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황진이 1
홍석중 지음 / 대훈닷컴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홍석중의 ‘황진이’를 읽고

 

               누구나 다 아는 황진이, 누구나 다 좋아하는 황진이


 북한작품으로서 최초로 남한에서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은 홍석중의 ‘황진이’이다. 잘 알려진대로 홍석중은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의 손자이다. 황진이에서 홍석중이 보여준 풍부한 어휘나 사람의 감정이나 심리를 잘 표현한 유려한 문체는 당연히 그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홍석중은 이를 부정한다. 자신은 할아버지의 안중에도 들지 못했던 손자라고 하면서, 아버지인 홍기문의 영향은 받았을 수 있다고 말한다. 홍기문은 일제시대에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에서 활동했고,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홍석중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황진이’는 홍명희의 ‘임꺽정’을 빼닮았다. 임꺽정은 불평등한 신분제도에 반감을 품고 조선의 규범을 부정하면서 산적으로 살며 자신의 뜻을 펼치려다 좌절한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황진이도 임꺽정과 다를 바 하나 없다.


 황진이와 임꺽정

 홍석중은 황진이가 자신이 황진사와 종 사이에서 태어난 종의 딸이라는 출생의 비밀을 알면서 양반집 딸의 신분을 버리고 기생이 된다고 묘사한다. 홍석중의 ‘황진이’나 벽초의 ‘임꺽정’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사회적 배경은 조선의 신분제도이다.

 황진이는 비인간적인 신분제를 통해서 당대의 양반이나 종교인들의 ‘거짓과 위선’의 허물을 벗기며 그들을 조롱한다. 황진이가 허위와 위선에 저항하는 근거지는 송도의 기생촌인 ‘청루’이다. 황진이의 기생방은 임꺽정의 활동 근거지인 ‘청석골’과 비교할 수 있다. 황진이는 청루를 근거지로 삼아서 탐관오리들을 혼내주고, 지식인, 종교인, 양반들의 지배층들의 ‘거짓과 위선’을 벗겨낸다. 마치 임꺽정이 청석골을 근거지로 그랬듯이.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우리말의 보물창고라고 한다. 홍석중의 ‘황진이’도 풍부한 어휘나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속담에서 결코 그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임꺽정’에서 조선시대의 사회상이 잘 드러나 있듯이, ‘황진이’에서도 절의 백중행사, 혼례식, 수리날 송도 산대놀이, 장례식, 굿 등  조선시대의 사회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홍석중이 ‘황진이’에서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 ‘놈이’는 임꺽정의 재현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홍석중은 황진이와 ‘놈이’의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거짓과 위선에 물든 양반들의 사랑과 다른 진정한 사랑을 대비시키고 있다. 홍석중이 조선의 계급사회를 풍자하기 위해서는 ‘놈이’라는 인물이 반드시 필요하다. ‘놈이’가 화적패의 우두머리가 되어 산채에서 의협심을 불태운다는 설정은 아무리 보아도 임꺽정을 차용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러니까 해석하자면 홍석중의 ‘황진이’에서 ‘놈이’가 임꺽정을 직접 차용한 인물이고, 황진이는 임꺽정을 변형하고 발전시킨 임꺽정이라고 할 수 있다. 홍석중의 ‘황진이’에서 벽초의 ‘임꺽정’은 황진이와 ‘놈이’로 다시 태어난 것으로 읽힌다.  

 작품으로서 ‘황진이’와 ‘임꺽정’을 비교하는 것이 홍석중에게는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존경하는 할아버지에 자신을 비교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두 작품의 비교가 홍석중에게 결례라고 한다면, 최소한 홍석중과 벽초가 묘사하는 인물로서 황진이와 임꺽정은 시대를 달리하는 이란성 쌍생아 같다는 주장만은 굽히고 싶지 않다. 


 거짓과 위선에 저항

 황진이는 “세상의 가장 큰 불행과 부조리는 정도가 지나치는 데서 오는 것보다도 그 지나친 것을 감추려는 거짓과 위선에서 오는 것이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은 세상을 고고하게 살아가는 신조가 될 수 있다. 필자는 어찌본다면 홍명희가 묘사한 ‘임꺽정’에서 청석골의 화적패 활동이 위기를 겪는 것은 ‘지나침’을 지혜롭게 조절하지 못하는 의욕과잉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지나침’은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황진이는 지나침보다도 거짓과 위선을 불행과 부조리의 근본으로 보고 있다. 홍석중은 ‘황진이’에서 심지어 황진이의 아버지인 황진사와 오빠까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홍석중이 그 풍부하고 질퍽한 어휘로 되살려 놓은 ‘황진이’에서 묘사하고 싶은 핵심이 거짓과 위선에 저항하는 기생 황진이인 것이다. 황진이는 거짓과 위선의 상징으로 성적인 탐욕스러움을 들고 있다. 황진이는 남녀의 성애를 부정하지 않지만, 겉으로는 도도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격조도 없이 욕망의 노예가 되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황진이와 지족선사의 관계도 홍석중은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지족선사는 면벽수도를 하는 도승이 아니라 불교계의 거짓과 위선의 상징일 뿐이다. 황진이가 파계시킨 것은 지속선사의 30년 수도가 아니라 불교계의 거짓인 것이다.


