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기인 > 사회주의에 대해2 -울라님, 윤타님과

울라
노동자 국가 창출을 위해 노동자 정당이 존재하고, 당은 진공상태가 아닌 계급투쟁이라는 엄혹한 조건에서 존재하는 바, 당의 일상적 존재양식은 투쟁일 것입니다. 그리고 투쟁에서의 승리와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가 양립할 수 없을 때 후자의 폐기를 선택할 수 있는 결단은 이 가치들의 이상적 구현은 혁명의 완성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신념에 근거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의 진정한 담지자는 제도, 불문율 등의 형식이 아닌 주체라는 것, 노동자 당에서의 민주주의의 달성은 이러저러한 형식이 아닌 혁명적 주체의 재생산에 달려있다는 것, 따라서 사회주의자는 당의 일상적 실천 가운데서 당과 함께하고 단련되어야 한다는 것은 계급투쟁이라는 명제를 인정하는 이들에게는 1903년 이래로 공식화된 합리적 결론일 것입니다. 우리가 열사에게서 삶을 뜨겁게 사랑하는 이유가 삶을 불살라버린 근거가 되어버린 모순을 발견하듯이,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를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이들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진형 사회주의'란 결국 적당히 사회주의 교양을 공부한 자유주의자의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 2007-02-06 12:37
 
로쟈
**님/ 농반진반입니다.^^
울라님/ 정답입니다. 마치 모범답안 같습니다... - 2007-02-06 14:34
 
푸하
문제는 부정적인 것의 담지자가 되고 싶은 개체가 있는가? 하는 것 같아요. - 2007-02-06 21:29
 
기인
그런 개체는 있을수도 있는데, 제가 문제삼고 있는 부분, 또는 고민하고 있는 부분은. "다시 돌아온 주체"입니다. 과연 혁명적 주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용없는 당위가 아니라, 규정된 법률같은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담금질 되는 혁명적 주체라는 것. 그리고 그 실천과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사이의 역사적(현재 시점에서) 긴장. 당의 일상적 실천 가운데서 당과 함께하고 단련된다는 것. 그런데 현재 당이 과연 있는가? 아니면 당 또한 만들어가야 하는가?
계속 회귀하는 이유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충분한 이론적 반성이 부재하다는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울라님이 말씀하시는 '합리적 결론'이 더 이상 모든 '사회주의자'가 흔쾌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 또한 이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너무 쉽게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였어, 또는 그들은 맑스를 '곡해했어' 정도로 덥고 넘어갈 수 없다는 것. 결국 그래서, 전망이 뚜렷하지 않고, 어떻게 가야하는지, 정말 무엇이 옳은지 모르겠으니, 답답한 것 아닐까요. '답답'하다라는 말은 너무 나이브하고, 오히려 '절망'과 '답답'의 중간에 가깝습니다. - 2007-02-07 14:32 수정  삭제
 
울라
올바른 전망 / 올바른 전망의 구체화로서의 혁명 / 구체화의 매개로서의 사회주의자 => 올바른 관념없이는 역사도 없다!?
의문)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가 현존하지 않는 데/존재한 적이 없는 데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올바른 전망/개념을 갖는 것은 가능한가?
'사회주의는 전망이 아니라 운동이다. 이 운동은 자본주의가 산출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운동으로서 자본주의와 함께 모순적 통일체을 구성한다. 우리는 모순적 통일체로서의 이 역사의 시기의 종착지를 사회주의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목적으로서의 사회주의없이도 스스로 운동한다. 이 운동은 목적인이 아닌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전망이 불투명해서 못한다 = 적정이윤이 보장이 되지 않아서 투자 안한다> 사회주의는 투기가 아닙니다.
*전진하는 운동으로부터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배우리라 믿습니다. - 2007-02-07 17:14
 
기인
전진하는 운동으로부터 배워야 하고 배울 수 있다는 것에는 원칙적으로 동의. 그런데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목적으로서의 사회주의 없이도 스스로 운동한다. 이 운동은 목적인이 아닌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라는 판단은 역시 의심이 갑니다. 그렇다면 '전위'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또는 '전위'라는 주체는 불필요하고, pt가 역사적 운동과정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주체의 역할(또는 주체효과)를 하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제가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는 '당'이 있습니까?
현 시점이 '전망'이 불투명한 시점이라는 것은 바로 '전진하는 운동'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있지 못한 시기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한 의문을 던지신 것처럼,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가 현존하지도 않았고,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은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역사적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이론적 반성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실패에 대한 (이론적) 책임은 누가 져야 합니까?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 반성도 하나의 실천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닐까요?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에 날고, 철학의 임무는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고, 주체는 실천을 통해 구성되지만, 이론 또한 물질화된다는 것. '전진하는 운동'에 따른 새로운 '이론'이 전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 그 '이론'이 확고히 없어서 그것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고요.
울보님 지적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따로 제 페이퍼에 정리해 두겠습니다. ^^ - 2007-02-07 22:09 수정  삭제
 
yoonta
이상하게 길게만 쓰면 댓글이 잘 등록이 안되고 있습니다. -_- 짧게 쓰면 이렇게 올라가고..할말이 많은 내용의 글인데 - 2007-02-07 23:48
 
로쟈
'에디터로 쓰기'로 해보시죠... 그래도 그런가요?.. - 2007-02-07 23:59
 
yoonta
그래도 마찬가지라는...알라딘에 상담해봐도 원인불명이라는군뇨..ㅜ.ㅜ - 2007-02-08 00:01
 
푸하
그렇다면 짧은 글의 무한연쇄를 시도해봐도 괜찮을 듯합니다.^^: - 2007-02-08 00:14
 
로쟈
아무래도 댓글이 아닌 페이퍼를 쓰시는 게 빠를 듯하네요.^^ - 2007-02-08 00:18
 
yoonta
제가 페이퍼쓰는 걸 별로 선호하지 않는 것은 독백처럼 혼자 주절거리다보면 독선에 빠지기가 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완성도의 차원에서는 페이퍼가 더 좋지만 말이죠. 어떤 분은 댓글이 주렁주렁달리는게 싫다고 하시는데 저는 진흙탕속에서 뒹굴게 되더라도 댓글처럼 대화를 주고받는 글이 더 좋더군요.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이 미처 생각치 못했던 생각들도 발견하게 되구요.^^ 근데 문제는 페이퍼도 안올라가네요..-_- 아 근데 어느정도분량까지 올라가는지는 실험안해봤는데 이정도까지는 올라가나보네요. - 2007-02-08 00:42
 
울라
"전위는 전능하지 않습니다. 저 오래된 미래에 대한 초월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종지부를 찍어야 됩니다. 구시대의 전위는 노동자 국가 건설까지에만 가교를 놓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이후의 사회주의운동의 발전은 신시대의 주인에게 과제로 남겨놓으면 됩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정세와 과제, 정세와 과제, 정세와 과제... 이 쉼없는 무한연쇄의 짐을 지고서 지금 이 땅에 '당'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의 안식일을 기원합니다. - 2007-02-08 01:07
 
