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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주의 결혼식 ㅣ 푸른숲 역사 동화 2
최나미 지음, 홍선주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1년 12월
평점 :
결혼한 여자가 남편의 집에 들어가 살림살이를 하는 것을 보고 시집살이라고 한다.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말이다. 어느덧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자연스럽게 여자가 남자의 집에 들어가 시부모 밑에서 살림을 하며 지내기 시작했다. 모두들 그걸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간혹 가다 남편이 부인의 집에 들어와 처가살이를 하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시부모는 노발대발하며 며느리의 머리채를 휘어잡을 심산으로 덤벼든다. 그것이 인륜에 벗어나는 일이라도 되는 것마냥 말이다. 막장드라마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의 드라마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집살이가 과연 얼마나 오래 된 것이기에, 언제부터 시작된 것이기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정착되었는지 말이다.
조선중기부터 시작된 시집살이
시집살이가 처가살이보다 오래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테지만 사실 시집살이는 조선중기에 시작되었다. 백성들이 태평성대라고 불렀던 세종 집권 시기였다. 선왕 때부터 정착시키려고 했던 명나라의 유교적 풍속인 '친영례'. 즉, 시집살이를 세종 때 시작한 것이다. 가장 먼저 시집살이를 하게 된 인물은 '숙신옹주'인 운휘이다. 태종의 막내 딸이자 세종의 이복 동생이지만 태종이 둔 여러 후궁 중 한 명이었던 운휘의 어미는 궐 밖으로 쫓겨난 궁녀였고, 운휘가 태어나던 해 태종이 죽어 그녀는 아버지의 얼굴도, 어머니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궐에서 쓸쓸히 자라왔다. 부모의 정을 느낄 새도 없이 남의 손에 길러진 그녀였지만 옹주로써 갖추어야 할 예와 덕 대신 사내아이들처럼 호기심 많고 활동적인 아이로 자랐다. 그런 그녀가, 혼례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감도 잡지 못한 그녀가 어지러운 궐 사정을 자신 때문에 더 어지럽게 만들 수 없다며 직접 "친영례를 치루겠다."고 선언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시집살이를 한 여인인 것이다.
여자는 시집가고 남자는 장가간다고 말하는 '혼례'. 장가를 가던 풍속이 남자 중심 체제가 굳어지며 자연스럽게 시집을 가는 풍속으로 바뀌어 갔다. 조선에서는 혼례를 치루면 처가살이를 하는 것이 기본이었으나 서서히 시가살이로 바뀌어 간 것이다. 남편이 아내의 집안(처가)으로 들어가 바깥일을 하며 아내와 동거동락 하는 것이 오랜 풍속이었으나 '여자가 처가 사람들을 믿고 목소리를 높이거나, 남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행동을 한다.'는 이유로 문제가 많았던 처가살이 대신 명나라의 유교 풍속인 친영례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선왕 때부터 친영례를 받아들여 풍속을 바꾸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그 일은 세종에게로 넘어오게 되었는데 백성들에게 먼저 친영례를 받아들이라는 강요보다는 궁에서 솔선하여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세종의 주장으로 인해 태종의 자녀들 중 혼례를 치루지 않은 운휘가 친영례를 치루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자유분방하고 혼례의 '혼'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운휘를 위해 친영례를 반대하였으나 스스로 선택해 치루게 된 친영례. 아무리 서녀라도 왕가의 자식이것만 여러 사정 때문에 혼례마저도 간소하게 치루고 남편의 집안으로 들어가게 된 운휘는 마마보이 남편과 까탈스러운 시어머니와 함께 지내며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허나 숙신옹주가 친영례를 치루고도 일반 백성에게까지 완전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라고 한다. 태종과 마찬가지로 친영례를 정착시키려던 세종의 노력 역시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독립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어미 치마 폭에만 파고드는 마마보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꾸어 놓을 준비를 모두 마쳤다는 듯이 덤벼드는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못해 토나올 지경이다. 기원이야 어찌되었든 숙신옹주를 시작으로 조금씩 정착하게 된 친영례는 어느덧 '시집살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생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요즘에는 분가하여 시가의 감시에서 벗어나 따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부부가 많아졌지만, 이 분가라는 것도 어차피 시집살이가 정착되었기 때문에 시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겨난 것에 불과하다. 고된 시집살이에 대한 恨이 담긴 민요에서 오죽하면 '숫캐 같은 시아버지 / 암캐 같은 시어머니 / 여우 같은 시누이년'이라는 구절이 나오겠는가?

