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슬램덩크 신장재편판 1~20 세트 (완결) - 전20권
이노우에 타케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배송도 한달 가까이 걸리면서 순서도 뒤죽박죽 보내고, 사은품 엽서도 없네요? 뭐 하자는 건지요? 미리 양해를 구하거나 팔지를 말아야 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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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각인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지음, 라승도 옮김 / 곰출판 / 2021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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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읽었는데 최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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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서재와 보관함이 안돼더니 오늘은 책을 주문하려니까 주문이 안된다. 알라딘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영업을 하는 것인가. 답답한 마음에 알라딘의 대표 에러 메시지 캡쳐 해둔 것들을 덧붙인다.


1.런타임오류

2.아래와 같은 이유로 페이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3.응용 프로그램에 서버 오류가 있습니다


4.이렇게 사전 공지 없이 서버점검을 하다가 에러를 감당 못하자 공지를 합니다.어제 오전11시45분


4.오늘 장바구니에 담긴 걸 구입하려고 하니 이제는 결제 에러.


이전에 구입한 상품이 있는 것도 아니데(설령 있더라도 구입했던 상품을 지적했는데 여기서 막혀서 주문불가)


5.잘 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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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고병려, 바울, 고위공, 하인리히 뵐...

날도 덥고 해서, 내 방을 물리치고 집사람 방에 내려와 노는데 (내 방은 옥탑방, 집사람 방은 구석방) 며칠 전부터 책상 앞에 딱 앉아서 오른쪽을 흘끗 보면 계속 내 눈에 들어와 꽂히는 책이 하나 있는 거다. 제목은 <바울서간>인데, 사실은 그 저자의 이름이 더욱 인상적인 거다. "고병려"라고... 글쎄, 지금 와서 봐도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니다 싶다.(문득 오늘 무슨 인터넷 만화에서 본 "연보흠" 기자가 생각나네.) 이 사람... 예전에 집사람 책장에 그 책이 있는 걸 봤어도, 그냥저냥 이런저런 신학자 아니면 목사 아니면 뭐 비스무리한 양반이겠지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그 책이 "뎀비는" 바람에 수고롭게도 책장에서 꺼내 뒤적뒤적해 봤다. 그런데 의외로 이 책은 이른바 신약성서의 "바울서간"(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의 번역, 그러니까 사역(私譯)인 거다. 예전에 집사람이 좋아라 하며 헌책방에서 집어들던 무교회 쪽 사람인가 싶어 맨 앞장 저자 약력을 보니 의외로 당시(1987년) "서울대학교 희랍어 강사"라고 나오는 거다.

오호. 얼마 전에 피천득 선생 에세이집에도 희랍어를 통달했던 친구 모 교수의 죽음을 애통해 하던 이야기가 나와 흥미롭더니, 이 양반은 또 누구신가 싶어 인터넷을 뒤적뒤적해 보았더니, 이런, 2006년 4월 23일에 별세하셨다고 한다. 덕분에 한 가지 얻게 된 또 다른 정보는 그의 아들이 바로 독문학자 "고위공" 선생이라는 것. 어째 집안 내력인지 이름들이 결코 평범하진 않은데(병려, 위공), 하긴 내가 "고위공"이라는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것도 그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아주 예전, 그러니까 울 엄마가 <주부생활> 열혈 독자일 때에 하루는 "별책부록"으로 날아온 책 가운데 노벨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는 책이 있었는데, 그 번역자가 바로 "고위공"이었다. 알고 보니 학원사, 아니, 주부생활사에서 나오던 주우 세계문학 가운데 한 권을 재가공(뭐냐면... 안 팔리는 책을 절단기로 이래저래 "짤라"서 표지갈이 한 책)해서 내놓은 물건 같았다. 생각해 보면 하인리히 뵐의 소설을 읽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누런 이로 소시지를 베어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표제작보다도 그 뒤에 실린 <아담, 너는 어디 있었느냐?>가 무척 인상적이었다.(지금도 그 제목은 외운다니까. Wo warst du, Adam.) 하긴 뒤의 작품이 좀 더 비극인 이유도 없지 않고...

