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스포일러 있습니다)
읽은지 1년은 되는 것 같은데 이제야 감상을 쓴다. 좋은 책은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것 같다.
어렸을 때 '콘티키호의 모험'이라는 책을 읽었다. 뗏목으로 남태평양을 건넌 이야기인데, 바다의 갖가지 모습과 아름다움이며 가혹함 등이 참 인상적이어서 몇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다.
'파이 이야기'는 태평양을 건너던 배가 침몰하여 유일한 생존자인 소년과 호랑이가 함께 227일 동안 바다를 표류하는 이야기이다. 227일이면 7개월이 좀 넘는다. 그 동안 변변한 식량도 도구도 없이 바다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것도 무서운 호랑이와 함께.
어릴 적 읽은 콘티키호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나는 이 책 역시 그런 바다표류기와 서바이벌에 대한 감동적인 인간승리 드라마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때문에 마지막까지 읽었을 때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여태까지 봤던 영화와 책을 통털어 제일 충격적인 반전이었다.
227일 동안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함께 바다를 표류하며 온갖 고생을 겪은 끝에 결국 육지에 도착하여 살아남은 파이. 파이와 부모님이 타고 있던 배가 가라앉은 경위를 조사하러 온 일본관료들에게 그가 호랑이와 함께 겪은 일을 얘기해주지만 관료들은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자 파이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배가 가라앉을 때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가 아니며, 사실 파이와 어머니, 요리사, 선원과 함께 구명보트를 타고 살아남았다고. 호랑이나 오랑우탄, 얼룩말 등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살아남은 네사람은 보트에서 구조를 기다리며 표류하지만 결국 식량도 떨어지고 마지막엔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었으며 최후의 생존자로 파이만이 남았다는 끔찍한 이야기다.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어느 쪽이 더 나은가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요,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요?"
오카모토 : "그거 흥미로운 질문이군요..."
치바 :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요."
오카모토 : "그래, 동물이 나오는 쪽이 더 나은 이야기 같아요."
파이 파텔 : "고맙습니다. 신에게도 그러길."
(침묵)
치바 : "방금 이 사람이 뭐라고 말한 거예요?"
오카모토 "몰라."
치바 : "아 보세요... 이 사람이 우는데요."
작가인 얀 마텔은 파이의 두 이야기 중에 어떤 것이 진실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인터뷰 등에서도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것이 진짜 이야기인지의 결론은 독자 각각이 내릴 수밖에 없다.
나는 진짜는 동물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한다.
파이가 작가와 인터뷰 도중 과거 사진을 보여주면서 어머니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나, 환상이라고 생각하지만 표류하면서 만난 프랑스인 장님 표류자가 요리사와 비슷한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 마지막에 일본관료들이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가 마음에 든다고 하자 신도 그러길 바란다면서 운 것을 볼 때 두번째 이야기가 사실일 듯하다.
하지만 책의 독자들 중에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가 진짜고, 동물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파이가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왜일까? 그 이유야말로 이 책의 주제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렇게 믿고 싶으니까.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사실 이 책의 대부분은 파이가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동고동락하며 바다를 표류하고 결국은 지혜와 의지로 끝까지 살아남아 구조되는 이야기에 할애하고 있다. 굉장히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그런데 갑자기 끝에서 그것은 다 거짓일 수도 있고 사실은 이런 이야기도 있다며 배의 생존자들이 식인을 하고 파이의 어머니 역시 파이를 지키려다 살해당해 요리사에게 먹힌다는 끔찍하고 잔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것을 믿고 싶겠는가?
동물이 나오지 않는 두번째 이야기가 경직된 사고를 가진 관료들을 비꼬기 위해 지어낸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관료들 역시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를 택했기 때문이다.
일본관료 오카모토의 보고서의 끝엔 '유일한 생존자인 인도인 피신 몰리토 파텔의 사연은 이를 데 없이 힘들고 비극적인 상황에서 용기와 인내를 보여준 놀라운 이야기다. 이 조사관의 경험으로 볼 때, 그의 이야기는 난파선 역사상 어느 사건과도 견줄 수 없다. 파텔만큼 오래 생존한 조난자는 없었다. 더구나 벵골 호랑이와 함께 생존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라고 적혀 있다.
배의 침몰을 조사하러 온 관료들 역시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 쪽을 믿기를 선택한 것이다. 믿음은 그럴 듯한 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들은 결국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들기 때문에 그쪽을 믿은 것이다. 정말로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파이만이 알고 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공식적인 보고서에 이렇게 결론지어짐으로써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가 파이의 진실이 되었다.
파이의 굳건한 신앙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믿음의 중요성과 힘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이 곧 진실이라고.
끔직한 일을 겪고 구조된 후에도 파이는 여전히 신을 믿는다. 가정을 꾸린 그의 집은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힌두교가 모두 섞인 흡사 신전이다. 그는 믿음으로써 신의 존재를 진실로 만든다. 파이에게 신은 질서와 이치, 사랑이기 때문에, 쉽게 이겨낼 수 없는 경험을 한 그는 신을 통해 그 경험을 납득하거나 이해하고, 용서받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