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 어느 젊은 시인의 야구 관람기
서효인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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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 왠지 가슴 따뜻해지는 제목을 가진 책 한 권을 받았다. 와이번스의 전 감독의 자서전 『김성근이다』 이후 두 번째로 읽은 야구 이야기다. 그런데 제목이 심상치 않다. 야구가 뭘 어쨌단 말일까? 책망하는 것 같지만 원망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감사하는 느낌이다. 탓하고 있지만 왠지 아빠와 캣치볼을 하다가 자신이 도저히 잡지 못하는 높이에 잔뜩 토라진 개구진 사내 아이 같다. "나 안해!"라고 말하며 글러브를 벗어 던지고 호기롭게 공원을 나가려다 어깨 너머로 흘끔거리며 자신이 던진 글러브를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 서효인과 야구는 '애증'의 관계인 것일까? 아무래도 야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야구는 애증의 대상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그리고 젊은 시인 서효인이 말하는 야구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신인 염종석의 활약과 팀의 근성으로 롯데 자이언츠가 한국 시리즈 두 번째 우승을 하고, 빙그레 이글스 내야수 장종훈의 시대─한국 프로 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40홈런을 돌파하여 홈런왕과 MVP를 차지했다.─라 불리던 해에 태어났다. 1992년이다. 하지만 내 인생은 프로야구와 전혀 연관이 없다. 전국고교야구대회도 마찬가지. 나는 야구에 매료되어 있지도 않고, 야구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내게 야구란 축구와 같고 남자들이 하는 군대 이야기와 갔다. 간단히 말해, "야구, 몰라요."다. 그런데 서효인의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는 야구를 모르는 내가 읽어도 전혀 어렵지 않다. 딱딱하지 않은 문체와 설명, 각주 덕분이었다. 솔직히 조금 지루하긴 했지만 나는 3/3이닝을 모두 관전했다. 정지하는 순간이 많아 기다림과 인내로 버텨야 하는 스포츠, 야구. 나는 그 긴 시간을 잘 버텨낸 것 같다. 조금 위태롭긴 했지만 이 정도면 합격점을 줘도 나쁘지 않겠지.

 

난 한 가지에 몰두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멀티플레이어다. 한 가지를 하며 또 다른 한 가지에 손을 내민다. 항상 스케줄이 꽉꽉 차있어야 나태해지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일이면 일, 공부면 공부, 대외활동이면 대외활동. 파고 들 장르 하나만 정해서 일정은 수도 없이 늘려간다. 꽉꽉 채워간다. 되도록이면 장기전으로. 그리고 결과는 빨리 볼 수 있는 것으로. 그래야 내가 움직일 수 있다. 탄력을 받아 움직일 수 있다. 힘들어서 도중에 포기한 프로그램도 많았고, 손을 대다가 길을 잃고 헤맨 적도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조율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은 서툴지만 한 가지에 집중하려 노력한다. 되도록이면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 힘쓴다. 그래도 어려운 것은 주위의 반응이다.

 

잘한다, 잘한다 하다가도 한 걸음만 삐끗하면 금새 욕이 날아온다. 이건 프로야구 못지 않다. 내 일에 왜 주위 사람들이 더 기대하고 목 매다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담된다. 힘들다. 어깨가 무겁다. 모든 상황이 내게 좋은 쪽으로 돌아가더라도 주위에서 쏟아지는 부담으로 어깨가 굳는다. 몸이 굳는다. 그래서 결국 놓치고 만다. 다된 밥에 코를 빠트리기도 하고, 잘 가다 돌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뒤로 넘어져 코가 깨진 적도 있다. 그럴 때면 억울하다.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그런 일들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트라우마로 남기도 하고, 아픔으로 남아 나를 서서히 잠식시키기도 한다. 그 무엇으로도 좀처럼 해소시킬 수 없는게 바로 이것이다.

 

신경쓰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자신이 휘둘려버리니까. 포기하는 법도 배웠다. 되는 길과 안 되는 길을 판단하는 법도 익혔다. 잘 가다가 안 되는 길로 빠지기 시작하면 실패를 직감한다. 그래도 그 길을 져버리지 않는다. 되돌아오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발을 삐끗해 옆으로 굴러 떨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옆은 천길 낭떨어지. 그곳으로 떨어지느니 차라리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게 훨씬 낫다.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끊어진 상태에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전진 뿐이므로. 그것도 인생이다. 쓰지만 달다. 고진감래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다. 확실히 힘든 다음에 좋은 일이 오고, 쓴 경험 뒤에 달달한 행복이 온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경험으로 얻은 해답보다 책 속에 적힌 문장이 더 큰 위안을 안겨준다.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준다. 살살. 덧나지 않게.

