뿐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새벽 5시를 절반쯤 넘긴 시간에 책을 덮고나서 곧장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청에서 설치해준 가로등의 수명이 다해 6초 반마다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통에 내가 마당에 발을 내딛었을 때는 완전한 암흑 뿐이었지만 오히려 그 암흑 덕분에 보름달과 휘영청 떠오른 별들을 잘 볼 수 있었다. 가로등이 없이도 눈 앞 사물이 잘 보이도록 비춰주고 있는 보름달의 주위로 촘촘히 박힌 별들을 바라보며 나는 잠시, 먼저 떠나갔을 폴 하트를 그려본다. 한 편의 아름답고도 비극적인 로맨스를 감상한 것 같지만, 실은 그보다 더한 생존의 대서사를 목격한 샘이라 어안이 벙벙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별을 바라보다가 허파 속에 들어 있는 산소가 미약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 막 잠에서 깨기 시작한 가을 새벽의 공기를 허파 깊이 밀어 넣었다. 그것도 가득. 심호흡을 몇차례 하고는 새삼 제목에 집중해본다. 그저 영어 발음을 한글로 써놓았을 뿐인데 그걸 제목으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 놓고는 그대로 잊어버렸었다. 언제부터,라고 떠올릴 필요도 없이 영미소설을 읽을 때면 항상 영어 단어가 가지는 뜻을 생각하지 않고 그 발음을 한글로 받아 적어 놓기만 한 제목을 그저 '제목'으로만 받아들이고 말았다. 황순원의 『소나기』가 '소나기'듯이 알렉스 모렐의 『서바이브』가 '서바이브'로. 그 뜻을 생각하지 않고 넘어가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한줌도 채 되지 않는 숨만 남은 몸 속에 깨끗하고 차가운 공기를 밀어 넣은 순간, '서바이브'가 'survive'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그런 의미에서 나는 참 멍청했던 걸지도.) 이 책의 줄거리만 떠올려 보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제목이고, 제목만 보아도 이 책의 내용이 어떤지 금방 파악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잘 읽히는 듯하면서도 다시 되돌아가게 만들고, 되돌아가다가도 빠른 속도로 읽게 만드는 것'은 아마 생존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소설이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책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제인과 폴의 사랑과 살아남으려는 굳은 의지, 고군분투이지만 감동적이면서도 비극적인 로맨스 소설이라는 타이틀은 달지 말았으면, 하는게 나의 마음이다. 확실이 그 두 사람의 사랑이 이 소설 속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지만 나는 그것을 조미료 정도로만 생각해왔다. 글을 읽는 내내 나는 제인에 집중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려버린 '제인'을. 몇 차례의 '사건'을 겪은 후 라이프 하우스에 수감된 제인은 그곳에서 그룹상담과 개인상담 등의 활동을 통해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를 일깨워주고자 하지만 제인은 완강히 그것을 거부한다. 제인은 몇 차례고 자신이 지금껏 그러한 '사건'들을 저질렀으며, 계획하고 있는가에 대해 설명해 주었지만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 자신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한 무엇이 손 끝을 스치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그리고 폴이 그녀를 '희생자'라 칭했을 때 그 위화감은 훨씬 더 진해졌다. 그 위화감은 결국 그녀의 죽음에 대한 갈망이 진심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자살미수. 그녀의 병명을 '사고'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고 아빠가 자살했다고 말하기보다 '죽었다'고 말하며 다른 사람들이 병이나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것처럼 자신의 아버지도 죽음을 맞이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그녀에게 있어서 자살이란 남에게 날것 그대로 꺼내어 내보이기에 수치스러운 부분일지도 모른다. 자살을 갈망하고 그것을 좇는 것이 가족 내력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녀는 그렇기에 제 자신에게 해를 가하면서도 상담시간에 자살이라는 단어 대신 '사고'라는 단어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본인은 죽음을 좇고 있는데 그녀의 언행은 삶을 외치고 있다. 사고라는 것은 예기치 못한 일을 당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고 운 좋게 목숨을 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그녀와 폴이 탄 비행기가 태풍으로 인해 로키 산맥에 추락했음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처럼.

 

그녀가 처음부터 확실히 죽을 생각이었다면 비행기가 큰 궤적을 그리며 떨어질 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내 평생 가장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를 일도 없었을테니까. 비행기가 흔들리던 순간에도 자신의 계획을 위해 '삼키려던 목에 걸린 알략들을 콜록거리며 뱉어 버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처음부터 '살아야만 하는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 이유를 만들고 의미를 따진다. 잘 살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 수도 있지만 제인이 그런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은 삶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는 뜻과도 같다. 그리고 단 둘만이 생존해있는 그곳에서 고군분투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그녀가 보여준 언행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참으로 야무지다. 하지 못한다 말하면서도 해냈고, 자신이 죽어야만 했다 말하면서도 살아 남기를 그 누구보다 간절히 갈망하고 있었으니까. 제인과 폴이 보여준 삶에 대한 의지는 그 누구보다도 강하며 끈끈하다. 서로가 서로를 도와가며 격려하고, 서로의 아픈 상처를 다독여가며 "그렇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다. 그 메세지는 그 두사람 사이에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에게도 확실히 전달되고 있다. 사소한 이유로 자신의 목숨을 거둬드리는 이가 많은 요즘 사회에 이 소설은 위로와 유대의 메세지가 되어 우리의 가슴을 세게 두드린다.

 

'왜 살아야 하는거야?'라고 묻지 말라. 살아있기에 다 괜찮은 것이다. 살아있기에 좋은 것이며, 즐거운 것이다. 살아있기에 외로울 수 있는 것이고, 외로움을 좇는 것이며, 죽음을 좇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 사람이라면 결국 죽을 것이나 그 죽음을 미리 앞당겨서 좋을 것은 없다. 지금 당장 밑바닥에서 땅을 치며 희망이 없다 부르짖으며 아무리 힘든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쥐구멍에 볕뜰날 있듯 그대들의 삶에도 의지와 행운이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단지 그대들이 있는 곳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은 맞지만 자신들을 발견하기까지 하루가 걸릴지, 일주일이 걸릴지, 한 달이 걸릴지, 일 년이 걸릴지 모른다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폴과 제인처럼 우리의 인생을 화려하게 장식해줄 하이라이트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삶의 의미를 갈구하듯 그 행운들을 갈구해야 한다. 그러니 반드시 살아 남아라. 살아있어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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