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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의 인생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나라 요시토모 그림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데이지의 인생'을 만난 건 낯선
도서관에서였다.
일을 보기 위해 갔던 처음 가보는 동네.
시간대가 안 맞아 두세 시간이 텅 빈 시간이 되었다. 그때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눈에 띈 동네 도서관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낯선 공간에서 데이지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이 느껴졌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도는 독립심 강한 데이지. 나는
독립심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마치 그 낯선 도서관에서 낯선 공간과 낯선 마음으로 무언가를 다시 시작해야 했던 데이지의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두려움과
설레임. 그리고 안정되지 않는 마음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데이지라는 인물에 완전
빠져들었다.
'데이지의 인생' 책 속 주인공의 원래
이름은 히나가쿠. 일본말로 데이지가 히나가쿠인 모양이다. 꽃 이름으로 주인공의 이름을 지었던 작가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우리나라에는 데이지로 바뀌어졌다.
데이지는 엄마와 둘이 살다가 교통사고로
혼자가 된다. 이모 부부에게 키워져
그들의 딸로 살아도 되었을 듯 했지만, 데이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응석 부리지 않았다. 스스로 그곳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혼자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단단한 마음. 죽음에 대한 의연한 생각. 그녀의 마음을 채워주었던 달리아의 죽음마저도 스스로를
위로하듯,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듯,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데이지.
따뜻한 문체와 기분 좋은 글귀가 마음을
적시는 바나나의 책이지만, 어느샌가 그 속에 물들어있는 죽음. 나는 항상 책을 읽고 나서 죽음을 읽었다고 느끼기보다 따뜻함을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책의 내용이 생각이 안 날 즈음에도 죽음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대신 따뜻한 책이었지.라고 생각이
들게 된다.
어릴 때 뛰어놀던 숲 속. 땀 냄새 흙냄새. 뛰놀던 숨소리가
떠올랐다. 이제는 만나지 못할
친구였던 아이들. 그들과 어느 장소를
가든 설레었고. 어디든 놀이감이 널려있었다.
나이가 들어 괜찮은 산책길을 걸았던 기억.
뜨거운 여름 햇살과 차가운
아이스크림. 바닥에 지렁이와 벌레를 피하느라 애쓰면서도 초록의 이파리들 속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 마치 아무도 모르는 곳을 찾아낸 보물처럼
느껴졌던 기억. 누군가와 걷는 것이
좋았고. 즐거웠다. 도시 속 새소리는
특별함을 더해주었고, 숲이 전해주는
맑음과 건강함에 물들고 싶었다. 추억은 그렇게 어디든 떠다니고 있었다.
그 시절의 냄새와 촉감까지 기억 날
듯한 그리움이 지금의 나를 기분 좋게 하기도 울먹거리게 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순간순간을
떠올렸다.
* 그러고 보니 웃으면서 밤길을 걸어 돌아올 때, 이렇다 할 일이 없었는데도 나중에 되돌아보면 아주 즐거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 나날도 이제는 끝이다. 헤어질 때가 되면 늘 좋은 일만 많았던 것처럼 느껴진다. 추억은 언제나 특유의 따스한 빛에 싸여 있다. 내가
저세상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이 육체도 저금통장도 아닌 그런 따스한 덩어리뿐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세계가 그런 것들을 몇 백 가지나 껴안은
채 사라진다면 좋겠다. 이런저런 곳에 살면서 쌓인 갖가지 추억의 빛을 나만이 하나로 이을 수 있다. 오직 나만이 만들 수 있는 목걸이다.
-34p
* 한 번이라도 만나면, 그때마다 한 가지 추억이랄까, 공간이 생기잖아. 그것은 언제든 살아 있는 공간이고,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 세상에 절대 없었을 것이기도 하고, 인간이 무에서 만들어 낸 것이니까. 댐이나 로켓 같은 것도 똑같지. 사람과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 데서 창조해 낸 세계잖아. 하늘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이 사고를 빌미로 우리에게서 그를 빼앗아 갈 수는 있어도, 영원히 그 즐거웠던 시간을
빼앗아 갈 수는 없으니까 우리가 이긴 거라고 생각해.-11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