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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볼 수 없는 지도 ㅣ 높새바람 27
정승희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1년 11월
평점 :
난 언제나 나 혼자 힘들고 아팠다. 늘 나만 아프다고 생각했다. 나만 힘들고, 나만 아프고, 나만 괴롭고, 나만 불공정하고. 하지만 직접 돈 벌며 살아보니 이 세상이 참 불공정 하구나, 싶었다. 나만 아픈게 아니라 모두가 아픈거구나. 그런데 웃긴건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힘들면 남 탓을 하게 된다. 좋은 건 내 덕이고 나쁜 건 남 탓 하는게 사람 마음이라지만 가만 보면 너무 분하고, 어처구니 없고, 씁쓸하기만 하다. 그런데 그런 쓰디쓴 세상 속에서도 제 힘으로 잘 버티며 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얼굴이 확 달아 올랐다. 어찌 보면 그 어린 것들은 제 스스로 만든 상황이라기 보다는 이미 먼저 앞서나간 이들이 다져 놓은 잘못된 길 위에서 발을 헛딛여 흙탕물에 구르고, 나뭇가지에 긁히고, 가시 덩굴에 휘감겨 괴로워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남의 도움을 기다리기 보다는 제 스스로 갖은 고난을 이겨낸다. 그 모습을 보니 지난 시간들이 부끄러웠다. 난 몸만 자랐지 생각이 자라지 않았다는 생각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렇게 어린 아이도 제 스스로 생각하고 소신 있게 행동하는데 '나는 여지껏 어떻게 살아 왔지?' 싶다. 나는 지금부터 심지가 곧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 성장하는 일곱 아이를 소개하려고 한다. 아이들의 나이는 제각각 다르지만 참 생각이 바르고 올곧은 아이들이라 보고 있으면 내 마음도 따뜻해진다.


목차
1. 나무와 슬리퍼 할아버지
2. 눈으로 볼 수 없는 지도
3. 다시 시작하는 내 인생
4. 장수하늘소에게 말걸기
5. 소금기둥
6. 우리는 섬에서 살아
7. 일곱살짜리 우리 형
어른들이 만든 환경 속 상처 받는 아이들
뜻하지 않았던 상황이나 의도가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상처이고 곤란한 환경으로 변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나무와 슬리퍼 할아버지」를 보면 선생님은 좋은 일을 하자는 취지에서 아이들에게 집에서 보는 신문을 모아 오라는 숙제를 내 준다. 나무네 집도 처음엔 '보편적으로 신문을 구독하는 집'이었지만 아버지의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판도가 뒤바꼈다. 돈을 아껴야 한다며 쓸데 없이 나가는 돈을 모두 막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무네 집은 더이상 신문을 볼 수 없었고, 결국 나무는 폐지를 모으기로 한다. 나무는 폐지를 구하러 다녀야 하는 상황을 초래한 선생님과 부모님을 원망한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지도」에서 현우는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 간다. 교통사고를 당해 죽어가는 현우의 부모님은 돈이 없어 병원을 전전하다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현우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던 것이다. 외로운 현우에겐 광모라는 친구가 있지만, 이 둘은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다. 만복 복덕방의 '만복' 할아버지와 대길 복덕박의 '대길' 할아버지의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현우와 광모의 사이도 언제나 티격태격이다. 서로 물고 뜯고, 복덕방 일로 싸우고 토라지고를 반복한다.