기인
전위가 전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구시대의 전위'라고 하신 것이 현시대의 전위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노동자 국가 건설' 자체가 반성되고 새롭게 이론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요? (pt의 정치권력 장악과 국가독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자율주의가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떠한 길도 적확한 '전망'으로 제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저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전혀 상관없이 또 다시 '노동자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는 것을 문제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이론이 재구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또 현실적으로 실재적으로 '당'이라는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일종의 '최종심급' 비슷한 의미에서의 '당' 건설이라고 하며, 또 이는 정세와 과제의 '무한'연쇄 속에서 투쟁-실천의 '무한' 연쇄 속에서 먼 지평선으로 다가가는 것 뿐이라면! 지구가 둥글고 유한하다는 확신 속에서만이 먼 지평선으로 다가가는 행위가 유의미하다면, 그 본질적 전제에 관한 반성이 과연 확고히 이루어졌느냐가 의문입니다.
물론 사회주의에 대한 전망은 원칙적으로 전진하는 운동에 대한 이론적 반성으로서 이루어지겠는데, 그 '전진하는 운동'이라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도 포함되는 현정세라는 것입니다. - 2007-02-08 08:59 수정  삭제
 
울라
평소 스타일대로 말하겠습니다.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목적으로서의 사회주의없이도 스스로 운동한다. 이 운동은 목적인이 아닌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에서 제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자본주의가 X 같아서 운동하고, 무릅 꿇고 사는니 서사 싸우다 죽겠다는 뒤틀린 심정으로 운동하지, 해방/평등/우리의 아름다운 사회주의 여신을 추앙해서 운동할 수 있을 것 같냐"는 것입니다. 이념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 이 사회에서 아직도 가진 것이 많아서 못 하는것 아닙니까? 자기가 가진 알량한 것들이랑 죄다 버리고 낮은 곳에 임하소서~ 이 X같은 곳에서 팔뚝질 안하고 살 수 있나...
그리고 노동자국가 권설이란게 뭐 대단한 것 이야기 한 것도 아니고, 억압받는 자가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서 억압을 끝장낼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인 강령이야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근데 이 강령이란게 골방에서 책만 파서는 나오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상아탑 안주인들의 ddr에 기대하느니...
아! 소련의 경험에 대한 반성이야 정말이지 중요하죠. 근데 전 91년 이전의 삶, 러시아어, 러시아인, 그들의 고통과 희망에 직접 맞닿아 있는 활동가가 쓴 글이 나오면 읽으렵니다. 2차문헌에서 짜집기한 논문들의 자기재생산을 바라보는 심정이란... 흐미~~

'이루어야 할 상태로서의 사회주의'라는 개념이 미친 해악은 두 가지이다. 첫째 역사는 이 정당하기 그지없는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는 객관주의의 유포. 둘째 이 훌륭하기 그지없는 관념에 많게 세계를 끼어맞추어야 한다는 주관주의의 유포. 역사의 관조자 혹은 절대군주가 되려는 자 환상에서 깨어나소서. - 2007-02-08 11:25
 
yoonta
울라/소위 레닌주의적 전위당주도의 노동자국가라는 것이 실패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짜집기한 논문들"을 보지 않아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쯤은 이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죄송합니다만 제가보기엔 아직도 님은 한국의 80년대식 맑스레닌주의라는 협소한 시야안에 갖혀계신듯 합니다. 제가 바로 그랬거든요..-_- - 2007-02-08 14:24
 
울라
80년대 스탈린주의 밀수품과 1917년 레닌의 사유를 구분못하는 이가 지금도 있습니까? 전위/당/노동자국가 등 이런 단어들만 나오면 깍~깍~ 소리치며 저기 아직 시체가 걸어다닌다며 질색하는 분들. 한 번 세상 엎어보세요. 그러면 믿어줄게요.

80년대 값싼 낭만으로 어쩌구저쩌구 주변에서 맴돌던 이들. 당신들이 반 푼어치의 값싼 입으로 '동지'라 불렀던 어떤 이들이 수인이 되어서도 꺾지 않았던, 그리고 지금도 키워나가고 있는 그 신념에 발언할 자격이 있습니까?

로자님의 서재를 별 시덥잖은 말들로 어지럽혀 미안합니다. - 2007-02-08 16:56
 
로쟈
별 말씀을. 한데, 견적상 댓글로 카바될 수 있는 말씀들이 아닐 듯한데요.^^ - 2007-02-08 17:15
 
기인
로쟈님 말씀에 동의 ^^; 처음의 논점과는 다른 부분으로 많이 나아갔지만, 분명 울라님이 말하신 것처럼 제가 절박한 노동자의 상황에서 비정규직 투쟁이나 생존권 투쟁에 어느정도 거리가 있는 상황이라서 (꾿꾿하게 공익월급 받아가며 사교육으로 연명하며 자기변명하고 있는 학삐리!라는 상황) 전망이다 뭐다, 고민하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저와같은 '계급'의 사람들이 한때나마 노동자 중심주의와 pt독재를 믿었던 사람들이 요즘 전반적으로 회의하고 있는 까닭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휴머니스트적 동질감으로서 노동자 계급에 투신하는 것이 아니라면
계속 되풀이되는 논점이지만, 울라님이 말하신 것처럼 pt독재, 공산주의, 꼬뮨, 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 구체적 내용이 소련에 대한 반성으로 채워지거나, 적어도 어떤 길은 '아닌지'를 과거 잘못된 길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통해서 반성되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물론 확고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저술과 블루 프린트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닫힌 체계로서, 목적론적으로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것의 폭력성과 실패(즉 교조적 맑시즘)로부터 우리는 배운것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앞으로의 전진하는 운동을 통해서 이론이 조직화되는 것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계속 돌아오는 지점은,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맑스가, 레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시대의 맑스가, 레닌이 아니라. 지금의 맑스와 레닌 말입니다. 제 의문점이 어느정도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도 레닌의 전위당주도의 노동자국가는 실패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그 '스탈린'이라는 지점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럼 스탈린은 사회주의 외부에서 나온 괴물입니까? 스탈린에 의해 조성된 그리고 그가 '발명한' 여러 것들은 비-사회주의라고 처단하면 그만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스탈린이라는 괴물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레닌주의 안에 분명 있었고, 스탈린주의도 그렇게 쉽게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스탈린 이후, 지금 소련은 당연히 부정하시겠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실패를 말미암은 '원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일국-사회주의의 한계이든, 치졸하게는 서방넘들의 압박이든 간에. 그러기에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울라님 말처럼 91년 이전 러시아 활동가의 글이 나오면 읽게다라고 하셨는데, 저도 읽고 싶습니다. 도대체 러시아는 무엇이었는지. 이것이 해결이 안 되면, '팔뚝질'은 하나의 상황에 대처하는, 또는 '조직'의 판단에 따르는 일 밖에 더 되겠습니까? - 2007-02-08 17:50 수정  삭제
 
yoonta
울라/ 당시에도 스탈린은 취급도 안해줬습니다. 주 텍스트는 레닌저작집과 MEW같은 것들었죠. 모르긴 몰라도 님보다는 제가 접한 맑스레닌 저작들이 더 많을걸요? 그리고 위에처럼 말씀 격하게 하시는것보니 제가 무슨 코리아혁명의 배신자쯤으로 보이시나보네요.? 님같은 분들이 과거에도 있었죠. 그런 분들이 소위 혁명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동료사회주의자들을 학살하곤 했었죠..한마디만 더하면 세상은 "한번 엎"는 것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님에게 하려는 이야기는 결국 이겁니다. - 2007-02-09 01:28
 