싱싱하고 푸른 여인으로 남아주길
운휘는 말괄량이 옹주였다. 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고 두 손, 두 발 다 들 정도로 답이 없는 옹주였다. 궁의 법도들을 지키고, 따라야 했으며 반가의 여식들처럼 수를 놓거나, 바느질을 하는 등 여인이라면 배워야 할 것들을 익혀야 했지만 옹주는 과감하게 그런 것들을 물리치고 나무를 올라타는가 하면, 말을 타기도 하고, 여러가지 말썽을 부리며 사내아이처럼 자라왔다. 이 자유분방하다 못해 가는 곳곳마다 사고를 치며 보는 사람이 다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생활을 하는 이 옹주는 팍팍하고 기계 같은 궁궐 사람들 속에서 그나마 '사람 다운 사람'이었다. 중전이 그랬듯이 옹주의 그 활기참과 대범함, 아찔한 사고들은 재미 있을 일도 재미 없어지는 궁에서 그나마 숨통 트이게 해주는 요소다.
물가에 내놓아도 걱정 없이 혼자서 잘 헤쳐나갈 것 같은 인물이 바로 운휘다. 옹주마마들의 교육을 담당했던 무시무시한 염상궁이 운휘를 떠나보내며 한 말이니 오죽 하겠는가? 공부 안 하고 도망다니는 운휘를 쫓아 다니며 닥달하고, 엄하게 가르치던 시간 동안 염상궁은 운휘의 활달한 모습을 보며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갑갑한 궁 안에서 제 모습을 잃지 않고 끝까지 지켜나가는 운휘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다행스럽게 여겨졌는지 모른다. 온통 말썽만 부리고 다소곳하게 앉아 반가의 여식들처럼 수 놓을 줄 모르는 운휘의 모습이 때론 안쓰럽고, 때론 답답할지경이었지만 시집살이를 하며 '남편이 내 편'이라는 생각만으로 자신을 굽히고 다른 여인네들처럼 살려 노력했던 운휘가 결국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며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는 장면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 했다.
내 앞에 꿇어 앉혀다가 혼을 내주고 싶을 정도로 말썽꾸러기였던 옹주마마가 친영례라는 낯간지럽고 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마냥 어색하고 껄끄러운 풍속에 자신을 굽히지 않고 올곧게 지켜나가는 모습은 정말 감동스러울 정도였다. 세상의 잣대에 자신을 맞추려 들지 않고 진정한 자신을 유지시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숙신옹주는 이 책에서 잘 보여주었다. 그리고 제 자신을 지키는 것이 끝내 어떤 것이라는 것까지도. 나는 운휘가 중전이 자신에게 준 배넷저고리를 안고 시집을 뛰쳐나간 옹주가 그 당돌함과 용감함을 잃지 않고 끝까지 씩씩하고 사람답게 살아가길 바란다.

옹주의 숨은 멘토
숙신옹주에게는 멘토가 한 명 있다. 옹주의 교육을 담당했던 염상궁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테고, 옹주를 길러준 명선당 숙의 최씨라 생각하는 이도 있겠지만 나는 내사복시 마구간지기 할아범이 그녀의 숨은 멘토라고 생각한다. 그가 직접적을 그녀에게 준 가르침은 많지 않다.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놓고 그녀를 가르친 것도 아니니 마구간지기 할아범과 운휘 사이의 멘토링을 판단하기란 어렵다. 허나 옹주는 혼례를 앞두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 염상궁의 배려와 복섬이의 안내로 인해 몸을 추스리고 내사복시로 향했다. 그곳에서 할아범의 생일을 챙겨주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운휘는 화기애애함을 느낀다. 마구간으로 들어가는 할아범을 향해 결혼생활이 어떤 것인지, 혼례가 무엇인지 몰아서 묻던 운휘는 알듯 하면서도 가닥이 잘 잡히지 않는 할아범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
신분은 천할지 모르나 살아온 횟수로 보면 운휘보다 곱절은 더 많은 마구간지기 할아범이다. 그런 그의 인생사와 경험, 그간 쌓인 지혜로움은 이제 막 혼례를 앞두고 걱정스럽고 혼례가 뭔지 몰라 불안한 운휘에게는 든든한 지원이 되었음은 물론 미약하긴 하더라도 길을 밝혀줄 등불이 되었을게 틀림 없다. 워낙 활달한 성격에다 신분의 높낮이를 제지 않는 운휘이기에 마구간지기 할아범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며 질문을 주고 받고, 가르침을 얻는 것도 가능했으리라 본다. 살아온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는 내사복시 마구간지기 할아범의 결혼관은 운휘에게 한 말로 들리지만 실은 이 책을 읽는 어린이들에게 하고 있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마구간지기 영감이 숙신옹주의 숨은 멘토였듯이, 알게모르게 독자들의 멘토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 이 서평은 '푸른숲주니어 모니터원 4기'로 활동 중 출판사 푸른숲 주니어에서 제공 받은 책을 읽고 작성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