 인생길위에 시를 남기는 사람

 ‘황진이’가 해석하는 ‘새옹지마’(塞翁之馬)도 새롭다. 필자는 새옹지마는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고 그것은 다음에 다가오는 행운의 징조이기 때문에 견디어 내야한다는 역동적인 삶과 희망에 대한 고사성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새옹지마와 ‘전화위복’(轉禍爲福)을 우울하고 고단한 현실에 좌절하지 않는 긍정적인 삶을 위한 지표로 삼았다.

 하지만 황진이가 신분제도의 굴레속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 자신의 꿈을 버리고 기생이 되는 결심을 하는 과정에 배어 있는 아픔은 결코 ‘새옹지마’라는 고사로는 설명이 안된다. 다음에 올 행운으로 현재의 불행을 이길 수 있다면 그 불행은 진짜 불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생이 되는 순간 황진이는 죽었고, 기생 명월로 다시 태어났다. 다음에 어떠한 행운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 행운이 황진이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 황진이의 생각이다. 

 거짓과 위선의 허울을 쓰고 있는 사람들을 한편으로 하고, 새옹지라라는 고사로도 위안할 수 없는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을 한편으로 하는 것이 홍석중이 설정한 ‘황진이’의 기본구도인 것이다. 그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 사이의 사랑 이야기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심장에서 멀어진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진다’는 유행가 가사와 비슷하다. 놈이는 눈에서 멀어져 백리를 떠난다고 해서 심장에 박힌 가시를 뽑지 않으면 그 아픔을 달랠 수 없다고 한다. 심장에 가시가 박힌 아픔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어쩌면 홍석중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황진이는 “먹으로 종이 위에다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자취로 인생길 위에다 시를 남기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아픔을 간직하고 이를 이겨나가는 사람은 인생길에 시를 새기는 사람이다. 황진이는 ‘꿈길’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런 황진이를 상허 이태준은 ‘누구나 다 아는 황진이, 누구나 다 좋아하는 황진이’라고 말했다.


“그리워도 만날 길은/꿈길밖에 없소이다./제가 님을 찾아갈 때/님도 저를 찾으소서/밤마다 오고가는/머나먼 꿈길/한시에 꿈을 꾸어/도중에 만나사이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진이 1
홍석중 지음 / 대훈닷컴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홍석중의 ‘황진이’를 읽고

 

               누구나 다 아는 황진이, 누구나 다 좋아하는 황진이


 북한작품으로서 최초로 남한에서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은 홍석중의 ‘황진이’이다. 잘 알려진대로 홍석중은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의 손자이다. 황진이에서 홍석중이 보여준 풍부한 어휘나 사람의 감정이나 심리를 잘 표현한 유려한 문체는 당연히 그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홍석중은 이를 부정한다. 자신은 할아버지의 안중에도 들지 못했던 손자라고 하면서, 아버지인 홍기문의 영향은 받았을 수 있다고 말한다. 홍기문은 일제시대에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에서 활동했고,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홍석중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황진이’는 홍명희의 ‘임꺽정’을 빼닮았다. 임꺽정은 불평등한 신분제도에 반감을 품고 조선의 규범을 부정하면서 산적으로 살며 자신의 뜻을 펼치려다 좌절한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황진이도 임꺽정과 다를 바 하나 없다.


 황진이와 임꺽정

 홍석중은 황진이가 자신이 황진사와 종 사이에서 태어난 종의 딸이라는 출생의 비밀을 알면서 양반집 딸의 신분을 버리고 기생이 된다고 묘사한다. 홍석중의 ‘황진이’나 벽초의 ‘임꺽정’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사회적 배경은 조선의 신분제도이다.

 황진이는 비인간적인 신분제를 통해서 당대의 양반이나 종교인들의 ‘거짓과 위선’의 허물을 벗기며 그들을 조롱한다. 황진이가 허위와 위선에 저항하는 근거지는 송도의 기생촌인 ‘청루’이다. 황진이의 기생방은 임꺽정의 활동 근거지인 ‘청석골’과 비교할 수 있다. 황진이는 청루를 근거지로 삼아서 탐관오리들을 혼내주고, 지식인, 종교인, 양반들의 지배층들의 ‘거짓과 위선’을 벗겨낸다. 마치 임꺽정이 청석골을 근거지로 그랬듯이.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우리말의 보물창고라고 한다. 홍석중의 ‘황진이’도 풍부한 어휘나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속담에서 결코 그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임꺽정’에서 조선시대의 사회상이 잘 드러나 있듯이, ‘황진이’에서도 절의 백중행사, 혼례식, 수리날 송도 산대놀이, 장례식, 굿 등  조선시대의 사회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홍석중이 ‘황진이’에서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 ‘놈이’는 임꺽정의 재현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홍석중은 황진이와 ‘놈이’의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거짓과 위선에 물든 양반들의 사랑과 다른 진정한 사랑을 대비시키고 있다. 홍석중이 조선의 계급사회를 풍자하기 위해서는 ‘놈이’라는 인물이 반드시 필요하다. ‘놈이’가 화적패의 우두머리가 되어 산채에서 의협심을 불태운다는 설정은 아무리 보아도 임꺽정을 차용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러니까 해석하자면 홍석중의 ‘황진이’에서 ‘놈이’가 임꺽정을 직접 차용한 인물이고, 황진이는 임꺽정을 변형하고 발전시킨 임꺽정이라고 할 수 있다. 홍석중의 ‘황진이’에서 벽초의 ‘임꺽정’은 황진이와 ‘놈이’로 다시 태어난 것으로 읽힌다.  