하인리히 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십중팔구는 "귄터 그라스가 받아 마땅한 상을 얍삽하게 뺏은" 인물로 인식되는지 모르겠는데, 글쎄, 그거야 뭐, 나중에 그라스도 일종의 체면치레는 했으니 더 이상은 그런 이야기가 안 나오겠지. 무슨 뜻이냐면 귄터 그라스가 문학성은 더 뛰어난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인의 반성이랄까, 그런 분위기를 좀 더 잘 드러낸 것은 하인리히 뵐이기 때문에 노벨문학상 선정 위원회 쪽에서도 그라스 대신 뵐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소문이 없지 않았던 거다.(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이 보통 "한 수 위"로 여겨졌던 다니자키 준이치로 대신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돌아갔을 때의 충격과도 비슷했다고나 할까. 물론 다니자키는 그보다 몇 년 전에 사망했지만, 후보로는 종종 거론되었다고 들은 바 있다.) 그래서인지 하인리히 뵐의 소설은 어딘가 우울한, 그러니까 잿빛의 소설이라고 인식되었는데, 의외로 단편이나 방송극은 재미있었다.(가령 "나의 슬픈 얼굴"이라든가, "어린 왕의 수기" 같은 풍자적인 단편,그리고 <결산>이라는 방송극집에 나온 그의 몇몇 작품이 지금도 기억난다.) 독문학계의 "불독"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조차도 그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으로 기억했다. 폴란드 출신의 라이히-라니츠키 부부가 독일로 망명한 직후, 그를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 중 하나였던 하인리히 뵐이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 그의 부인을 즐겁게 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사로잡힌 영혼>이란 자서전에서 하고 있었으니까. 나중에 라이히-라니츠키의 독설로 인해 관계가 소원해졌지만, 그래도 수년만에 다시 만났을 때 먼저 그를 끌어안고 "이제 다시 친구가 된 거지?" 하고 유쾌하게 물어본 사람 역시 하인리히 뵐이었다고 한다.(뭐야, 불독 영감. 쪼잔하게시리.)

다시 고병려의 <바울 서간>으로 돌아가자. 성서의 "사역"으로 내가 기억하는 것 중 하나는 최민순 신부의 "시편" 번역이다. 이건 손바닥 만한 작은 판형의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는데, 아쉽게도 최 신부는 희랍어를 몰랐기 때문에 (이 양반의 본령은 라틴어였던가, 이탈리아어였던가 그랬지.) 이런저런 다른 번역본을 참고해서 일종의 "중역"을 시도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뭐, 원래부터 시인인가 그랬고, 이 양반 번역의 <신곡>을 보면 지금 봐도 도대체 뭔 소리인지 모를 정도로 독특한 우리말 구사가 일품이기 때문에, 나름 중역이라도 "시편"의 뉘앙스에는 오히려 걸맞은 번역자가 아닐까 싶다. 하여간 고병려의 <바울 서간>은 전5권으로 구상된 "약주 신약성서 시리즈" 가운데 4권으로 나오는데, 이 시리즈가 완간된 것은 아닌 모양인지,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그중 <마가복음>, <요한문학>이 더 출간된 듯하지만 5권이 완간되지는 못한 모양이다. 집사람이 갖고 있는 책에는 특이하게도 종종 틀린 부분에 "스티커"를 붙이고 화이트로 지운 부분이 있다. 아마도 그리스어 원본의 직역에 충실하려 한 까닭일까, 기존의 여러 성서에 비하면 약간 뻣뻣한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뭔가 새로운 해석이랄까, 이해의 여지를 남겨준다는 점에서는 소중한 자료가 아닐까 싶다. 가령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로마서 13장, 이른바 "세속 권력에 대한 복종" 대목을 보자.

  • 모든 사람은 상부의 직권에 복종하라. 하느님에게서 유래하지 아니한 권위가 없으니, 현존하는 모든 집권자는 하느님에 의하여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고병려 옮김)
  •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바라. (개역개정판)
  •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동개정판)

어디서 읽었더라? 누군가가 "신학"을 공부한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요즘 신앙이 잘 서지 않는 모양이군" 하고 비아냥 조로 이야길 하는데, 하긴 그렇다. 단적으로 말해 예수처럼 살 수만 있다면 신학이나 교회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기보다는 오히려 예수 이름 팔아 먹고 사는 일종의 "사업체", 또는 "관료조직"이 되고 말았으니, 신학이란 것도 이들에게 뭔가 올바른 지침으로서 필요하다고는 본다. 문제는 신학과 신앙, 또는 이론과 실천, 아니면 강단과 현장이 상호침투적이지 못하게 다 제멋대로 따로따로 논다는 것이겠지만. 하긴 기독교 신학만큼이나 그 두 가지가 완전 등을 돌린 분야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강단에서 언급되는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이야기만 들어도 그 수많은 "영빨" 두둑한 집사, 권사, 장로들은 야단법석을 떨 텐데... 그렇게 보면 그것 참 문제다. 그런 "영빨" 우선론자들은 그렇다면 과연 자신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알기나 하는 것일까?

