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고병려, 바울, 고위공, 하인리히 뵐...

날도 덥고 해서, 내 방을 물리치고 집사람 방에 내려와 노는데 (내 방은 옥탑방, 집사람 방은 구석방) 며칠 전부터 책상 앞에 딱 앉아서 오른쪽을 흘끗 보면 계속 내 눈에 들어와 꽂히는 책이 하나 있는 거다. 제목은 <바울서간>인데, 사실은 그 저자의 이름이 더욱 인상적인 거다. "고병려"라고... 글쎄, 지금 와서 봐도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니다 싶다.(문득 오늘 무슨 인터넷 만화에서 본 "연보흠" 기자가 생각나네.) 이 사람... 예전에 집사람 책장에 그 책이 있는 걸 봤어도, 그냥저냥 이런저런 신학자 아니면 목사 아니면 뭐 비스무리한 양반이겠지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그 책이 "뎀비는" 바람에 수고롭게도 책장에서 꺼내 뒤적뒤적해 봤다. 그런데 의외로 이 책은 이른바 신약성서의 "바울서간"(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의 번역, 그러니까 사역(私譯)인 거다. 예전에 집사람이 좋아라 하며 헌책방에서 집어들던 무교회 쪽 사람인가 싶어 맨 앞장 저자 약력을 보니 의외로 당시(1987년) "서울대학교 희랍어 강사"라고 나오는 거다.

오호. 얼마 전에 피천득 선생 에세이집에도 희랍어를 통달했던 친구 모 교수의 죽음을 애통해 하던 이야기가 나와 흥미롭더니, 이 양반은 또 누구신가 싶어 인터넷을 뒤적뒤적해 보았더니, 이런, 2006년 4월 23일에 별세하셨다고 한다. 덕분에 한 가지 얻게 된 또 다른 정보는 그의 아들이 바로 독문학자 "고위공" 선생이라는 것. 어째 집안 내력인지 이름들이 결코 평범하진 않은데(병려, 위공), 하긴 내가 "고위공"이라는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것도 그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아주 예전, 그러니까 울 엄마가 <주부생활> 열혈 독자일 때에 하루는 "별책부록"으로 날아온 책 가운데 노벨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는 책이 있었는데, 그 번역자가 바로 "고위공"이었다. 알고 보니 학원사, 아니, 주부생활사에서 나오던 주우 세계문학 가운데 한 권을 재가공(뭐냐면... 안 팔리는 책을 절단기로 이래저래 "짤라"서 표지갈이 한 책)해서 내놓은 물건 같았다. 생각해 보면 하인리히 뵐의 소설을 읽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누런 이로 소시지를 베어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표제작보다도 그 뒤에 실린 <아담, 너는 어디 있었느냐?>가 무척 인상적이었다.(지금도 그 제목은 외운다니까. Wo warst du, Adam.) 하긴 뒤의 작품이 좀 더 비극인 이유도 없지 않고...

하인리히 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십중팔구는 "귄터 그라스가 받아 마땅한 상을 얍삽하게 뺏은" 인물로 인식되는지 모르겠는데, 글쎄, 그거야 뭐, 나중에 그라스도 일종의 체면치레는 했으니 더 이상은 그런 이야기가 안 나오겠지. 무슨 뜻이냐면 귄터 그라스가 문학성은 더 뛰어난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인의 반성이랄까, 그런 분위기를 좀 더 잘 드러낸 것은 하인리히 뵐이기 때문에 노벨문학상 선정 위원회 쪽에서도 그라스 대신 뵐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소문이 없지 않았던 거다.(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이 보통 "한 수 위"로 여겨졌던 다니자키 준이치로 대신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돌아갔을 때의 충격과도 비슷했다고나 할까. 물론 다니자키는 그보다 몇 년 전에 사망했지만, 후보로는 종종 거론되었다고 들은 바 있다.) 그래서인지 하인리히 뵐의 소설은 어딘가 우울한, 그러니까 잿빛의 소설이라고 인식되었는데, 의외로 단편이나 방송극은 재미있었다.(가령 "나의 슬픈 얼굴"이라든가, "어린 왕의 수기" 같은 풍자적인 단편,그리고 <결산>이라는 방송극집에 나온 그의 몇몇 작품이 지금도 기억난다.) 독문학계의 "불독"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조차도 그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으로 기억했다. 폴란드 출신의 라이히-라니츠키 부부가 독일로 망명한 직후, 그를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 중 하나였던 하인리히 뵐이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 그의 부인을 즐겁게 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사로잡힌 영혼>이란 자서전에서 하고 있었으니까. 나중에 라이히-라니츠키의 독설로 인해 관계가 소원해졌지만, 그래도 수년만에 다시 만났을 때 먼저 그를 끌어안고 "이제 다시 친구가 된 거지?" 하고 유쾌하게 물어본 사람 역시 하인리히 뵐이었다고 한다.(뭐야, 불독 영감. 쪼잔하게시리.)