울라
휴머니스트적 동질감... 자본주의 모순이 여전히 '그'의 문제이고 운동이 '그'의 고통에 공감해야 할 문제인가요. '그'의 해방없이는 '나'의 해방이 없다는 인식이 심장을 뛰게합니다.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나의 해방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기인님의 대안에 대한 사유가 올곧은 지도력을 고민하는 것이라면 이 엄혹한 시기에 뜻있는 동지를 만난듯 기쁨니다. 그렇지만 그 고민의 성패여부가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열심히 하세요. 불편한 글에 인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yoonta/ 동료사회주의자를 학살하고 학살당했던 시대를 체험한 듯 말하네요... 몇마디 댓글로 상대방을 값싼 낭만, ~주의, 학살자로 규정짓는 것 또한 학살의 인터넷버전이라고 생각되네요. 우리는 어쩌면 그토록 미워하며 깔보는 스탈린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요즘같이 칠흑같은 시기에 눈 막고 귀 막고서 운동에 뛰어드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만 반성과 성찰의 터널을 통과했으리라는 착각은 착각일 뿐이죠.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정도의 수많은 회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해지고 있는 '말'들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을 것입니다. 이 근거에 접속해 보시겠습니까?
(80년대 그것들을 읽으셨으니 일어는 정말 잘하시겠네요^^) - 2007-02-09 13:30
 
yoonta
그래서 그런사람(학살한사람) 없다...라고 말씀하고 싶으신가요? 원래 그런겁니다. 소위 레닌주의란게. 줄줄이 읊어드릴 생각 없고 또 그러지도 못하니 역사책 좀 보세요. "짜집기 논문"이라고 비아냥거리기 이전에 기본 소양은 익히셔야죠. 그리고 기본 매너하고.."몇마디댓글로 상대방을 값싼 ~주의"자로 규정한것은 누가먼저인지 위 댓글들을 다시한번 읽어보시길. - 2007-02-09 20:37
 
울라
yoonta님 하나 제안하겠습니다. "소위 레닌주의적 전위당 주도의 노동자국가라는 것이 실패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을 정리해서 올려주기를 바랍니다. 그럼 거기에 제가 가능한 한 성심껏 답하겠습니다.
저도 학교라는 공간에 거주하고 있을 때에는 반-레닌주의자였습니다. 자율적인 활동가들의 동등한 관계맺기를 기획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 몸에 쓰여지고 있는 세계는 점점 "강고한 규율의 당을 달라"는 목소리를 높여 가고 있습니다.
님은 협업에 의한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을 칭송해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를 변혁하는 '노동'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의 협업을 왜 거부합니까? 적의 압도적인 힘을 체험하고 있노라면 전 감히 이러한 거부에 대해 이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세계를 변혁하는 '노동'은 집단적 협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집단적 '노동'은 공동으로 노동하고 공동으로 향유하는 공동노동이기도 합니다. 이 공동노동은 규율없이는 자신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전 동지들의 노동의 축적물/공동의 노동수단을 제 실책으로 소진시켜서는 안 된다는, 제한된 역량을 집중해서 돌파해야 된다는 최소의 조직적 책임을 규율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평가받고 제 역량에 맞추어 알맞은 위치에서 활동하는 것. 전 이것을 규율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러한 규율에 대해 억압이라고 낙인찍을 것입니까? 세계를 변혁하는 노동에 참여하기 위해서, 제가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곳에 있기 위해서 전 이 억압을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자유로운, 너무나 자유로운 그러나 무력한, 너무나 무력한 개인이기를 거부하겠습니다. 전 개인이기보다 '지도'받는 인자가 실상 더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쓰여지지 않은 세계가 너무나 광할합니다. 글로 세계를 인식하기에 앞서, 그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 2007-02-10 00:28
 
기인
울라님/ 저도 그 '휴머니스트적 동질감'이 아니라, 이를 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의 해방 속의 '나'의, '우리'의 해방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는 지점은 저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문제는 '우리'의 해방의 궁극적 길이 아닌, 그 '매개'단계 내지는 방법론이 반성되었는가의 문제라는 것이죠. 울라님과 대화하면서 내 고민이 '형이상학적' 이었는지 자문해보기도 합니다. 문제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라면, 이 지점부터 즉 '어떻게 변혁시킬 것이고' '변혁을 하려면 나의 세계관은 어때야 하는가' 부터 사유해야 되는 것은 아닌지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천의 문제로 돌아오게 되더라도, 실제 (어쨌든) 성공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역사적 반성과 '함께' 우리는 실천의 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고, 그것 자체가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울라님 말씀처럼 이것이 '지도력'을 고민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 고민의 성패여부가 행동의 기준이 되는지가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천적 고민이냐, 형이상학적 고민이냐, 변증법적 사유냐, (소부르주아적) 합리주의적 사유냐를 가르는 것이 그 지점이 되겠지요. 기본적으로 제 입장은, 제 고민 또한 나름의 '실천'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고민'후 '행동'이 아니라, 행동으로서의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외 활동으로는 모 단체의 당비나 또 다른 모 단체의 후원금 정도로 자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결국 우리의 고민이 하나의 '지도력'이 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이 부분을 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 2007-02-10 08:03 수정  삭제
 
기인
사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하지만, 아직 80년 이후의 서구 맑시즘의 기본 문제틀 자체도 따라가기 벅찰지경이라서, 어떻게 하면 적어도 '내'가 확신을 갖고, '우리'로 확장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수준이죠;; - 2007-02-10 08:06 수정  삭제
 
기인
마지막으로 제 생각을 정리하자면, 구조주의적으로 '주체' 물음을 주체를 발생시키는 호명하는 힘의 문제로 변신(?)시키더라도 그 '구조'가 '주체'의 자리를 대체할 뿐이 아닌가하는 문제로 나아가고, 여기서부터 탈구조주의자들에게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할터이지만, 저는 아직 어떠한 확신도 없습니다. 계속 고민을 하면서도 현정세와 '현재'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음은 물론이죠. 힘듭니다. 여기까지 페이퍼에 정리해 놓겠습니다. - 2007-02-10 23:05 수정  삭제

 

어쨌든 정리해 놓습니다. 위 대화에서도 짐작하실 수 있지만, 이제 제 관심은 스탈린입니다. 스탈린! 지젝이 레닌도 좋아하던데, 저는 스탈린을 좋아하던 싫어하던, 도대체 스탈린이란 무엇인지 공부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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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반조 > «어우야담» 번역논쟁을 지켜보며

먼저 한겨레신문 지면과 웹상에서 벌어졌던 «어우야담» 번역논쟁 기사를 연결한다:

이 논쟁의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개인적인 소감을 덧붙히고자 한다. 이 논쟁은 이상수 기자가 최근에 신익철 교수 외 3인이 번역한 유몽인의 «어우야담»(돌베개, 2006년 11월 출간) 서평기사에서 시작되었다. 이상수 기자는 서평에서 «어우야담»을 흥미롭게 소개한 뒤 번역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짤막한 평을 덧붙였다:

옮긴이들은 서로 다른 판본 27종을 견주어 <어우야담>의 원문에 표점과 교감 내용을 덧붙여 별책으로 묶었고, 본문 속에 나오는 동아시아 인물들에 대한 꼬마 사전도 덧붙였다. 독자들은 비로소 우리 고전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 번역을 만난 셈이다. 그러나 번역문 가운데 수장(水漿), 상식(上食), 임모(臨摹) 등 이미 죽은 옛말들을 풀이말도 없이 그대로 드러낸 건 아쉽다. 민간에 발을 깊게 담근 유몽인의 민중지향 정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또 중국을 ‘상국(上國)’이라 쓴다거나 ‘우리나라 말’을 ‘방언(方言)’이라고 옛말 그대로 옮긴 건, 연구자가 현대 한국인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 [서평] 야사와 괴담으로 읽는 조선시대 /이상수