기독교의 진리는 "모순되기 때문에 믿는다"는 어느 교부의 말, 더 나아가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는 이상야릇한 "궤변"으로 귀결되게 마련인데, 솔직히 사람이 뭔가를 "믿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자신이 이걸 믿으면 뭔가 "이득"이 있을 것임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믿고 말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거다. 나 역시 일찍이 기독교란 것을 접하며 "믿음"을 갈구했으나, 그에 앞서 뭔가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결국 기독교란 것도 허상 중의 허상이구나 싶어서 실망하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오늘날의 기독교, 또는 신학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자뻑"에 다를 바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뭔가를 "지키기 위해" 또는 "옹호하기 위해" 내놓는 논리란 구차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기독교만큼 그 근거가 되는 문헌 자체가 모순적인 난리뻐거지인 다음에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근거 하나만큼은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에 온갖 무리수를 두게 되고, 그럼으로 인해 올바른 비판이나 지적까지도 외면하고 마는 셈이다. 기독교의 문제는 바로 그거다.  물론 세계 모든 종교의 문제가 바로 그것, 박약한 근거를 지키기 위해 내세우는 "권위"이겠지만.

하여간, 정확히 자기가 뭘 믿는지 알고 싶다면 일단은 그놈의 "권위," 그러니까 성서가 도대체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 톨스토이가 말년에 가서 웬 변덕으로 열혈 기독교인이 되어 성서를 읽기 위해 히브리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거나, 또는 김교신이 <성서조선>에 어느 일본서적을 전재한 "희랍어 문법"을 연재하면서까지 "원전 강독"을 시도했던 것 역시 그런 맥락일 것이다. 어쩌면 고병려라는 양반, 성서 희랍어뿐만 아니라 고전 희랍어를 읽을 능력이 있는 양반이 굳이 그런 "사역"을 시도한 것도 그런 맥락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면 참으로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믿음"이란 것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일까? 기껏해야 그들이 참고할 수 있는 자료란 어느 편집, 가공된 고대 문헌의 "번역"에 불과한 것인데 말이다. 그들은 과연 예수의 수많은 비유 가운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목(가령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해도 울지 않았느니라" 같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일까?(어쩌면 이것은 그 당시의 관용적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니 기독교의 믿음이란 것, 조금만 파고 들어가면 홍어를 밟는 것마냥 발밑이 흔들리는 체험일 수밖에 없다. 그런 박약한 근거 위에 나름대로 "신앙"과 "믿음"을 확고히 세워 불신자에 대한 갖가지 파상공세를 펼치다못해 광신적인 수준으로까지 나아가는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정말 좀비들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왜 의심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인 것인데.

뭐, 돌아가신 양반 붙잡고 이런저런 넋두리를 할 필요는 없겠지. 그 역시 당시로선 희귀했던 원문 해독능력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정확한 이해"를 도모하던 인물이었는지는 몰라도, 결과만 놓고 보면 아주 성공한 쪽은 아닌 듯하다.(일단 완간이 안 되었으니까.) 그 아들인 "고박사"만 해도 특별히 대중적인 연구 성과는 내놓지 않은 듯, 하인리히 뵐의 소설 번역 하나, 파울 첼란의 시집 두어 권, 그리고 게오르크 트라클 연구서 한 권 정도를 내놓았을 뿐이다.(오호, 트라클. 비트겐슈타인이 부친으로부터 받은 재산을 희사한 세 명의 시인 가운데 한 사람. 마야코프스키와 쌍벽을 이룰 만한 "빠박" 시인으로 기억하는.) 어쩌면 그냥저냥 나름 조용히 묻혀 사는 것 역시 이들 "고박사"들의 전통일런지도 모르겠지만... 우연히, 그리고 뜻밖에 생각나고 알게 된 김에 끄적끄적해 본다. 역시나 이곳에 적어두면 훗날 망각은 피할 수 있을 것이기에.