다시 고병려의 <바울 서간>으로 돌아가자. 성서의 "사역"으로 내가 기억하는 것 중 하나는 최민순 신부의 "시편" 번역이다. 이건 손바닥 만한 작은 판형의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는데, 아쉽게도 최 신부는 희랍어를 몰랐기 때문에 (이 양반의 본령은 라틴어였던가, 이탈리아어였던가 그랬지.) 이런저런 다른 번역본을 참고해서 일종의 "중역"을 시도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뭐, 원래부터 시인인가 그랬고, 이 양반 번역의 <신곡>을 보면 지금 봐도 도대체 뭔 소리인지 모를 정도로 독특한 우리말 구사가 일품이기 때문에, 나름 중역이라도 "시편"의 뉘앙스에는 오히려 걸맞은 번역자가 아닐까 싶다. 하여간 고병려의 <바울 서간>은 전5권으로 구상된 "약주 신약성서 시리즈" 가운데 4권으로 나오는데, 이 시리즈가 완간된 것은 아닌 모양인지,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그중 <마가복음>, <요한문학>이 더 출간된 듯하지만 5권이 완간되지는 못한 모양이다. 집사람이 갖고 있는 책에는 특이하게도 종종 틀린 부분에 "스티커"를 붙이고 화이트로 지운 부분이 있다. 아마도 그리스어 원본의 직역에 충실하려 한 까닭일까, 기존의 여러 성서에 비하면 약간 뻣뻣한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뭔가 새로운 해석이랄까, 이해의 여지를 남겨준다는 점에서는 소중한 자료가 아닐까 싶다. 가령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로마서 13장, 이른바 "세속 권력에 대한 복종" 대목을 보자.

  • 모든 사람은 상부의 직권에 복종하라. 하느님에게서 유래하지 아니한 권위가 없으니, 현존하는 모든 집권자는 하느님에 의하여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고병려 옮김)
  •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바라. (개역개정판)
  •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동개정판)

어디서 읽었더라? 누군가가 "신학"을 공부한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요즘 신앙이 잘 서지 않는 모양이군" 하고 비아냥 조로 이야길 하는데, 하긴 그렇다. 단적으로 말해 예수처럼 살 수만 있다면 신학이나 교회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기보다는 오히려 예수 이름 팔아 먹고 사는 일종의 "사업체", 또는 "관료조직"이 되고 말았으니, 신학이란 것도 이들에게 뭔가 올바른 지침으로서 필요하다고는 본다. 문제는 신학과 신앙, 또는 이론과 실천, 아니면 강단과 현장이 상호침투적이지 못하게 다 제멋대로 따로따로 논다는 것이겠지만. 하긴 기독교 신학만큼이나 그 두 가지가 완전 등을 돌린 분야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강단에서 언급되는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이야기만 들어도 그 수많은 "영빨" 두둑한 집사, 권사, 장로들은 야단법석을 떨 텐데... 그렇게 보면 그것 참 문제다. 그런 "영빨" 우선론자들은 그렇다면 과연 자신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알기나 하는 것일까?