이 평에 대하여 신익철 교수와 출판사측이 서평이 적절하지 않다는 전화·메일을 했고 신익철 교수는 독자의견란을 통하여 짤막한 반론을 개진했다. 이러한 반응에 대하여 이상수 기자는 지면 한계상 서평에서 건드리지 않고 넘어갔던 것을 지적했다. 그는 두 군데의 명백한 오역을 지적하면서 한국학계의 고전 주석의 수준이 아직은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물론 주요 논쟁사항은 “상국”과 “방언”의 번역 관련 문제인데 이 문제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므로 언급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신익철 교수는, 아래의 인용문처럼, 오역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그 오역된 사항을 빌미로 이상수 기자가 과도한 판단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자들의 실수를 인정하면서도 “번역자들이 어떤 <장자> 주석서든 아무 것이나 하나만 뒤적여봤더라도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었음에도 그런 수고조차 게을리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라거나, “아는 것은 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모르는 것은 의미가 통하지 않는 대목 그대로 남겨두는 학자적 양심이 무엇보다 요구된다.”라는 이 기자의 지적에 대해서는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 [재반론] 이상수 기자의 지적에 대한 답변 /신익철

그러면서 신익철 교수는 이 번역본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쳐 탄생하였으며 얼마나 수고를 기울였던 것인가를 주지시키면서 우리나라의 열악한 번역풍토마저 환기시켰다: “이와 함께 대부분의 번역이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에 내맡겨져 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 고전 번역을 체계적으로 점검하며 지원하는 시스템이 미미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주요 고전에 대한 교감을 수반한 수준 높은 번역을 수행하기 힘들게 하며, 우리의 번역 수준을 떨어뜨리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라고 생각한다.”(신익철)

이에 대하여 이상수 기자가 지난 2월 6일 마침내 심중에 품고 있던 칼을 뽑았다. “옛글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것인가” 하는 대단히 깊고 풍요로운 제목의 반론이었다. 그는 “아는 것은 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모르는 것은 의미가 통하지 않는 대목 그대로 남겨두는 학자적 양심이 무엇보다 요구된다”는 자신의 발언에 책임을 지기 위하여 그 발언에 걸맞는 대목들을 지적한 뒤, 인문학자가 갖추어야 할 근본적인 자세를 언급했다. “인문학은 굶어죽을 각오로 하는 학문이다”, “국가 쳐다보지 말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道)가 존중받지 아니한다”는 소제목 아래의 글이 바로 그것이다. 인상적인 대목 몇 군데를 읽어보자:

우선 나는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 국가가 뭘 해주길 바라며 그쪽을 자꾸 쳐다보는 데 대해 좋게 여기지 않는다. 국가가 하는 일은 무엇을 하든 그건 결국 국가의 사업이다. 언제 어느 곳에 존재했던 국가가 진정한 인문 정신의 발양을 위해 투자했던가? 어떤 계몽군주의 위대한 발자취도 결국은 군주와 통치자들의 치적을 위한 사업일 뿐이다.

물론 나는 국가의 예산 가운데 좀더 많은 부분을 인문 분야로 돌리도록 하는 데에는 적극 찬성한다. 그거야 당연히 나쁠 게 없다. 그럼에도 인문학을 한다는 행위는 어떤 상황에서도 국가와 무관하다. 국가가 돈을 주든 말든, 누가 알아주든 말든, 높은 평가를 해주든 말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것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가장 기초적인 태도라고 나는 믿는다. 그게 좋아서 인문학을 하는 게 아닐까. 늙음이 오는 것도 모르는 채. 사실 난 국가가 제대로 된 인문학 연구를 악랄하게 방해하던 시절에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국가가 쓸데없이 나서서 간섭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

나는 굶어죽을 각오로 하는 게 인문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대학에서 오라고 해도 가지 않고 안경알을 가는 걸로 생업을 삼다 폐병 걸려 죽었고, 인문학의 정신과 같은 맥락의 치열한 삶을 살았던 모차르트도 고흐도 살아생전엔 아무런 영화도 누리지 못하고 가난뱅이로 비참하게 죽었다. 그러나 그런 죽음도 작은 일이다.

— 옛글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것인가 /이상수

이상수 기자에게 존경을 표한다. 한겨레신문에 이토록 동양적 깊이를 갖춘 기자가 있다니 놀랍다. 아마 신익철 교수가 반론을 시작하면서 이상수 기자의 학문적 깊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4인의 학자가 6년 간 공들여 번역해낸 노작을 일개 기자가 촌평했다는 사실이 불쾌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기자는 그저 흔한 일개 기자가 아니라 «어우야담»의 번역본을 누구보다도 면밀하고 예리하게 비평할 수 있는 역량의 기자였다. 신익철 교수는 이상수 기자에게 의외의 일격을 당하면서 다음의 말을 했다:

이 기자가 <장자> 인용문 중 오역임을 밝힌 것은 두 대목이다. 177화 ‘한유의 교묘한 글 솜씨’와 231화 ‘정호음과 어숙권의 박식함’ 중 <장자>를 인용한 대목의 해석이 그것인데, 여기에 오역이 있다는 것은 정확한 지적이다. 나는 겸허하게 이 지적을 수용하며 이 기자의 박식함에 감탄하는 바이다.

— [재반론] 이상수 기자의 지적에 대한 답변 /신익철

그러나 나는 그것에 감탄하지 않는다. 그것은 학자의 기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갖고 있지 못한, 글의 폭과 깊이에 맞추어 자신의 모습을 은연히 조금씩 드러내는 이상수 기자의 인간적 깊이에 감탄하는 바이다. 그리고 인문학자의 근본자세에 대한 그의 일갈은 두고두고 음미할 만하다. 아울러 그는 이 논쟁 때문에 혹시 독자들이 번역본의 수준을 오해할까 염려하여 다음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이 신 교수 등 연구자들이 6년 광음(光陰) 피와 땀으로 옮긴 <어우야담>을 한 권 사서 서재에 모셔두길 권유한다. 한국 인문학의 진일보를 위한 발전 기금을 낸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책 디자인도 그지없이 세련됐고 장정도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논한 건 좀더 나은 번역을 위해 함께 고민해보고 싶은 내용을 얘기한 것이다. 독자 제현들의 혜량(惠諒)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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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베토벤집에 불이 났다.

갑자기...홀연이...창졸간에...뜬금없이...베토벤 전집 폭풍이 불었다.엄청난 양에 엄청난 가격이다.

대략 40-60장의 베토벤 CD를 석장 정도 가격에 얻을 수 있다니....길거리에서 파는 리어카표도 아니고 기존의 주요 클래식 레이블의 폭탄공세다.연주자들은 이름없는 야인들이 아니다.클래식 듣는 사람들은 전부 알고 있는 1류 연주가들이다.

도대체 어째 이런일이 생겼을까?

