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 이치도 (순정)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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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꽤 오랫동안 책꽂이에 꽂힌 채 책모서리가 노르께하니 바래갈 동안 쉽에 첫장을 넘기지 못했다.... 
고래...때문이었다. 

윤성희의 '구경꾼들'에서 할머니가 아이를 가지고 몸을 풀 때까지 백과사전을 독파했다는데 
나는 아이를 가지고 낳을 때까지 한국단편소설전집을 독파했다(직업과 관련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르지만)
1990년 겨울 그렇게 소설에 묻혀지냈던 시절 이후로 나는 '허구'의 세계에 동참하여 흡수되어 가는 내 에너지로 인하여 피곤을 많이 느끼게 되었고, 소설을 멀리해왔다.
인문, 사회, 과학, 기술...비문학 분야를 방황하면서 이런저런 소설들을 장바구니에만 담았다가 다시 내려놓기, 보관함에 쌓아두었다가 잊어버리기를 반복하던 내게...
"천재적인 입담...","타고난 이야기꾼..." 하면서 문학계에 이름이 오르내리던 천명관, 성석제는 다시 소설이라는 물에 발끝을 담가볼 용기를 내게 만들었다.

그래서 선택했던 '고래'였는데, 첫장을 펼치자마자부터 펼쳐지는 그 스펙터클...두려웠다...현대판 마고할미의 이야기가 나를 덮치는 충격에 나는 '이 이야기라고 하는 세계에 계속 발을 들여도 좋을까?'하는 회의를 갖게 되었고(재미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심각하게 빠져 누가 불러도 모를 정도로 단숨에 읽어버렸으니까), 자연스럽게 '도망자 이치도'는 책꽂이에 꽂힌 채 자외선을 받으며 나날이 늙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잠시 돌아가자 싶어 몇 몇 안심이 되는(?) 소설들을 거친 후에 굳게 마음 먹고 집어든지 이틀만에 '도망자 이치도'아니 성석제에 대한 나의 도전은 일단락되었다. 
'고래'와 '도망자 이치도'는 나에게 도전이었다.
폴오스터를 읽으며 "남자 왜 이리 말이 많아"..했었는데...
'도망자 이치도'를 읽으면서는 "이 남자는 말도 많으면서 실실거리는데다가 한 마디 한 마디를 툭툭 집어던지는데..."라고 뇌면서도 눈은 계속 이야기를 좇고 있었다. 

말장난도 이 정도면 실험이 아니라 습관이다 싶을 때 쯤에 이치도의 삶 언저리를 구경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 담임에 국어과 교사인 나로서는 재작년에 졸업시킨 북학생 녀석, 10년 전에 우리반이었던 오토바이맨..지금은 김해 어딘가에서 호프집을 하고 있다는 87년도 우리반 반장 녀석...덕천동 어디 나이트 삐끼한다는 우리반 총무...조직의 넘버3인 삼촌을 대신해 보스의 형을 대신 살러 큰집을 들락거렸던 3반 부반장..
그 이치도들이 온 책에 가득해져 잠시 울컥했으나...

결국 그 마지막의 킬킬거림에 나또한 피식 웃고는 제법 길게 침묵했다.
그 이치도들의 삶이란 것이, 그 이치도들의 순정이란 것이 나에게는 25년 가까운 시간동안 내 삶 아니면서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성석제, 내 스타일은 아니다...억제로서의 성석제는 더욱...그러나 그 성석제는 지극히 평범한 이들의 지극히 평범한 삶을 지극히 평범하게...혹은 말 잘하는 이를 흉내내는 말더듬이처럼...후딱후딱 주워섬긴다. 그걸로 의미는 있다고... 
***역시 장편의 호흡을 따라 몰입하고나면 기가 빠진다는 느낌을 다시 받는다. 내 의지로 조절되는 호흡이 아니라, 이야기가 이끄는 호흡을 따라 벅차게 달린 후, 기분 좋은 나른함....이었으면 좋겠는데....무겁고 힘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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