 

 

*** 레이 몽크의 비트겐슈타인 전기를 뒤적이며 트라클에 대한 대목을 찾아본다. 비트겐슈타인은 트라클을 자신의 후원 대상자로 선정한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의 시의 어조는 마음에 든다. 물론 무슨 뜻인지는 이해되지 않지만 말이다." 오호라...

*** 인터넷에서 "고위공"을 치면 "고위공직자" 관련 내용만 주루룩 뜨는 상황이다. 반면 알라딘에서 "고병려"를 치면 무려 2528건의 상품이 떠 버린다. 이게 웬일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고병려"라는 저자의 책은 한 권도 없고, 그 각각의 음절, 그러니까 "고", "병", "려"에 해당되는 온갖 물건들이 "윤구병"부터 "박병철"과 "황병하"까지 망라되어 나오는 것이었다. 사오정 검색이지, 뭐.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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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어제밤에는 예찬이가 자정을 넘겨깻다.1시간 가량 찢어질 듯 비명도 지렀다.이웃집에서 뭐라 하진 않을까 신경도 쓰였지만 설마 새벽에 문을 두드리기야 하겠느냐며 생각을 지웠다.거의 1시간 정도 징징거리다가 잠이 들었다.밤이 힘든 건 외로운 사람들만이 아닌가 보다.세상의 많은 아기들에게 밤은 힘드나봐.왜 그런지는 모르겠네..

새벽 1시를 훌쩍 넘겼는데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아마 다음날이 쉬는 날이어서 마음에 여유가 있었던 듯 하다.다 큰 어른이 외갓집 찾아가는 횟수로 방문하는 나의 불면증.어제가 그날이었다.덕분에 책이나 읽자며 <미국의 송어낚시>를 40분쯤 봤다.누워서 보자니 허리도 아프고 해서 책을 덮고 컴퓨터를 켰다.이것 저것 구경하다가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다시 누웠지만 잠이 들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대략 4시 가까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7시에 자명종이 울려 깨어 났다.그 이후에도 몇 번 더 깻던 예찬이도 자명종 소리가 귀찮은 듯 깼다.오늘은 휴일인데 시계를 꺼놓지 않다니...불찰이다.

아침에 모차르트를 들었다.사실 이 페이퍼를 쓸때부터  어떤 곡을 가장 먼저 고를까 생각해야만 했다.의외로 쉬웠다.6월 햇살에 담장 넘어 온 붉은 장미처럼 어디서나 만만한게 모차르트다.그리고 협주곡이었으면 했다.클래식을 처음 듣는 경우에 소품을 건너뛴다면 협주곡이 가장 무난하다.오케스트라도 즐길 수 있고 각 악기의 현란함도 즐길 수 있다.또 연주자들의 면면을 느끼기에도 좋다.

지난 해는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었고 또한 예찬이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나는 기념으로 자동차 뒤에다가 은색 알파벳 스티커로 'MOZART 250'을 붙였다.사실 스티커 부작 부위에 흠집이 생겨서 가리려고 고민하다고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오늘 아침에는 겸사 겸사해서 예찬이와 함께 음악을 들었다.물론 예찬이는 또 스피커 유니트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지만 이제 더이상 망가질 것도 별로 없어보여서 그냥 내버려두었다.조금 장난하더니 부엌 뒤편 다용도실로 기어가서 쓰레기통에 애착을 보였다.무려 6번을 다시 들고 거실로 왔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kv 466을 들었다.

모차르트는 27개의 피아노협주곡을 만들었는데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들은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어린 시절에 쓴 습작 수준의 작품이어서 그렇다.또 당시에는 요즘 처럼 악보관리나 저작권 관리가 철저하지 않아서 몇 몇 섞인 것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하여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은 대개 후반기 작업들이 자주 연주되고 녹음된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은 d단조곡이다.1785년에 작곡되었다고 한다.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재미있는 것은 이 곡이 모차르트가 처음 단조로 만든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것이다.이어지는 협주곡 24번과 함께 단조 협주곡으로 자주 연주된다.