아무래도 CD의 시대를 접고 PC음원으로의 전환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한번 쎄게 팔아보자는게 아닐까 추측해본다.음반 매장에서 선주문 받고 있는데 대략 입고일들은 3-5월이다.관심있으면 미리 주문해야 할 듯


독일 카스카드 레이블는 레코드 총수는 가장 많다.무려 87장 ,가격도 그중에는 비싼편 9만원대다.87장을 9만원이라하는데 비싸다고 하다니 써놓고도 좀 이상하네.거의 모든 베토벤의 곡,베토벤의 600여곡이 수록된다.헬무트릴링,미하엘 길렌 등 베토벤의 본거지 독일을 중심으로 연주단체들이 구성된다.대략 4월쯤 수입예정이다.

대표적인 메이저 클래식 EMI에서도 50장 짜리 콜렉션을 내놓았다.이건 3월쯤 입고예정이고 가격은 CD3장 가격.대략 6만원 안팎일 듯하다.(근데 이건 4장 가격에 가깝다)

음원들은 과거 EMI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음원들이다.

 클뤼탕스,오이스트라흐,바렌보임,리히터 등이 포진해 있다.이미 명반으로 소문이 나있는 음원들도 다수 포함된 듯 하다.

EMI시리즈는 모차르트,슈베르트도 이 시리즈로 내 놓았다.

 

 

 소니 BMG에서는 60장으로 콜렉션을 만들었다.가격은 6만원대.EMI보다 10장 많다.EMI보다 녹음은 최근 음원이 많고 지명도는 조금 낮은 연주자들이다.그러나 이건 상대적인 것 뿐이다.현역들의 음원이 많다는 장점이 있다.

선수들 볼까...상대적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이걸 낮은 지명도라고 이야기하니 참 어색하다.

안너빌스마,요요마,데이빗 진먼,쿠르트마주어.....

결국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내 판단 기준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베토벤 음반과 겹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뭐 이런 정도의 생각이다.

아무거나 택해도 억울한 건 없을 듯 하다.^^ ....솔직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그냥 사라 !! 클래식을 잘 안듣는 사람도 몇 장은 꺼내서 들어볼 때고 그리고 장식해놓아도 3장 가격 이상의 데코레이이션 효과가 있다.클래식 자주 듣는 사람은.. 이거 언제 다 듣나나 고민하면 된다.

^^...그러고 보니 베토벤 사진이 전부 똑같네.비극적 영웅을 닮은 베토벤.낭만적 영웅 신화로 태어난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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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성조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 8.15에서 5.18까지
박태균 지음 / 창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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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내게 다가왔다.

흑백 TV 앞에 앉아 있던 나는 실내 안테나를 이리 저리 돌렸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던 주사선을 줄여야 했다.토요일 오전,10시. TV에서 애국가가 끝나면 나는 미국으로 초대되었다.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미국 만화들.한국 TV가 주말의 웃음을 제조하기 위해 숨고르기에 들어가는 시간,AFKN은 심심해할 미 8군 아이들과 한국 아이들을 위해 만화를 융단폭격했다.영어를 알아 듣지 못한 것은 답답했지만 그다지 큰 장애는 아니었다.미국 만화가 끝나고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나올 때 까지 TV를 붙들고 있었다.나는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듣기 좋았다.축축 처지는 애국가보다 행진곡 풍의 멜로디가 흥겨웠고 노래 아래 깔린 그림들은 더욱 멋졌다.미국 독립전쟁 그림,탱크와 비행기의 행진 장면,자유의 여신상,러시모아 국립공원의 큰 바위 대통령얼굴,달에 착륙한 암스트롱....  나중에는 피아노 건반으로 그 멜로디를 누를 수도 있었다. "솔미도미 솔 도.. "

<우방과 제국,한미관계의 두 신화>를 읽다가 처음 떠올랐던 것이 내가 미국과 처음 만난 기억이었다.<한국전쟁>에서 대중적이며 균형감 있는 역사서를 선보였던 박태균 교수의 책이다.이 책의 제목은 저자가 한미 관계사를 바라보는 지향점을 명백히 보여준다.우리 사회는 미국을 둘러싼 두 가지 '신화'가 있다.하나는 미국을 동맹을 넘어 '혈맹'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며 다른 하나는 미국을 '제국주의 식민 모국'으로 보는 신화이다.전자는 수구보수 세력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가치이다.후자는 80년대 사회구성체논쟁에서도 시각차가 존재했을 정도로 주요주제였으나 지금은 그런 식의 도그마화된 규정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물론 아직도 실제로 그렇게 믿지도 그렇게 분석하지도 않으면서 '미제'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그저 레토닉이나 배설의 언표 정도로 받아 들이는 편이다.

저자는 한미 관계를 '동태적'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미국의 세계 전략이라는 작용과 한국의 대응이라는 반작용의 틀 속에서 한미관계를 보고 있다.박태균 교수는 한미 관계가 정상적인 두 국가 사이의 외교 관계를 넘는 '특수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이러한 '비정상성'의 외부적 요인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세계전략을 한반도에 강요한 것이 첫번째 원인이다.내부적으로는 역대 정권의 '비정통성'을 들고 있다.정권의 창출의 정통성 부재와 정권 내부의 불안정성을 외부의 힘에 의존해서 풀어나가는 방식들이 한미관계의 특수성을 만들어 내게 된 조건이 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는 한미관계를 몇 가지 모델로 설명한다.먼저 미군정시기의 한미 관계는 제국과 식민지 관계로 규정한다.미 군정기는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면 처음으로 만나는 시기이다.내가 대학들어가서 현대사를 공부하며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부분이 미군정기부터 한국전쟁 까지의 시기였다.특히 모스크바 3상회의와 신탁통치안에 대한 이야기는 고등학교 때 배웠던 것과 너무 달라서 충격적이었다.고등학교때는 '민족주의자들은 반탁,소련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은 찬탁' 으로 배웠다.물론 이말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모스크바 3상회의의 전체적 견해와 신탁통치안의 현실성에 대해 일방적으로 앞뒤 꼬리떼어낸 것이었다.당시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특종했다.그리고 한국 언론사에 길이 빛날 왜곡보도를 한다.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미국은 즉시 독립주장,소련의 구실ㄹ은 38선 분할점령'이라고 기사를 작성한다.이어서 12월 28일 조선일보는 박스기사를 통해 '독립전쟁을 시작하자'라고 선동한다.

<우방과 제국>도 모스크바 3상회담과 신탁통치에 대한 이야기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남한 내에서 좌익과 중도세력이 우의를 점한 상태에서 미국은 신탁통치에 긍정적이었다.우선 한국인의 자치 능력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또한 중국 국민당이 우세한 45년 상황에서 미소영중이 신탁통치를 하면 자유주의 세력이 숫자적 우위를 구성하고 한반도 내에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었다.미국은 남한 사회내에서 우익 세력을 양성하고 좌익 세력에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다.문제는 김구를 필두로 한 우익세력이 미국의 신탁 통치에 적극 반대를 하고 나선 것이다.한국 내 보수세력 강화를 위해 뒤늦게 귀국시킨 임정이 중심에 있었다.미국 입장에서는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힘을 실어야 하는 우익에서 미국의 전략에 반대하고 나섰기때문이다.결과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는 성과를 얻기 힘들었으며 남북이 각각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박태균 교수는 이 사건을 미군정이 한반도내의 내부적 정치 역동성에 전략을 바꾸게 된 첫번째 사안으로 꼽고 있다.