「다시 시작하는 내 인생」의 난툼은 김태경으로 살았던 시절, 아들이라는 이유로 모든 짐을 떠맡아야 하는 중압감에 시달리며, 가장이라는 억압에서 자유롭지 못해 불우한 인생을 살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고, 「장수하늘소에게 말걸기」의 새미는 진보하는 세상 속에서 허영심에 가득찬 아이들의 욕구를 즉시 해결해주는 어른의 힘을 받은 채은이 때문에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은 조바심으로 가득찬 내면의 '새미'와 다투게 되고, 「소금기둥」의 수지는 시대에 맞지 않는 남아선호사상을 외치는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고개 숙인 엄마의 모습에 넌덜머리를 느낀다. 「우리는 섬에서 살아」의 은기와 억만은 어른들이 아파트를 지을 때 차별을 둔 '임대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해 깊은 상처를 받고, 「일곱살짜리 우리 형」의 '나'는 형인 박모래알을 잃어 버린 책임을 묻기라도 하는 듯 차가운 질책의 시선을 던지는 엄마의 태도에 상처 받아 성격이 삐딱해졌다.
아이들은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았지만, 언제나 그려질 준비가 된 새하얀 도화지 같다. 그 위에 어떤 밑그림을 그려주느냐에 따라 성격과 유형, 채색 방법, 느낌이 달라지 듯 아이들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모두 다른 반응을 보인다. 아이들은 녹록치 않아 보이는 환경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사고하고, 외로워하고, 반항하고, 성장한다. 그래서 대견하다. 좌절하지 않고 대항하고 성장하는 것. 아이들은 제 나름대로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어른이 만들어 놓은 '현실'이라는 바탕 위에 자신만의 색과 스타일을 가지고 다양한 그림을 그려 나가고 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지도』에 수록된 일곱 편의 글 중 하나인 「장수하늘소에게 말걸기」를 예로 들면, 유행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속된 말로 '한 물 간'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새미가 놀림감이 되고, 조바심이 생기고,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급변하는 IT시장과 사람들의 소비 형태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IT시장에는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새로운 버전의 IT기계가 출시 되고, 기획 되고, 프로모션 된다.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은 트랜드로 떠오른 제품을 구입하게 되고, 그런 문화들이 확산되어 모든 사람들이 신제품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고수준의 보편그룹'에 들지 못한 이들은 그만한 소외감과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최신식 핸드폰을 가지고 싶다는 유혹. 타의에 의해 시끄럽게 울어대는 핸드폰을 들고 열람실 밖으로 나가 핸드폰 주인을 찾으러 다니며 유혹을 받는 모습은 너무나 현실적이다. 그래서 더욱 슬프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지도』는 이런 일곱 명의 아이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 준다.

아이들이 겪는 저마다의 성장통
처음부터 어른이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똑같이 신생아에서 시작해 어린아이로 자라나 청소년이 되고, 청년을 지나 어른으로 성장한다. 각각의 시기에는 '성장통'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성장통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것도 있지만 정신적인 것도 있다. 간단히 말해 개인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오랜 시간에 거쳐 품고 있다가 어떤 일을 계기로 그 해답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이 성장통이라는 것은 시기별로 겪게 되는데 키가 자라려고 할 때면 무릎과 발목이 아릿하게 아파오는 것처럼 정신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잦은 트러블에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 세우고 있다가 그간 쌓였던 울분을 한 번에 터트리는 등 감정적으로 행동하게 될 때가 많다.
내가 이 책에 실린 단편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고 공감하는 작품, 「일곱살짜리 우리 형」을 예로 들어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나'에겐 문제가 하나 있다. 형 나이 일곱 살, 자신의 나이 두 살 때 보러 간 마술쇼장에서 두 살이었던 '나'가 우는 바람에 엄마는 형인 박모래알에게서 눈을 땠고, 쇼가 끝나고 시작된 이벤트로 소란해진 사이 아버지는 형의 손목을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나'의 형 박모래알은 실종 되었고, 남아 있는 것이라곤 일곱살의 모습을 한 형의 사진 뿐이다. 형에 대한 기억도 없고 정보도 없는 '나'에게 매년 8월 13일, 무료배급을 하는 대학로를 찾아 온 가족이 박모래알을 찾는 일은 더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은 지겨운 일이었다. 심지어 자신을 "외동 아들"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나'는 형의 존재를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얼굴도 모르고, 형에 대한 기억도 없으니 당연한 일인 것 같지만 진짜 원인은 따로 있다. 바로 부모. 11년 전 잃어버린 형에게는 헌신을 다 하는 것과 달리 '나'에게는 신경도 써주지 않고 무심하게 대하는 부모의 태도에 '나'에겐 할머니의 무릎이 가장 안정적이고 포근한 기억으로 떠올릴 수 있는 전부다.