기독교의 진리는 "모순되기 때문에 믿는다"는 어느 교부의 말, 더 나아가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는 이상야릇한 "궤변"으로 귀결되게 마련인데, 솔직히 사람이 뭔가를 "믿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자신이 이걸 믿으면 뭔가 "이득"이 있을 것임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믿고 말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거다. 나 역시 일찍이 기독교란 것을 접하며 "믿음"을 갈구했으나, 그에 앞서 뭔가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결국 기독교란 것도 허상 중의 허상이구나 싶어서 실망하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오늘날의 기독교, 또는 신학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자뻑"에 다를 바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뭔가를 "지키기 위해" 또는 "옹호하기 위해" 내놓는 논리란 구차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기독교만큼 그 근거가 되는 문헌 자체가 모순적인 난리뻐거지인 다음에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근거 하나만큼은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에 온갖 무리수를 두게 되고, 그럼으로 인해 올바른 비판이나 지적까지도 외면하고 마는 셈이다. 기독교의 문제는 바로 그거다.  물론 세계 모든 종교의 문제가 바로 그것, 박약한 근거를 지키기 위해 내세우는 "권위"이겠지만.

하여간, 정확히 자기가 뭘 믿는지 알고 싶다면 일단은 그놈의 "권위," 그러니까 성서가 도대체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 톨스토이가 말년에 가서 웬 변덕으로 열혈 기독교인이 되어 성서를 읽기 위해 히브리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거나, 또는 김교신이 <성서조선>에 어느 일본서적을 전재한 "희랍어 문법"을 연재하면서까지 "원전 강독"을 시도했던 것 역시 그런 맥락일 것이다. 어쩌면 고병려라는 양반, 성서 희랍어뿐만 아니라 고전 희랍어를 읽을 능력이 있는 양반이 굳이 그런 "사역"을 시도한 것도 그런 맥락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면 참으로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믿음"이란 것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일까? 기껏해야 그들이 참고할 수 있는 자료란 어느 편집, 가공된 고대 문헌의 "번역"에 불과한 것인데 말이다. 그들은 과연 예수의 수많은 비유 가운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목(가령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해도 울지 않았느니라" 같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일까?(어쩌면 이것은 그 당시의 관용적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니 기독교의 믿음이란 것, 조금만 파고 들어가면 홍어를 밟는 것마냥 발밑이 흔들리는 체험일 수밖에 없다. 그런 박약한 근거 위에 나름대로 "신앙"과 "믿음"을 확고히 세워 불신자에 대한 갖가지 파상공세를 펼치다못해 광신적인 수준으로까지 나아가는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정말 좀비들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왜 의심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인 것인데.

뭐, 돌아가신 양반 붙잡고 이런저런 넋두리를 할 필요는 없겠지. 그 역시 당시로선 희귀했던 원문 해독능력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정확한 이해"를 도모하던 인물이었는지는 몰라도, 결과만 놓고 보면 아주 성공한 쪽은 아닌 듯하다.(일단 완간이 안 되었으니까.) 그 아들인 "고박사"만 해도 특별히 대중적인 연구 성과는 내놓지 않은 듯, 하인리히 뵐의 소설 번역 하나, 파울 첼란의 시집 두어 권, 그리고 게오르크 트라클 연구서 한 권 정도를 내놓았을 뿐이다.(오호, 트라클. 비트겐슈타인이 부친으로부터 받은 재산을 희사한 세 명의 시인 가운데 한 사람. 마야코프스키와 쌍벽을 이룰 만한 "빠박" 시인으로 기억하는.) 어쩌면 그냥저냥 나름 조용히 묻혀 사는 것 역시 이들 "고박사"들의 전통일런지도 모르겠지만... 우연히, 그리고 뜻밖에 생각나고 알게 된 김에 끄적끄적해 본다. 역시나 이곳에 적어두면 훗날 망각은 피할 수 있을 것이기에.

 

 

*** 레이 몽크의 비트겐슈타인 전기를 뒤적이며 트라클에 대한 대목을 찾아본다. 비트겐슈타인은 트라클을 자신의 후원 대상자로 선정한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의 시의 어조는 마음에 든다. 물론 무슨 뜻인지는 이해되지 않지만 말이다." 오호라...

*** 인터넷에서 "고위공"을 치면 "고위공직자" 관련 내용만 주루룩 뜨는 상황이다. 반면 알라딘에서 "고병려"를 치면 무려 2528건의 상품이 떠 버린다. 이게 웬일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고병려"라는 저자의 책은 한 권도 없고, 그 각각의 음절, 그러니까 "고", "병", "려"에 해당되는 온갖 물건들이 "윤구병"부터 "박병철"과 "황병하"까지 망라되어 나오는 것이었다. 사오정 검색이지, 뭐.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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