모스크바 3상회의를 필두로 한미 관계는 끊임없이 갈등한다.미국의 대외전략이 케넌의 '봉쇄정책'과 이후 니츠의 '전방위적 봉쇄정책' 등에 따라 수시로 발생한다.미국의 기본적 전략은 일본을 지키기 위한 한반도 개입이었다.미국은 소련의 핵실험 성공과 중국 공산화를 견제하는 교두보로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미국은 50년대 이승만의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과 북진정책에 이승만 제거 계획까지 고려한다.아이젠 하워의 정전 협정 조기추진론에 지속적으로 반대되는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4.19 당시 미국의 관망은 미국의 한반도 내에서의 기본 입장을 보여준다.즉 미국은 제 3세계 정책을 펼때 민주주의와 반공독재 사이에서 고민한다.미국은 이 두마리 토끼를 쫓지만 국민들의 반대로 더이상 독재정부가 버틸 수 없다는 판단이 들때 미국은 민주주의의 손을 들어주게 되지만 그 전까지 한국의 독재체제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유지된다.

60년대 미국의 대외정책은 로스토우에 빚지고 있다.근대화론으로 대표되는 로스토우의 논리는 경제성장을 통해 체제 우위를 점한다는 것이다.이를 위해서는 민주주의도 양보될 수 있다고 본다.특히 로스토우의 논리중 관심이 가는 부분은 저개발국가에서 과도기적 단계를 효율적으로 거치기 위해 군대를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보았다는 것이다.마치 5.16 군사 쿠데타를 예견하는 듯 보이는 이론이다.

이 책에 나오는 5.16 군사 쿠데타 부분은 마치 정치 드라마를 보는 듯 흥미 진지하다.쿠데타를 제압하겠다는 유엔군 사령관과 미국 대사,'올것이 왔다'이를 계기로 정계 개편을 꿈꾸는 윤보선 대통령,쿠데타 상황에 대처해야함에도 숨어버린 장면 총리, 윤보선을 권좌에 계속 두면서 쿠데타정권의 도덕적 정당성문제를 넘어가려한 미 국무부.박태균 교수는 3,500명으로 성공한 쿠데타의 뒤에 미국의 역할보다 한국 정치인들의 무능이 있다고 지적한다.

60년대 중반이후  한미관계의 중심은 '베트남전 파병'이었다.60년대초 권력 기반이 아직 불안했던 박정희는 쿠데타 주체세력과 미국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절대권력의 위치에 오른다.박정희는 전세계 여론과 무관하게 베트남에 전투병 파병을 시작하면서 미국과 특별한 관계임을 부각시키고자 한다.박정희가 전투병 파병을 강행하게 된 이유를 몇 가지 정리하면 첫째 한일협정 체결로 인한 국내여론 악화의 돌파구였다는 점,둘째 64년 주한미군과 한국군 감축계획에 대한 반대,셋째 베트남 특수를 통한 경제활성화 등이다.한일협정을 계기로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역할론이 어느정도 현실화되고 있다고 본 미국은 주한미군과 한국군 감축을 주도한다.이승만이 동남아시아 파병론을 내세웠듯이 박정희도 베트남 전투병파병론으로 이 상황을 돌파하려한다.미국은 베트남전이 장기화되어가면서 국내여론과 재정압박에 고민하게 된다.결국 한국군을 이용하는 것이 비용면에서도 또 아시아국가의 참여라는 홍보용으로도 적당했다고 본 것이다.미국은 기본적 한국군 파병에 대한 비용을 감당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런데 박정희는 이것을 주도권 확보로 보고 미국의 마지노선을 넘는 무리한 요구를 시작한다.요즘말로 하면 오바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68년 1.21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은 한미관계를 급격히 냉각시켰다.영화 <실미도>가 그 당시 박정권 내부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박정희는 대북 보복공격에 대해 고려한다.또한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해결을 위한 미북간 비밀협상에 배제된 것에 분노를 표한다.멀리는 베트남의 늪에 빠져있고 가까이는 선원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미국으로서는 곤란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한국이 베트남을 빌미로 '벼랑끝 전술'을 쓰고 있다고 파악한 미국은 '너희들이 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겠다면 우리도 남한에서 미군을 빼내겠다.'라는 상황까지 이르게된다.당시 미국은 북한을 통제하는 것보다 남한을 통제하는데 훨씬 많은 공을 들인 형태가 되었다.박태균 교수는 파병문제에 있어서도 우리정부의 전략이 오판이었음을 지적한다.

70년대 닉슨독트린과 지미 카터의 데탕트 시대에도 미군 철수론이 등장한다.박정희는 또 한번 벼랑끝 전설울 쓴다.핵을 보유하겠다고 선언하고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맛이 간 민족주의자들은 이 시점을 한국의 위상을 당당히 보인 것이라고 아직도 그리워한다.한때 신문광고 해대던 <무궁화꽃>인지 뭔지도 그런 내용아닌가 싶다.최근에 북핵이 문제되니까 김정일을 감금하고 밥‚–기는 소설도 하나›㎢?광고한다.소련과 군축도 논의대고 개입전략보다는 현상유지전략을 택한 미국이 이걸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그러고 보니 30년정도의 시차를 두고 미국은 남한핵문제와 북한핵문제를 다루고 있다.핵을 둘러싼 아이러니다.

<우방과 제국>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점은 한미관계사를 신화의 틀에서 보지말고 '동태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또한 수구언론이 즐겨쓰는 '한미동맹강화'라는 것이 지난 역사에서 그렇게 순탄치 않았음을 그리고 또 보편적인 상황이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다.한미관계는 출렁이는 바다처럼 단 한번도 평온했던 적이없다.그럼에도 마치 한미관계를 평화롭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과제인양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저자는 한미관계의 갈등원인이 미국측에 있음을 우선 밝힌다.무리한 세계전략을 추진하는 제국이 가진 한계이다.또한 한국정부의 부적절한 대응도 지적된다.일부에서 이 부적절한 대응을 '민족주의'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에 반대한다.결코 민족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된 적은 없다는 것이다.그 때 그 때 정권차원의 안보가 중심이었던 것일뿐이다.마지막으로 한국민들 사이에 미국에 대한 신화가 지적된다.한국 사회의구성원들은 한국과 미국 사이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당연히 받아들인다.거기에는 '사회진화론'이 자리잡고 있다.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우리가 이라크에 젊은 이들을 보낼때도 파병론자들의 논리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이 그것이었다.파병에서 어떤 특수를 얻을 수 있을까? 못해도 미국과의 관계가 좋아질 테니 떡고물은 있겠지? 그걸 현실론으로 받아들이고 그 토대 위에 논리의 탑을 쌓는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봐왔다.그리고 그 논리의 현실적 이득과 그 논리의 기계적인 정합성에 높은 가치를 두는 경우도 많이 봐왔다.어떤 이득이고 어떤 평화이고 어떤 국가인지가 중요한 것 아닌가? 논리의 토대가 인류애와 평화에 있지 않다면 그 많은 삼단논법과 통계수치,미래 예측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스스로 억압하는 또는 억압받는 민중임을 알고 그 땅 위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걸 잊고 멋진 이론과 논리와 통계로 무장한 자신을 엘리트라고 착각하지 말아야한다.

<우방과 제국,한미 관계의 두 신화>는 정치외교 영역에서 한국에 늘 존재하는 미국을 보여준다.이것과 함께 우리의 일상성 속에 우리의 문화 속에 ..유행하는 말로 우리의 '아비투스'속에 존재하는 미국은 또 어떤 것인지 고민해보게된다.

