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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남미
이미혜 지음 / 책만드는집 / 2010년 6월
구판절판

지난 13일(화). 뒤늦게 <레알, 남미>가 내게 왔다. 작년 이맘때 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청춘 남미>를 읽은 후 남미에 대한 환상과 열망을 가지게 된 나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레알, 남미>를 펼쳐들었다. 언젠가, 내 생활이 어느정도 자리가 잡히고, 청춘이 다 가기 전에.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갑자기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꼭 가겠다고 결심한 그곳. 남미. 작은 나라들이 하나의 커다란 여행투어 코스로 자리잡은, 관광지로 손색이 없으면서도 위험하기도 한. 찾거나, 혹은 버리기 위해 과감히 떠날 수 있는 남미. 나는 오늘도 꿈꿔본다. 남미에서 배낭과 손때 묻은 디지털 카메라를 앞으로 단단히 고쳐매고 살을 시커멓게 태우며 사진 찍는 내 자신의 모습을.
쿠바 : 트리니다드 - 산타클라라 - 아바나
페루 : 리마 - 파라카스 바예스타섬 - 와카치나 - 쿠스코 - 마추픽추 - 삭사이와망 - 푸노 - 티티카카 호수
볼리비아 : 코파카바나 - 라파즈 - 데스로드 - 루레나바케 - 우유니
아르헨티나 : 멘도사 - 라 루랄 - 산 카를로스 데 바릴로체 - 칼라파데 - 페리토 모레노 - 칼라파테
칠레 : 토레스 델 파이네
다시, 아르헨티나 : 우수아이아 - 부에노스아이레스 - 푸에트로 이구아수
브라질 : 포스 도 이구아수
<레알, 남미>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솔직한 여행 일지'다. 지금까지 여행기가 '어디에 간다면 여기는 꼭 가보길.' 이라던가, 여행을 다니며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뿐이었다면 <레알, 남미>는 여행루트까지도 상세히 나열하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상관 없이 솔직하게 담아냈다.
<청춘 남미>나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IN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모데라토와 안단테였다면, <레알, 남미>의 박자는 아다지오 또는 아다지시모다. 이미혜 작가의 느린 문체 때문인지, 더위에 지쳐 늘어져버린 내 마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느릿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남미 사람들처럼 그렇게 읽어갔다.
남미에 속해있는 나라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라는 마추픽추와 티티카카 호수가 있는 PERU. 그리고, 우수아이아와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자리해있는 ARGENTINA다. 파란 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새파란 물빛을 가진 티티카카 호수는 사진을 보는 것 만으로도 "우와!"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고,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인 공중성, 마추픽추는 그 경이로움에 감탄하게 된다. 아르헨티나, 하면 역시 악마의 목구멍을 빼 놓을 수 없지.
글을 읽고, 사지는 보는 것 만으로도 남미를 더욱 사랑하게 만들어버린 책. 바로, <레알, 남미>다.
책을 여는 순간, 나는 어쩌면 이미혜 작가의 오른편 뒤쪽에 서있었는지도 모른다. 책이라는 타임머신을 이용해 이미혜 작가가 남미로 떠나던 그 순간으로 조용히 스며든 나. 짐도 카메라도, 비자도 없이 붉은 꽃이 커다랗게 프린팅 된 흰색 반팔티에 물빛 반바지를 입은 채로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책을 읽는 내내 몸은 현실에 두고 영혼은 이미혜 작가가 여행하는 그 순간으로 가서 함께 한 여행은 정말 힘들면서도 재미있었다.
그녀가 지쳐 땅에 주저앉으면 나 역시도 그 옆에 앉아 숨을 몰아쉬었고, 군것질 거리로 감자칩을 사들면 몰래 하나씩 뺏어 맛보기도 하고, 못된 현지인에게 속아 으슥한 길을 올라가던 중에는 위험한 거 아니냐고 속삭여도 보면서 그녀와 함께 돌아다녔다. 나야 영혼뿐이니 출국 심사나 입국 심사를 치룰 필요는 없었지만 나의 여행 가이드인 이미혜 작가를 위해 얌전히 기다려주기도 하면서 남미의 페이스. 아니, 어쩌면 이미혜 작가의 페이스에 맞춰 천천히 읽어내려간 <레알, 남미>. 그 뜨겁도록 열정적이면서도 이성적이었던 나의 가상여행은 우수아이아를 지나 푸에르토 이구아수 국립공원에 있는 악마의 목구멍에서 끝이 났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라, 쿠바. 비비드한 색깔로 건물을 칠한 이 나라는 정말 눈 부시도록 밝고 쾌활하다. 어쩌면 그곳에서 그녀와 함께했던 여행이 가장 여유로우면서도 즐거웠는지도 모르겠다. 인정이 넘치고 정감 있는. 여행객들에게 환하게 미소지으며 시덥잖은 농담을 던지기도 하는 쿠바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 벽을 거의 헐었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커다란 창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사생활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사람들. CSI 마이애미에서 호라시오 반장님 다음으로 매력을 방출해내는 에릭 요원을 닮은 남자아이까지.