 작품으로서 ‘황진이’와 ‘임꺽정’을 비교하는 것이 홍석중에게는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존경하는 할아버지에 자신을 비교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두 작품의 비교가 홍석중에게 결례라고 한다면, 최소한 홍석중과 벽초가 묘사하는 인물로서 황진이와 임꺽정은 시대를 달리하는 이란성 쌍생아 같다는 주장만은 굽히고 싶지 않다. 


 거짓과 위선에 저항

 황진이는 “세상의 가장 큰 불행과 부조리는 정도가 지나치는 데서 오는 것보다도 그 지나친 것을 감추려는 거짓과 위선에서 오는 것이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은 세상을 고고하게 살아가는 신조가 될 수 있다. 필자는 어찌본다면 홍명희가 묘사한 ‘임꺽정’에서 청석골의 화적패 활동이 위기를 겪는 것은 ‘지나침’을 지혜롭게 조절하지 못하는 의욕과잉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지나침’은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황진이는 지나침보다도 거짓과 위선을 불행과 부조리의 근본으로 보고 있다. 홍석중은 ‘황진이’에서 심지어 황진이의 아버지인 황진사와 오빠까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홍석중이 그 풍부하고 질퍽한 어휘로 되살려 놓은 ‘황진이’에서 묘사하고 싶은 핵심이 거짓과 위선에 저항하는 기생 황진이인 것이다. 황진이는 거짓과 위선의 상징으로 성적인 탐욕스러움을 들고 있다. 황진이는 남녀의 성애를 부정하지 않지만, 겉으로는 도도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격조도 없이 욕망의 노예가 되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황진이와 지족선사의 관계도 홍석중은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지족선사는 면벽수도를 하는 도승이 아니라 불교계의 거짓과 위선의 상징일 뿐이다. 황진이가 파계시킨 것은 지속선사의 30년 수도가 아니라 불교계의 거짓인 것이다.


 인생길위에 시를 남기는 사람

 ‘황진이’가 해석하는 ‘새옹지마’(塞翁之馬)도 새롭다. 필자는 새옹지마는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고 그것은 다음에 다가오는 행운의 징조이기 때문에 견디어 내야한다는 역동적인 삶과 희망에 대한 고사성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새옹지마와 ‘전화위복’(轉禍爲福)을 우울하고 고단한 현실에 좌절하지 않는 긍정적인 삶을 위한 지표로 삼았다.

 하지만 황진이가 신분제도의 굴레속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 자신의 꿈을 버리고 기생이 되는 결심을 하는 과정에 배어 있는 아픔은 결코 ‘새옹지마’라는 고사로는 설명이 안된다. 다음에 올 행운으로 현재의 불행을 이길 수 있다면 그 불행은 진짜 불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생이 되는 순간 황진이는 죽었고, 기생 명월로 다시 태어났다. 다음에 어떠한 행운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 행운이 황진이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 황진이의 생각이다. 

 거짓과 위선의 허울을 쓰고 있는 사람들을 한편으로 하고, 새옹지라라는 고사로도 위안할 수 없는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을 한편으로 하는 것이 홍석중이 설정한 ‘황진이’의 기본구도인 것이다. 그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 사이의 사랑 이야기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심장에서 멀어진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진다’는 유행가 가사와 비슷하다. 놈이는 눈에서 멀어져 백리를 떠난다고 해서 심장에 박힌 가시를 뽑지 않으면 그 아픔을 달랠 수 없다고 한다. 심장에 가시가 박힌 아픔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어쩌면 홍석중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황진이는 “먹으로 종이 위에다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자취로 인생길 위에다 시를 남기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아픔을 간직하고 이를 이겨나가는 사람은 인생길에 시를 새기는 사람이다. 황진이는 ‘꿈길’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런 황진이를 상허 이태준은 ‘누구나 다 아는 황진이, 누구나 다 좋아하는 황진이’라고 말했다.


“그리워도 만날 길은/꿈길밖에 없소이다./제가 님을 찾아갈 때/님도 저를 찾으소서/밤마다 오고가는/머나먼 꿈길/한시에 꿈을 꾸어/도중에 만나사이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