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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 오라나 고갱 - 소설로 만나는 폴 고갱
더글러스 리스 지음, 송희경 옮김 / 파란자전거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타히티 섬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토테파와 고갱의 만남, <이아오라나 고갱>

- 타히티의 토테파가 있던 지역에서 그린,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
“나는 내 낡은 삶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이제부터는 돈에 대해서도,
파리에서의 명성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런것들은 이 나무를 베어낼 때 함께 베어버렸습니다.”
폴 아저씨가 말했다.
“이제 뭐든지 할 준비가 됐어.” P. 223
언젠가 말한 기억이 있지만, 나는 화가들 중에서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한다.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가 그려낸 세계가 불안정하기 때문인 것도 있으며 그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열정 때문이기도 했다. 몇몇은 그를 미치광이라 부르고, 몇몇은 그를 불운한 천재 화가라고도 부르지만 나는 그를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화가'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 모든 것을 떠나서 나는 고흐의 친구, 고갱을 만나보았다. 원래는 고흐의 일생을 다룬 소설을 보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학교 도서관엔 고흐의 삶을 옮겨 적은 문학이 없어 그와 노란색 아틀리에에서 함께 지냈던 폴 고갱에 대해 읽어보기로 한 것이다.
이아 오라나.
1891년, 고갱이 타히티에 들어와 체류했을 때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있다. 책 제목에 적힌 '이아 오라나'는 타히티 말로 "안녕하세요."를 뜻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은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인삿말─이아 오라나, 고갱─처럼 따뜻한 내용을 품은 소설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고갱과 남자의 첫 만남은 그 누구보다 괴팍했으며 난폭했으니 말이다.
책 제목만 봐도 알수 있겠지만 이 책의 화자는 '고갱'이 아닌 다른 누군가이며 주인공 역시 고갱이 아니다. 솔직히 내가 이런류의 책을(아니면, 이런 내용의 책을) 원했던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걸 원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이 책 속에 나온 고갱과 그가 사랑한 야생인, 토테파와 함께 호흡하며 생활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소설식으로 풀어져 나가는 내용 때문인지, 내가 고흐에 관심이 많다보니 그의 친구였다는 고갱에게 조금이라도 그 관심을 나누어 주고 싶어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주위의 풍경과 소음에도 영향 받지 않고 집중해서 책을 읽어본 것은 정말 오랫만인 것 같다.
비록 고흐에 대한 이야기는 딱 한 번, 고갱이 토테파에게 타히티에 오기 이전의 일과 오게된 이유를 설명할 때 나온 반페이지 내용이 고작이었지만 그 당시의 고갱이 고흐와의 아틀리에 생활을 청산한 뒤에 그를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했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직설적이고 주장이 강한 말이었다. 그렇다해서 고갱에게, 이 책에 실망한 것은 아니다. 고흐에 대한 별달은 이야기는 없었찌만 오히려 고갱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니 말이다.
고갱의 '고유한 야생인', 토테파
책의 제목이 설명해주고 있듯 고갱은 이 글의 화자도 아니고 주인공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한명에 불과할 뿐이다. 단지 주인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나의 미련한 주인공이 변할 수 있도록 조력해 준 것만 빼면 그의 역할은 미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 과연 주인공은 누구일까? 고갱의 작품 중 <마타무아>라는 작품을 비롯해 1891년. 즉, 고갱이 타히티에 처음 거주하던 시절에 그려낸 여러점의 작품에 등장하는 '토테파'라는 이름의 남자가 이 글의 화자이자 주인공이다. 하지만 이 글의 토테파가 '진짜 토테파' 일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약간의 사실을 가지고 그려진 픽션이니만큼 적당히 즐기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만 염두해둔다면 <이아 오라나, 고갱>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토테파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며 행동한다. 아주 철저하게 '토테파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와 고갱이 만났던, 1891년 타히티를 배경으로.
나는 토테파의 눈과 마음을 통해 타히티 섬과 테하네와 고갱을 바라보았고, 토테파의 몸을 통해 그것들의 온기를 느끼고 감각을 느꼈으며 그들과 함께 호흡을 나누었다. 고갱에게 주먹으로 세 차례 맞은 볼이 얼얼하기도 했으며 처음으로 밝게 웃어보이던 고갱에게 친밀감을 느끼기도 하였으며, 로베르의 여자가 되었어야 했던 테하네를 사랑하기도 했다. 또한, 스모킹 미러가 나타났다고 느껴질 때는 토테파와 함께 두려워하고 초조해 하였으며, 늑대를 보았을 때는 토테파 못지 않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꾹 내리 눌러야만 했다. 이 책을 읽어 내려가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의 나는 토테파가 되어있었고, 고갱과 함께였으며 테하네와 함께였다.

- 고갱의 친구이자 고유한 야생인, 토테파가 등장하는 MATAMOE(마타무아) 공작새와 수탉이 등장하는 그림
“그는 나를 죽인다. 낡은, 죽은 나. 알겠나, 토테파? 자네는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죽은 나무를 쪼개고 있는 거야.
불길은 죽은 나무를 새로운 형태로 다시 살아나게 하는 거고. 무언가가 파괴될 때는 반드시 다른 무언가가 대신 태어나게 되기 마련이야.” P.231
스모킹 미러

토테파는 그 무엇보다도 스모킹 미러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너무 오랫 동안 한결 같은 사람들을 골탕먹여 변화를 일으킨다는 스모킹 미러가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악마라고 믿고 있는게 분명했다. 그러나 토테파는 고갱과 함께 하면서 조금씩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토테파의 말처럼 스모킹 미러는 불운을 가져오는 것 같기도 했지만 결국은 토테파를 성장시키는 가장 중요한 역살을 한 셈이다. 물론, 고갱의 몸을 빌려서.
책 속의 고갱이 말하기를 <마티무아> 속의 토테파(즉, 자신이 사랑하는 아미고, 토테파)는 죽어버린 나무를 쪼개어 모닥불에 짚어 넣음으로써 새로운 무언가를 탄생시키는, 자신을 살아있게 만들어 주었다고 했다. 고갱에게 있어서 토테파가 그러한 것 처럼 토테파에게 있어서 고갱 역시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나무를 베러 고갱과 산에 올랐을 때, 토테파는 그곳에서 새롭게 태어난 고갱을 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토테파는 스모킹 미러를 이겨냈다. 그렇다면 낡은 토테파를 베어 죽이는 것은, 자신을 불행해 빠트리기 위해 가끔 찾아온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스모킹 미러가 아니었을까?
전반적으로 나는 이 책의 내용에 대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토테파와 함께 생활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을지 모를 당신에게 미리 내용을 알려주는 것은 어쩌면 김이 빠질 정도로 안타깝고 잔인한 일이 될지도 모르며 흥미진진한 일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어쩌면 이 책의 주인공은 토테파도 아니고 고갱도 아닌, 현대의 스모킹 미러에 맞서는 우리 스스로가 주인공일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책을 구할 수만 있다면 폴 고갱이 직접 쓴 <노아 노아>를 읽어보고 싶다. 토테파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고갱의 일기라고 하니 반드시 읽어 보고 싶다. 혹시 모르지. 폴 고갱이 기록한 메모와 같은 <노아 노아> 속에 잠시 동안 아틀리에에서 함께 생활했던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이야기도 적혀 있을지.
비바 엘 아르티스타 그란데! 비바 고갱!
비바 토테파! 비바 타히티! 비바! 비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