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손은 붉게 물들고 매드 픽션 클럽
미치오 슈스케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일부러 잘못된 길을 알려주고 절정에 올랐을 때 뒷통수를 치는 것이 미치오 슈스케만의 매력.

 

항상 그랬다. 미치오 슈스케는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다. 어디로 가면 되냐는 말에 친절하게 자신을 따라오라며 앞서 걷는다. 친절한 호의에 감사하며 따라 걷다가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에서야 그는 비로소 "아아, 미안. 여기가 아니라 그 옆이다. 다시 가볼까?"라며 제멋대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잘못된 길을 따라가고 있으면서도 그게 전혀 '잘못 된 것인지 눈치채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따라가버리고 만다. 슈스케가 나의 뒷통수를 때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트릭이다."라고 말할 걸 알면서도 나는 어느새 그를 믿고 따라가고 있다. 그리고 보란듯이 뒷통수를 가격하는 그를 휑뎅그래 바라보며 '뭐야, 이번에도 그런거였어?'라며 볼을 뚱하니 부풀린다. 알듯 말듯, 보일듯 말듯한 트릭과 복선 속에서 헤엄치며 나는 언젠가 내 뒤통수를 가격해올 미치오 슈스케의 행동개시를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있어 미치오 슈스케는 정말 장난꾸러기 소년과 같은 작가다.

 

<용의 손은 붉게 물들고>를 읽기 시작한 순간 태풍 소식이 들려왔다. 4호 태풍 뎬무가 우리나라에 완전히 접어들었을 무렵,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그동안 뜸만 들여 놓았던 용의 손을 집어들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가 싶더니 곧이어 쏴아아!하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제법 굵은 빗줄기가 바람을 타고 앞마당으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A와 B의 상황이 한 컷씩 번갈아가며 보여지는 구조로 짜여진 용의 손에 나오는 두 결손가정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책 안에서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음울한 분위기에서 이제 막 서막을 시작한 슈스케의 소설이 태풍을 불러 오기라도 한 것일까? 뭔가 알 수 없는 끕끕한 느낌의 전혀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온 몸을 휘감았다.

 

나는 렌의 새아버지가 더럽다고 생각했다. 친딸은 아니지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나, 하고 생각하며. 나는 렌-가에데 남매와 다쓰야-게이스케 형제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일에 천천히 녹아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 모든 사건이 맞물릴 듯 하면서도 맞물리지 않는 이질적인 구도에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 모든것을 믿어나갔다. 부모는 죽고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타인'과 살아가는 두 결손가정 중에서 나는 렌-가에데 남매와 소설 초입부터 결속되었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렌-가에데 남매와 감정이랄지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랄지 하는 작고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가 맞아 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렌이 새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순간온수기를 사용한 그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렌이 살인을 계획한 순간부터 난 렌의 곁에서서 그 장면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던 것 같다.

 

빈 틈이 생기지 않게 모든 문을 꼭꼭 닫던 렌의 모습. 쿵쾅대며 컵을 깨끗이 씻어 순간온수기를 가리듯 내려 놓는 모습. 집을 나와 비속에서 불안한 듯 기쁜 듯 집을 올려다보던 모습. 그 모습이 마치 실제로 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선명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미치오 슈스케가 그렇게 친절한 남자일 리는 없다. 언제나 그렇듯이 뒤통수를 치고 마니까. 아니, 사실은 뒤통수를 친다, 라고 거창하게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멍청해서 그가 '재미'로 작정하고 만들어놓은 트릭에 걸려 가짜를 진짜로 믿어버리고 묘한 이질감에 허우적댄 내 잘못일 뿐이다. 보다못한 슈스케가 던져준 떡밥을 전환점으로 삼아 '아~ 그랬던 거였어?!'라며 멍청하게 되물은 내가 잘못이다. 하지만 나는 미치오 슈스케가 던져주는 떡밥도, 그가 나를(독자 모두를) 작정하고 속이기 위해 설치해둔 트릭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용은 재앙이면서도 동시에 희망과도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내게 있어 제 1의 작가이자 롤모델이 온다 리쿠라면, 희열과 동시에 씁쓸함을 안겨주는 제 2의 작가는 역시 미치오 슈스케일테지.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에서 보여주었던 치밀한 전개와 희열 넘치는 짜릿함. 9살 소년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박력. 그리고 약간 허술하면서도 묻어가는 듯 하면서도 극적으로 끝냈던 결론까지. 그 뒤로 나는 미치오 슈스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뭐가 빨려들어간다,는거야. 뭐가 어느 순간에 정신 차려보니 다 읽고 말았습니다,야?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을 읽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된다. 당신의 정신력이 어디까지 버티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미치오 슈스케가 던져주는 거짓에 절대 속지 말도록 주의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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