자존심만 높아 살거면 사고, 싫으면 말라는 식의 쌀쌀맞은 볼리비아에서의 여행과 비교하면 쿠바의 여행이 가장 따뜻했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해도 내가 가장 열광하는 나라는 페루다. 내가 어째서 페루에 열광하는지에 대해선 나도 갸웃.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페루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산이 있으니까 오르고 좋아하니까 좋듯이 난 페루가 좋다.
쿠바에는 체 게바라의 구조물이, 볼리비아에는 소금사막이, 아르헨티나에는 악마의 목구멍이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페루엔 마추픽추가 있다. 마추픽추는 이 우르밤바 계곡지대의 해발 2,280m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나이 든 봉우리'라는 뜻을 가진 마추픽추. 산자락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공중도시'라고도 불린다고. 자연이 만들어낸 풍경과 경관에 놀라워했다면, 페루에 와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에 놀라워 할 차례다. 그 무거운 돌을 들고 어떻게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와 이런 도시를 만들었을까?
마추픽추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잉카인들이 스페인 인들의 공격을 피해 산속 깊숙이 세운 것이라고도 하고, 군사를 훈련해서 후일 스페인에 복수하기 위해 건설한 비밀도시라고도 하고, 홍수를 피해 고지대에 만든 피난용 도시라고도 한다. 무엇을 믿던지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지만, 난 역시 첫번째 이야기를 믿고 싶다. 이렇게 완벽하고 아름다운 도시가 피비린내나는 복수를 위해 건설된 비밀도시라거나 홍수를 피하기 위한 피난용 도시로 전락한다면 슬플 것 같으니까.
주객이 전도된 볼리비아 시장에서 그녀와 함께 느꼈던 설움이 아직도 생생하다. 좋은 기억도 많았을텐데 나쁜 기억만 자꾸 떠오르는 것은 대체 무슨 장난인지. 하지만 볼리비아에서도 아름다웠던 시절은 있었다. 바로 우유니에서 보았던 소금사막! 볼리비아 포토시주의 우유니 서쪽 끝에 있는 소금 사막은 지각변동으로 솟아 올랐던 바다가 빙하기를 거쳐 2만 년 전 녹기 시작하면서 이 지역에 거대한 호수가 만들어졌는데, 비가 적고 건조한 기후로 인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물은 모두 증발하고 소금 결정만 남아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말대로 볼리비아는 바다와 인연이 없는게 아닐까? 그나마 있던 바다도 모두 말라 소금만 남았으니.
그녀와 나는 건기 때에 가서 소금만 있는 이름 그대로의 소금사막을 보고 왔다. 하지만 우기때 가면 물이 고여 소금호수로 변한다니 그 때 맞춰서 가 보는 것도 좋을 듯. 예전에 바다였다고 하더니, 지평선 너머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수평선이라고 해야하나?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랴. 건기 때는 지평선이고, 우기 때는 수평선인 것을.
하지만 아무리 나쁜 기억이 있었다 할지라도 이곳에서는 다 잊게 되어버린다. 아르헨티나 이구아수 국립공원 안에 있는 악마의 목구멍. 보고있는 것 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지고, 지금 당장이라도 폭포수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 것만 같은 악마의 목구멍. 아르헨티나에서 내려다보고, 브라질에서 올려다보며 아찔함과 함께 짜릿함을 동시에 느끼고 만다. 남미에 가면 반드시 들려봐야 할 이구아수 국립공원. 그곳에서 나는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버리게 될까?
나와 이작가과 함께 한 길고 긴 여행이 끝이났다. 이제는 이작가의 시간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와야 할 때. 이작가는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나는 악마의 목구멍을 통해 현실로. 29의 막바지에서 100일간의 여행을 마친 이작가의 여행을 3일을 투자해 지나왔다는게 미안하기도 하면서 뿌듯하기도 하다. 정말 그녀와 함께 여행을 다녀온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걸었던 길. 트래킹을 즐겼던 장소에서 함께 웃기도 하고 즐기기도 하면서 남미의 또 다른 모습을 가슴에 새긴다.
지금쯤 서른이 되어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 이작가. <레알, 남미>를 펼치는 순간 그녀의 페이스인 아다지오를 끝까지 지키며 돌아다녔던 남미. 이젠 내 차례다. 언제가 될지, 얼마 동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기필코, 꼭! 가봐야지.
이미혜 작가의 솔직하면서도 느릿한 남미 이야기가 읽고 싶다면, 지금 당장 <레알, 남미>로의 여행을 떠나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