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를 으깨며 노리코 3부작
다나베 세이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인간의 성장과 변화

노리코의 성장 단계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결혼 전, 결혼 후, 이혼 후. 결혼 전의 노리코에 대한 이야기는 상세하진 않지만 아마 결혼 전의 노리코는 불행했던 것 같다. 그녀는 그 시절의 자신을 '기아상태'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외모에만 치중하고 안달복달했던 부질 없는 시간들을 일컫는지도 모른다. 잘 보이고 싶고, 사랑 받고 싶고, 더 예뻐 보이고 싶은 나이. 그 시절 그녀가 만들던 인형은 모두 불만에 가득 차있고, 무언가에 잔뜩 토라져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고. 오사카 사투리가 매력적인 고를 만나 노리코는 수용생활을 시작한다. 결혼생활 당시 노리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재벌가의 아들인 고와의 결혼생활은 '내가 아닌 나를 만들어가는 시간'이었을 것이고, '고가 원하는 여자로 보이도록 노력하는 시간'이며,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나날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런 시간들에 조금씩 지루해지고 실증을 느낄 즈음 변덕이 유독 심한 그녀는 고와 이혼한다.

 

사람들은 결혼을 인생의 전환점이라고들 말한다. 남자가 군대에 다녀오면 사람이 되서 나오듯이, 사람이 결혼을 하면 조금 더 철이 들고 책임감을 가지고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이혼이 잦고 결혼을 엔조이로 밖에 여기지 않는 세상에서는 안 어울리는 표현이긴 하지만 어찌됐든 결혼은 인생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리코에게 있어 진정한 전환점은 이혼의 순간이지 않았나 싶다. 그녀는 '고=형무소'라는 등식을 세워 놓은지 오래다. 자신과 맞지 않은 결혼생활. 서민이었던 그녀에게 재벌인 고의 존재는 맞지 않는 옷과 같았다. 고는 그녀에게 "나를 위해 노력하라."고 자주 말한다. 비싼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고분고분 말을 듣는 것 말이다. 흔한 '아가씨 드라마'에 나오는 사모님의 모습이랄까? 그녀에게 있어 끔찍한 결혼생활을 버티게 해주었던 존재는 시어머니였다. 자신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면 경멸하고 험담하는 고의 말을 빌리자면 '누더기 같은 천들을 모아 놓은 것'을 가장 좋아하셨던 분이다. 노리코가 직접 만든 인형 말이다. 하지만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서 노리코는 더 이상 결혼생활을 버티지 못하게 되었다. 어쩌면 시어머니라는 존재의 상실로 인해 노리코가 남아 있을 이유가 사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혼을 한 노리코는 사람들이 말했던 것처럼 한 몫 단단히 챙기진 않았다. 보석도 뭣도 다 두고 나와서 고가 특별히 챙겨준 위자료와 자신의 일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저세상에 간데도 이보다 좋을 수는 없을 것 같은' 나날의 연속. 그녀는 반짝반짝한 서른 다섯을 보내게 되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일을 하며 지냈다. 결혼 전과 결혼 후의 생활과 비교해보면 그녀는 훨씬 여유로워졌고, 활기차졌다. 무르익었다는 표현이 그녀에겐 더 알맞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프로가 된 것일지도. 그녀는 호기심 많고 감정 표현을 잘 하는 여자로 서른 다섯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재기발랄함과 생기발랄함을 가지고 있다. 작고 사소한 일에도 "어머어머!" 하는 식의 감탄사를 연발하는가 하면 보는 사람마저 흥분할 정도로 격한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한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정말 사랑스럽다. 지금껏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그간 억눌려 있던 모든 감정을 한 번에 터트리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사람을 보는 눈도 바뀌었다. 고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는 약간의 우월감 따위가 그녀를 조금 거만하게 만들었다. 자기보다 못한 여자들─골드미스로 혼자만의 생활을 즐기는─을 무시했었다. 혼자 사는 여자들의 생활력과 강함에 반하거나 매료되는 일은 없었고, 남자와 친구로 지낼 수 있다는 생각도 갖지 못했었다. 이혼 후에 그녀의 인간관계는 더욱 풍요로워졌다. 연애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세상에 가더라도 이보다 좋을 수는 없을 것 같아!"라고 끊임 없이 외쳐도 좋을 정도의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오사카 사투리를 쓰는 남자들

그녀의 곁엔 언제나 남자들이 있다. 물론 여자들도 있다. 그녀의 곁에 머무는 남자들 중엔 오사카 사투리를 쓰는 남자들이 많다. 징 같은 얼굴을 가진 남자도 짙은 오사카 사투리를 사용했고, 비록 유부남이긴 하지만 자유분방하며 위압적이지 않은 분위기에 끌렸던 토무씨도 짙은 오사카 사투리를 구사한다. 그리고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 찍어 남이 된 고와도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이 모든 것은 고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고는 그녀에게 있어 가장 영향력이 컸던 사람이니까. 이혼 후에도 그녀가 '오사카 사투리를 쓰는 남자'에게 이끌린 것도 고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모든게 그녀와 고가 다시 재회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고.