P.S) 이 책은 대중적 역사서를 지향한다.약간의 관심만 있다면 아주 빠른 속도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마치 <제3공화국><제5공화국>하는 정치 드라마를 보는 듯 흥미진진하다.책에는 8.15부터 5.18까지 한미관계사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80년대 부분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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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주마"관"산으로 뒤적이기 (70) : 유영모와 태권브이

어쩌면 내가 다석에 대해 실망하게 된 것은 그만큼 큰 기대를 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기대한 만큼은 물론이고 실망할 만큼도 숙독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는데, 어쩌면 다석의 "진미"를 알기도 전에 내 관심사가 아예 그쪽에서 멀어진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긴 이제 와서 다석이면 어떻고 일석이면 어떻겠는가. 내게는 별로 상관 없는 이야기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문득 책장에 있는 <다석 유영모 어록>을 꺼내 뒤적뒤적하다가 다음과 같은 대목을 발견했다.

  • 나는 예수, 석가를 좋아하고 톨스토이, 간디를 좋아한다. 그런데 예수를 좋아하다 보니 예수의 이름에서 이러한 생각을 얻었다. 예수의 '예'는 여이가 합하여 예가 되었다. 예는 곧 여기다. '수'는 재주의 능력이다. 할 수 있느냐의 수가 바로 능력이나 재주를 말한다. 여기의 이 재주와 능력이 예수다. 나의 매 손가락에 위로부터 내려오는 재주와 능력이 있다. 위로부터 한량없이 내리는 수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이어진다. 하느님께서 손수 내리는 그 힘이 지금도 자꾸자꾸 내린다. 한없는 능력이 이 손끝에 내리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사람의 손은 하느님이 잡고 쓰시는 붓이다. 이어이어 내려진 그 능력이 예수와 나를 이어지게 한지도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절대자에게 이어져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모양은 같다고 생각된다. (143쪽)

근데 솔직히 "예수"라는 이름을 "여기의 이 재주와 능력"이라고 해석한 것은 나름대로 흥미로운 언어유희일지는 몰라도, 원래 "예수"라는 이름이 바로 그런 맥락에서 해석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결국 이는 다석 개인의 자의적인 해석이요, 달리 말하자면 억측일 수밖에 없다. 나로선 이 대목을 접하는 순간, 이전부터 일종의 "다석 르네상스" 현상을 지켜보면서 품었던 의구심이 한층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즉 지금이야 너도나도 "독창적인 우리말 사상가"니 "시대를 앞선 인물"로 추앙하는 다석의 사상에 대한 평가는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는 의구심이었다. 물론 다석이 특이한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그의 시대에나 지금 시대에나 그와 같이 살다 간 사람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이 독특하고 그의 인격이 고매했다고 해서, 그의 사상조차 대단한 것으로 한꺼번에 추켜세워지는 것에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이른바 "다석 르네상스"에는 다석이란 인물의 "삶"과 "사상"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신비화와, 또한 이른바 "(남들 앞에 내세울 만한) 우리 것"을 찾고자 하는 앞뒤가 전도된 열성이 없지 않음을 지적하고픈 것이다.