1악장을 듣다보면 왜 모차르트를 '질주하는 슬픔' 이라고 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울음을 자신과 남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시골 운동장을 달리는 소년의 마음같다.현악기의 당김음과 음울한 저음의 현악기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결코 느리지 않다.1주네는 흐린 날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수평선을 생각하게 된다.바닷빛과 하늘 빛이 그리 다르지 않다.회색빛 두 선 사이로 무언가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보인다.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소통하기 시작하는 첫 마디에서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오는 부드럽고 상냥한 햇살이 느껴진다.나는 이 곡을 들으면 바로 그 부분.오케스트라의 메기기에 이어지는 피아노의 후렴의 첫 건반 소리가 늘 기다려진다.여름 날 흙먼지 운동장 바닥으로  떨어지는 첫번재 빗방울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2악장은 예전에 어느 CF에서도 쓰여서 그런지 '아기 로맨스'다.큰 잎에서 분가한 작은 부레옥잠 처럼 피아노 건반이 유영한다.''다 다라라라 라라 라라 다단 ....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도 들어보면 '아 ..이 곡 알아' 할만큼 유명한 아기자기 예쁜 곡이다.다른 곡이 지겨우면 2악장만 재미있게 들어도 별 상관없다.나는 이곡을 들으면 자꾸 편안하게 잠자고 있는 아기들이 생각난다.아무래도 그CF 때문인지 어디서 본 영상 때문이지 모르겠다.영상이 음악과 만나면 장점도 있지만 이렇게 방해를 하기도 한다.

3악장 론도.빠르기는 알레그로 아사이.많이 빠르다는 뜻이다.1악장 처럼 다시 d단조로 진행되는데 조성은 같지만 1악장처럼 음울한 느낌이 강하지는 않다.1주제부터 힘차게 시작해서 그런 듯 하다.

클래식이 의외로 생활에서 여기 저기 많이 들린다.우리 나라에서는 결혼할때도 멘델스존과 바그너의 축복하에서 식이 진행된다.그 곡들이 멘델스존의 <한여름밤의 꿈>과 바그너의 <로엔그린> 중에 나오는 곡인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관심을 가지려면 약간씩 관심을 입증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기타를 잘 치기 위해서 플랫위에서 '도' 소리가 나는 자리가 어디인지 다 외워야하고 야구를 즐기기 위해서는 야구 규칙을 어느정도 알아야하는 것 처럼 말이다.한 남자가 야구장에 여자친구 데려갔는데 여자가 그러더란다.'왜 저 사람은 볼 4개 먹으니까 1루로 나가' ..

오늘 아침에 들었던 음반은.

 프리드리히 굴다/클라우디오 아바도/빈필하모닉(DG) 연주였다.내가 처음으로 산 20번 연주여서 다른 연주들보다 특히 애착이 간다.굴다는 아주 괴짜 피아니스트였다.유대인 모자를 쓰고 자주연주했고 재즈 음반도 여러장 냈다.흔히들 '빈 3총사'라고 불렸다.파울 바두라 스코다,외르크 데무스와 함께 빈의 정서를 잘 표현한 피아니스트로 꼽힌다.젊은 날의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빈 필 특유의 유려한 현악 울림이 곡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느낌이다.

클라라 하스킬/이고르마케비치/라무뢰오케스트라(Ph) 녹음 역시 훌륭한 연주로 많이 알려져 있다.클라라 하스킬은 모차르트 연주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왔다.하스킬은 18살때 한창 나이에 세포경화증이라는 몸쓸 병에 걸려서 꼽추 할머니같은 모습을 같게 되었다.젊은 시절에는 무척 예쁘고 단아했는데..하지만 그녀의 모차르트 연주는 박음질이 없는 천상의 옷과 같은 느낌을 준다.굴다에 비해 덜 화려한 데 그점 때문에 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루돌프 제르킨/클라우디오 아바도/런던심포니(DG) 녹음은 자주 듣진 않지만 가끔 무게감있는 모차르트를 듣고 싶을 때 찾는다.그렇다고 모차르트를 베토벤처럼 연주하지는 않는다.제르킨은 말년에 모차르트 협주곡 녹음을 아바도와 남겼다.음을 곱씹는 듯,조금은 사색적인 음색이 여럿의 취향이 되긴 조금 힘들겠지만 이상하게 듣고 싶어질 때가 많다.커플링면에서는 앞의 두 음반 보다 떨어진다.(굴다-20,21번 협주곡,하스킬-20,24번 협주곡,제르킨-20,12번 협주곡.부에나비스타소셜 클럽도 그랬지만 노장의 연주는 언제나 감동을 준다.아니 그냥 감동하고 싶다.(굴다-20,21번 협주곡,하스킬-20,24번 협주곡,제르킨-20,12번 협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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