 

오로지 당신에게 집중해야 할 시간이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전부가 그러할지도 모른다. 주위의 기대는 잊어라. 안타는 맞겠지만, 그것이 '나'를 위한 게임. 나 자신만 바라보자. 결국 실패하겠지만, 다음 등판이 남아 있다. 실패의 예정, 그리고 도전, 사는 것 자체가 '퍼펙트게임'이니까.

 

이 책을 읽으면 영화 <퍼펙트게임>이 떠오른다. 80년대 롯데와 해태, 연대와 고대, 전라도와 경상도, 최동원과 선동렬의 대결을 그린 야구인들의 땀내 나는 이 야구 영화는 가장 치열하고 아름답고, 진지하며 포기할 수 없는 승부를 그렸다. 그들의 열정이 담긴 이야기가 떠오른다. 감동 신화를 담은 스포츠 영화가 줄줄이 떠오른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꽤 오래 된 미국 영화도 기억 난다. 유색인종 차별이 있던 시대, 인종 차별 없는 스포츠를 하자며 고군분투 하는 내용이었다. 고등학교 럭비부의 단합과 승부를 그린 영화였다. <우리 생에 최고의 순간>도 빠질 수 없다. 그건 정말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감동적인 이야기였으니까. 아무튼 이런 땀내나고 이유 없이 뜨거운 이야기들이 떠오르는 이유는 아무래도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자체에 그 열정이 묻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눈에 보기에도 야구 바보인 남자, 서효인의 야구 이야기는 지칠줄 모른다. 그런데 좀 길다. 9이닝을 완투하고 여신님과 자신의 '팀'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도 부족하다는 눈치다. 이 남자, 확실히 '야빠'다. "야구, 몰라요"였던 내가 혹 할 정도로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는 매력이 있다. 야구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하지만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다. 야구는 사람 사는 이야기다. 살 맞대고 부벼가며 서로가 의지하고, 다투고. 그런 이야기다. 시인 서효인은 인생을 야구로 논한다. 논하는게 아니라 이야기 한다. 그것도 아주 즐겁게. 그냥 읽어선 좀처럼 이해 가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어쨌든 끝까지 다 읽었다. 그런데 확실히 흥미롭다. 사직구장에 가서 직접 눈으로 경기를 지켜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 뜨거운 야구장의 열기가 느껴졌다. 서효인 시인의 유년 시절도 바로 눈 앞에서 보는 것 같았다. 기둥에 묶인 채 라디오를 듣는 어린 사내 아이. 그 옆에 놓여 있는 요강. 아이는 요강을 바라보며 야구장을 떠올리고 있다. 참 재밌는 광경이다.

 

왠지 이 책이라면 세상과 꿈 사이에 끼어든 악재들의 농락에도 당당히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글러브가 내 등판을 살짝 터치하기 전에 어깨 넓이로 벌어진 상태 선수의 다리 사이로 보이는 홈네트를 향해 슬라이딩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꼴이 아무리 우습게 보여도 당당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이래도 저래도 손님한테 욕 먹고 코웃음 들을 바에야 차라리 그게 낫다. 1%의 확률만 있다면 사력을 다해 슬라이딩 하자. 그건 나를 살리는 일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질 나쁜 사람들과 시샘하는 이들의 태그를 요리조리 피하고, 그들을 골탕먹이며 시원하게 슬라이딩 하자. 런다운 하자. 옷은 좀 더러워지고 팔꿈치나 무릎이 바닥에 긁혀 조금 쓰리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는 나를 응원'하고 있으니까.

 

밤에서 아침으로 슬라이딩하면서 나는 꼭 아웃당하는 기분이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저 그런 일로는 그저 그런 대학의 등록금 내기도 빠듯했다. 더러워진, 내가 입은 유니폼이 나를 결정했다. 하지만 그 얼룩들은 이상하게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어쨌거나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누가 내 이름을 불러줬던가. 내 이름을 부르고, 또 불러서 끝내 응원할 사람은 나 자신 밖에 없었다. 나는 죽지 않고 태그를 피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움직이는 동작은 반짝이게 마련이다. 유니폼은 더러워지겠지만, 뭐 어떤가. 

 

그런 반짝반짝한 더러움을 '런다운'이라고 한다. 

 

이래저래 야구 이야기로 가득한 책이지만 참 정감간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전라도인 특유의 구수하고 정감가는 푸근함이 느껴진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가라, 서효인. 그리고 나도 함께 간다. 당신은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에서부터 서울특별시 마포구 망원동까지, 나는 광주광역시 남구 월산동에서 앞으로 나아갈 그곳까지. 우리 함께 격려하며 화이팅 하자. 노란 막대 풍선 가득 불었던 바람이 빠지면 다시 팽팽해 질 때까지 바람을 불어 넣고 힘차게 응원하자. 맥주캔 부딪히며, 힘차게 즐겨 보자. 이 인생을.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는 야구를. "야구, 몰라요"가 아닌 "됐쓰요."가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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