'나'는 엄마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아들을 잃어 버린 부모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한다. 자신이 있는데 11년 전에 잃어버려 소식 조차 알 수 없는 형에게만 관심을 쏟으며 현신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부모의 모습에 공감하지 못한다. 오직 대학로에 가기 싫고, 이 지겨운 일을 그만 두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아들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이구아나가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나'가 키우고 있던 이구아나는 허름한 철창에 이구아나를 넣고 기르고 있었는데, 8월 13일에 온 가족이 모여 형을 찾으로 대학로를 돌고 집에 돌아와보니 문이 모두 열려 있었고 이구아나도 철창에 없었던 것. '나'는 이구아나가 집에 돌아오지는 않을까, 나무 밑에서 추워서 떨고 있지는 않을까, 밥은 먹었을까, 춥진 않을까,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아이가 이구아나를 찾기 위해 엄마가 누워 눈물을 쏟아 내는 안방 앞을 지나쳐 오는 장면에서 엄마가 한탄하는 소리와 이구아나를 걱정하는 '나'가 내뱉는 말이 점점 유사해지면서 상실로 인한 공감과 성장을 엿볼 수 있었다.
통과의례 후 암시적 해피엔딩
아이들은 성장통을 치루고 난 뒤에 저마다 알게 모르게 성장 했고, 형태는 다르지만 암시적인 해피엔딩을 맞이 했음을 독자들은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나무와 슬리퍼 할아버지」의 엔딩은 참 가슴 따뜻하고 훈훈한 결말이지 않을 수 없다. 넝마주의라고 할아버지를 비난하고 상처를 안겨주었던 나무는 마지막에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다니며 폐지를 모아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할아버지를 위해 그 동안 꼬박 모은 돼지 저금통을 깨서 파란 양말 한 켤레를 사 문구점에서 산 종이 봉투에 넣어 선물을 해 드렸다. 날이 아직 추우니 양말 신고 다니시라는 나무의 걱정이 담긴 선물이었다. 원래는 담임 선생님께 말씀 드려서 종이를 팔아 모은 돈으로 할아버지를 도와달라고 부탁 했으나 이미 도와줄 곳이 정해져서 불가능하다는 답을 받고 개인적으로 선물을 준비한 것이다. 이 팍팍한 세상 속에 나무와 같은 동심과 배려, 따뜻한 마음은 추운 겨울을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인터넷 기사에서 보았던 어떤 어린 아이의 벽보가 생각 난다. 아파트에 이사 왔다며 엘리베이터에 붙여 놓았던 정성스럽게 만든 벽보. 그리고 그 주변에 포스트잇으로 쓰여진 아파트 주민들의 환영 인사. 서로 담 쌓고 서로 모르는 척 살아오며 얄팍한 인심만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 따뜻한 바람을 훅, 불어 주는 어린 아이들의 동심과 용기가 참 보기 좋다. 나무의 그 따뜻한 배려도, 바라지도 않던 동생의 탄생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엄마의 모유를 배달해주며 인큐베이터 안에서 생기를 되찾아가는 아기의 모습과 '언니'라는 어감이 주는 느낌에 묘한 감정을 느끼는 수지의 모습. 이런 모습들이 다소 험난했던 이 책에 등장하는 일곱 명의 아이들의 다소 화목하고 훈훈한 미래를 상상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따뜻함과 훈훈함이 남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 이 책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지도』 서평단에 선정 되어 출판사 '바람의아이들'에서 제공 받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