 

자유분방한 삶을 살고 있던 그녀는 호우가 쏟아지던 날 레인코트 안에 비키니를 입고 회사로 가고 있었다. 정확히는 거래처 정도랄까? 지하도로 들어가기 전에 검은차 한 대가 인도 가까이에 정차했는데 고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구수한 오사카 사투리로! 사실 전반에서 노리코가 하도 고를 욕하길래 나는 고가 엄청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표현은 사람을 오해하기 만들었다. 고는 최악의 질투남에 말보다 손이 먼저 올라가는 남자인데다가 재벌이라는 우월감에 남을 경멸하고 깎아내리는 언행을 구사하지만 상당히 매력 있는 남자였다. 어엿한 남자 하나 골라 잡지 못하고 혼자만의 생활을 만끽하느라 몸을 굳히고 있는 노리코의 생활을 엿보는 중에 등장한 고는 쾌거에 가까웠다. 노리코와의 고의 재회가 이토록 반가울 줄이야! 사실 그녀 역시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일본 곳곳에 별장을 가지고 있는 고라면 언젠가 우연히라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무튼 노리코의 주위엔 오사카 사투리를 쓰는 남자들이 있다. 그녀 스스로는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들과 친구로 지내면서 그녀는 그렇게 사투리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었다.

 

 

딸기의 상징성

소설의 처음과 끝. 그녀는 딸기를 으깨며 아침을 맞이한다. 딸기의 상징성이 뭘까? 궁금했다.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노리코는 매일 아침 딸기를 으깬다. 우유와 함께 말아 먹는데, 그 맛보다는 그 행위가 지니고 있는 의미 자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어쩌면 작가는 이 행동에 의미를 두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을 제목으로 내 놓기도 하고, 강조를 해서 독자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작가들도 종종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왠지 딸기를 으깨는 것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본다. 사전에 의하면 딸기는 정의를 뜻한다고 하던데, 남에게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오히려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이 딸기는 노리코와 닮아 있는 것 같다. 노리코는 고의 영향을 받았고, 고는 노리코의 영향으로 그녀를 그리워하게 됐지만 노리코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그것은 딸기가 가지는 의미 자체와 닮아 있다.

 

 

 

 "글자는 모양이 정해져 있어서 자유롭질 않아 몬 써요."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점을 찍고 싶어지거나 받침을 넣고 싶어지거나 옆에 한 획을 더 긋고 싶어져서 손가락이 '근질근질'해진다고 한다. 지인인 한 서화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되지!"라고 했단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쪼매 편해지더라고요. 그래서 마음 가는 대로 쓰고 있습니다, 핫 핫 핫." 워낙 큰 남자라서 우러러보며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지만, 왠지 존재감이 희박하고 다가가기 쉬운, 그래서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 체구였다. 꾸밈이 없는 오사카 사투리와 요란스러운 말투, 그다지 남자답지 못한 목소리 때문인지 모른다. 그는 '핫 핫 핫'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 pp.57~57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그것은 인생이다. 정말 인생이다. 그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인생은 여러 가지 일에 도움이 된다. 특히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다시 태어나 있다.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살아 있지 않을 것이고, 기계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나의 하루하루는 나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 같은 것이다." 그런 걸 보면 브리지트 바르도도 '지금이 가장 중요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전무 BB'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BB도 어쩌면 지금 생트로페의 해변을 맨발로 걸어 다니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p.120

 

남자가 굵은 손가락으로 잘하지도 못하는 뭔가를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여자의 연민을 자극한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의 서투름을 동정하여 결혼하고 자잘하고 섬세한 부분은 모두 대신해서 해주고, 마지막에 '內'라고 써놓고, 의식하고 말고를 떠나서 그런 자신에게 도취하여 '크흐흐흐……'하고 웃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아내놀이'가 놀이로 끝나지 않고 진짜라고 생각하고 평생을 계속하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나처럼 '놀이'였다는 것을 깨닫고 놀이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여자도 있다. 나는 요즘 어느 쪽이 진짜인지 분간할 수 없다. 물론 어느 쪽이 진짜고 어느 쪽이 가짜라고 할 수 없다. 어느 쪽이 됐든 그 여자의 성격에 맞고, 그리고 그 상대 남자의 컬러에 잘 어울리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보다 진짜니 가짜니 하는 평가 자체를 할 마음이 없어졌다고나 할까. 가짜라도 그 한길만 고집스럽게 가다 보면 언젠가는 눈에 익숙해지고 거슬리지 않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 p.175

 

내가 운 것은 하라 코즈에가 죽었다는 사실보다도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도 생각해야 할 것들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안녕 노래>에서 저세상을 노래하기도 하고, '저 세상에 가더라도 이보다 좋은 세상은 없을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신이 나서 '저세상'을 연발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죽음을 매개로 한 생각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대기실쯤 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다. 누구도 실제로 죽는다는 것은 눈곱만큼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곁에 아무도 없이 혼자서 죽어가는 죽음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이 혼자 살고 있는 나의─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올─죽음인 것이다. - p.317

 

"관 짊어줄게, 잘래?" 이게 요즘 고의 입버릇이다. 고에 따르면, 여자의 행복은 잔 남자가 관을 짊어져 주는 것이란다. 무슨 소린지! "그랬다간 몇십 명의 남자가 달려든 통에 차전놀이하자고 하겠네!" 내가 농담이라도 할라치면, 바로 받아친다. "빌어먹을. 내가 공포의 질투맨이란 거 잊었나?" 고와의 전화통화는 기분전환에 최고다. 나는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묻는다. "지금 어디야? 저녁에 스파게티라도 먹을까?" "바보, 나 지금 도쿄에 있다!" "내가 쏠게, 얼른 와." 뭐니 뭐니 해도 친구가 최고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 p.328

 

 

 +  이 책은 '포플sns 서평단 1기' 활동을 하면서 포플sns를 통해 해당 출판사로부터 무상으로 제공 받았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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