오해의 여지가 없지 않겠지만, 나로선 다석이 과연 "보편적인 사상가"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 "칸트나 헤겔" 급의 사상가가 될 수 있느냐는 거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다석을 잘 모르는 것만큼이나 칸트나 헤겔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리고 굳이 칸트와 헤겔을 들먹인 것은 이들이야말로 오늘날 "보편적인 사상가"의 대표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감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들먹일 수 없었던 고충을 이해하시라.) 물론 한국인인 우리가 보기에 칸트와 헤겔의 사상이 "보편성"을 띠게 된 데에는 이른바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두 사람의 사상이 어떤 "외적 요소"에 의해 그토록 각광받았던 것이라면, 과연 지금과 같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가? 철학사를 뒤져 보면 칸트와 헤겔 사이에도 당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그리고 중요하게 평가되었던 사상가는 얼마든지 있었다. 어쩌면 칸트와 헤겔 역시 그런 숱한 사상가들 가운데 한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은 "보편적 사상가"가 되었고, 나머지는 한때의 유행으로 잊혀져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단순히 어떤 철학 "외적 요소", 그러니까 요즘 하는 말로 서구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이라든지,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라든지, 또는 (헤겔의 경우) 마르크스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소산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 것인가?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만약 두 사람의 사상에 있어 어떤 "보편적 관심"을 일깨워주는 요소가 없었더라면, 이들의 사상 역시 일회적이고 당대적인 것으로 끝나버렸을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사상이 처음부터 끝까지 "옳은 소리"만 들어차 있는 것은 아니었고, 분명히 시대적이거나 개인적인 한계도 지닌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두 사람의 사상이 다른 시대, 또는 사상에 비해 뭔가 탁월한 면을 지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다석은 어떨까? 다석은 흔히 종교사상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교와 불교의 배경 안에서 외래사상인 기독교를 "끌어안은" 인물로 묘사된다. 좋게 말하자면 "한국식 통합"이고, 노골적을 말하자면 결국 "짬뽕"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하긴 모든 사상이 "짬뽕"이고 "잡탕"인 것은 사실이지만, 다석의 경우에는 특별히 어떤 체계나 주저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다. 물론 칸트와 헤겔의 시대 이후에 어떤 "거대 체계"를 구축하려는 것은 바람직하기는커녕 도리어 무의미하고 "헛점만 만들어내는" 시도로 여겨진 감도 없지 않고, 또 한편으로는 비트겐슈타인처럼 생전에 짧은 논문 하나만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수많은 해석자들이 자처하고 나서면서까지 "무체계의 체계"를 수립해 주는 호사를 누리게 된 것도 사실이다.(즉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은 꿈이고 해몽은 해몽, 결코 "해몽"이 "꿈"을 대체할 수는 없는 법이다. 모든 해석은 오독과 오해의 여지를 남기며, 그렇기 때문에 다석의 경우처럼 주저나 주장이 선뜻 손에 잡히지 않는 사상가의 경우에는 "원문"을 대하기보다는 "해석"에 더욱 의존하게 되는데, 그런 까닭에 해석자에 따라, 그리고 해석자의 의도에 따라 그 해석도 천차만별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다석의 생애에 대해, 그리고 다석의 사상에 대해 나온 책들(특히 다석의 수제자인 박영호의 저서)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다석의 "탁월성"이 일종의 "비교우위"에 근거한 것임을 알게 된다. 즉 다석의 위대함은 매번 "예수, 석가, 톨스토이와 간디"의 사상과 비교되어서만 드러날 수 있는 듯 보이는 것이다. 이는 내 오해일 수도 있지만, 솔직히 박영호의 논법이 "다석은 이런 말을 했는데, 이는 예수의 저런 말을 연상시킨다"거나 "다석은 이런 주장을 펼쳤는데, 이는 톨스토이의 저런 주장과 상통한다"는 식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결국 다석이 "예수나 톨스토이"를 숙독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모를까, 다석이 그 두 사람에 필적할 만한 사상을 실제로 지녔는지 여부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있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석이 지금처럼 "대중화" 되어버린 풍조가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딱하기도 하다. 생전에 김교신이 다석을 가리켜 "놀라운 생각을 지니고 있으면서, 어째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펼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하던 것이며, 다석 스스로가 김교신에게 "내 생각은 워낙 비정통적인 것이어서, 보통 사람은 받아들이기가 힘들 것"이라고 운을 띄웠던 것 역시, 다석에 관한 "신화"를 한층 두텁게 만들어주기는 할지 몰라도 오늘날 다석에 대한 갖가지 오해나 오독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여겨져선 안 될 것이다. 또한 다석은 근본적으로 "기독교" 사상가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가 유교와 불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기독교를 "우리것으로 만들었다"는 호의적인 평가를 받을런지는 몰라도, 그의 "신학"(물론 이런 명칭을 부여할 수 있다면)은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것이었고, 차라리 일종의 신비주의자나 영성가로라면 몰라도,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칸트나 헤겔의 "보편적 사상"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물론 칸트나 헤겔 역시 기독교에 관한 논저를 남기기도 했지만, 오늘날 이들의 사상이 "보편적 관심사"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그와는 좀 더 다른 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다석"인가? 나는 혹시나 그것이 뭔가 "있어 보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즉 다석은 <다석일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네 권(거의 한 권이 무슨 국어대사전 만한)짜리 개인기록을 남겼는데, 이 대부분은 다석 특유의 언어나 사고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로선 도무지 읽어내기조차 힘들 정도로 "난해"하다. 어쩌면 다석이 일종의 "숨은 광맥"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그 난해함, 또는 접근의 어려움에도 일말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즉 모르니까 신기한 것이고, 모르니까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이고, 몰라서 아직 연구가 안 되었으니까 지금부터 연구하면 뭐라도 나올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석이 오늘날 각광받는 한국 사상가로 떠오른 것은 신학 전공자이고 하이데거 전공자인 철학교수 이기상이 토로한 것처럼 "이 땅에서 우리 문제로 고민한 한국의 사상가는 없는가?" 하는 의문 때문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감히 지식인이라 말하기 뻘줌한 나 역시 비슷한 경로를 걸었으니) 서양사상으로 시작해 동양사상, 그리고 결국 한국사상으로 선회하는 과정을 겪게 마련인데, 이는 오늘날의 서구화된 교육제도나 문화, 또는 사회풍조 속에서는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 선회의 동기에 대해서도 일종의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현상이다. 쉽게 말해 "서양사상을 파고들어가다 보니 한계가 느껴지더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 또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 물론 우리 사상을 탐구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을 모조리 "전향자"나 "지적 속물"로 몰아버리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양 사람들 앞에서 '우리 것'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처해 하다가 결국 '우리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고백은 철학자 이기상의 것이건 가수 김수철의 것이건, 어딘가 구차한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남들의 눈이 없었다면, 또는 "남들 앞에 우리 것을 들고 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었다면 이들의 지적, 또는 음악적 경로는 지금과 또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기상이 다석을 들고, 또는 김수철이 국악을 들고 국제 무대에 진출하는 것은 바람직까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좋은 일일런지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굳이 다석이나 국악 말고 이기상이 뛰어난 하이데거 해석자로, 그리고 김수철이 뛰어난 록 기타리스트로 국제 무대에 진출하는 것 역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두 사람의 의도를 오해하고픈 생각은 없다. 다만 우리가 종종 그처럼 "남에게 뭔가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계기로 인해 "우리 것"에 새삼 눈을 뜨는 일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말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급조된 전통이나 급조된 "자랑거리"를 내세울 때도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며, 때로는 "초라한" 것을 초라한 그대로 내밀어보기보다는 오히려 "뭔가 있어 보이게" 과대포장까지도 서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왕 "하려면" 좀 더 "제대로" 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만화영화 <로봇 태권 브이>가 복원되어 극장에 걸린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실제로 관객이 많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로선 솔직히 이 뜬금없는 "복원" 소식을 듣고 좀 당황스러웠다. 어째서 지금 갑자기 <태권 브이>일까? 나 역시 어린 시절 그 만화영화를 본 기억이 어렴풋이나마 나는데, 그때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다지 "걸작"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태권 브이>를 일종의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많이 들어간 걸작"으로 치켜세우는 주장도 없지 않은 모양인데, 솔직히 그건 좀 아니라고 본다. 물론 "태권"이란 이름이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만화가 일본 만화, 특히 <마징가 제트> 류의 거대 로봇물과 완전 독립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물론 나름대로의 개성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만화의 직접적 영향하에서의 부분적인 개성일 뿐이지, 거기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큰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로선 차라리 <태권 브이>를 전후해서 나온 또 하나의 "걸작" 애니메이션(물론 이에 대한 평가는 또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인 <호피와 차돌바위>와, 현재는 필름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그 전편 <홍길동>이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는 더욱 큰 의의를 지니지 않았나 생각한다.(이 두 편은, 역시 어려서 이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는 윤석화에 의해 <돌아온 영웅 홍길동>인가로 리메이크 되었는데, 이 역시 원작들과는 달리 당시 국내에서 기세를 떨치던 일본만화의 영향을 떨치지 못하고 "홍길동이 아니라 드래곤볼이더라"는 비아냥을 얻으며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그리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 것으로 안다.) 뭐, 까놓고 말하자면 지금 와서 <로봇 태권 브이>에 열광하는 (열광하긴 하는지 모르겠지만) 풍조에는 이른바 애니메이션 산업이나 만화 산업이 일종의 미래형 고부가가치 콘텐츠 산업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일종의 "법통 만들기"나 "역사 만들기"의 의도가 은근히 엿보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굳이 한국 애니메이션, 또는 "한국 로봇 애니메이션"의 계보를 작성하는 것은 모든 계보 만들기가 그렇듯이 현재를 정당화하고, 현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태권 브이>를 만들어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영웅으로 추앙되는 김청기 감독의 이후 작품 가운데, 일본 애니메이션의 노골적인 "베껴먹기"(대표적인 것이 <마크로스>에 나온 로봇-전투기가 <스페이스 간담 브이>란 제목으로 애니메이션 화 된 것을 들 수 있겠다)가 존재한다는 것 역시 우리의 "자랑스러운" 계보 가운데 포함시켜야 할 것인가? 이왕 <태권 브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어쩌면 이 부분에 대해서도 어디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지켜볼 만 하겠다.

결국 다석이건 태권브이건, 굳이 "우리 것"으로 의미부여를 하려면 못 할 것은 없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아주 설득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는 게 문제인 거다. 이른바 "블록버스터"에 대해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사실 초라하고 구차한 이야기일 수 있다.(이는 "느와르"와 "홍콩 느와르", 또는 "웨스턴"과 "마카로니 웨스턴"하고는 또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뭔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다기보다는 할리우드의 "물량공세"를 겉핥기 식으로 흉내내는 "한국형 물량공세"인 셈이니까.) 남들 앞에 뭔가 내세우기 위해 굳이 우리 것을 찾아야 할 때, 그리고 원래의 문맥과는 무관하게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 때, 나는 문득 예전에 24시간 편의점이 건물마다 들어서며 크게 유행할 때에 있었던 한 가지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여기저기서 24시간 내내 불을 밝혀 놓은 LG25시니, 패밀리마트니, 바이더웨이니 하는 편의점들이 문을 열자, 우리 동네의 어느 구멍가게도 이른바 "한국형 편의점 사이클론"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그런데 여기서의 핵심은 바로 그 "한국형"이라는 데에 있었다. 즉 그 "한국형 편의점"은 밤 12시가 되면 셔터를 내렸던 것이다. 내가 지금 다석과 태권브이를 바라보며 그 일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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