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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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처음 출간된 책이 근 20년만에 갑자기 인터넷 서점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2007년 10월, 이 책의 저자, 레싱이 노벨문학상을 탔기 때문이다. 올해 88세의 영국여성인 레싱은 노벨상 수상의 변을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그들(노벨 평가위원회)은 언젠가 그 여자(레싱 자신)에게 상을 줘야 할텐데 하면서 걱정했을 거예요. 난 이미 유럽에서 많은 상을 받았어요.'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을 거친 페미니즘의 기수이기도 한 그녀의 대단한 자신감이다.

난 운이 좋게도, 왜 운이 좋은 건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그녀가 노벨상을 타기 일이주 전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알라딘의 편집자추천을 극진히 신뢰하는 나의 취향과 이 책의 가격이 딱 맞아 떨어진 우연한 행운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 책은 가족소설, 공포소설, 사회소설 등 어느 것으로 분류하기 애매하지만, 재미있다. 한 번 잡으면 놓을 수 없고, 다 읽고 나면 뭔가를 더 갈구하게 된다. 난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찾았다. 왠지 영화로 만들어져 있을 것만 같았고, 영상 속에서 다섯째 아이, 벤을 꼭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기대는 무너졌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는 이 책이 영화화되면 좋겠다는 나의 동지들을 여럿 목격할 수 있었다.

난 이 책의 심오한 의미나 사회적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공포소설로 분류하고 싶다. 이 책에는 귀신이나 유령도, 피 튀기는 칼부림도 없다. 괴물도 없고, 총격전도 없다. 그런데 무섭다. 온몸에 쏴하고 소름이 돋도록 섬뜩하다. 이것은 정말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공포였다. (정말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공포를 영상으로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감독이 몇이나 될지 의심되지만...)

1차적이고 표면적인 공포의 대상은 단연 다섯째 아이, 벤이다. 기형의 몸에, 감정없는 눈과 엄청난 괴력을 소유한 불행의 씨앗. 하지만 학교의 선생님들의 눈에는 다소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 정도로 보일만큼 정상이다. 이 정상과 비정상의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는 벤에게서 우리는 연민과 공포를 함께 느낀다. 마치 각설탕과 쓰디쓴 알약을 한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 진짜 공포는 그의 옆에 있는 정상인 가족들이다. 어렵게 만들어온 대가족의 행복 전체를 위협하고 파괴했던 그 악마를 그가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였을지도 모르는 지옥에서 다시 가족의 품으로 데려오는 모성애가 무섭다. 성한 나머지 네 손가락(정상의 네 아이들)을 위해 기형의 새끼 손가락(다섯째 아이)을 과감히 깨물어 잘라내어 버리는 아버지의 냉정함이 무섭다. 잘려진 손가락을 어딘가 묻어버리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지독한 환경변화에 적응하고, 대피하는 네 아이들의 결코 어리지 않은 생각들이 섬뜩하다.

레싱은 우리가 따뜻한 사랑의 울타리로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가족이라는 허울을 새로운 느낌의 공포로 대체했다. 어쩌면 기형아 낙태가 만연하는 우리 사회는 이미 그런 공포를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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