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X - 남자 없는 출생
앤젤라 채드윅 지음, 이수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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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이란, 대체 무엇일까



『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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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조건 없이 자식이란 이유로 무한한 사랑을 주시는 어머니, 내겐 부성보단 모성이 더 직접적으로 와 닿는 게 크다. 때론 부딪힐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어머니의 큰 사랑 덕분에 그나마 사람다운 모양새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로 모성이란 대체 뭘까, 새삼 질문을 던져본다. 생명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비롯된 것일까, 모성이란 본능인 것일까, 여성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하는 것일까.



여기 이 뜻깊은 질문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룬 작품이 있다. 앤젤라 채드윅의『XX』(남자 없는 출생).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여러 유형의 가족 형태가 등장하는데, 어쩌면 무지와 핍박에 감춰져야만 했던 요소들이 이제야 고개를 들게 된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포츠머스대학 난임연구소에서 발표한 난자 대 난자 인공수정 연구에 대한 인터뷰로부터 시작된다. 동물임상실험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고 비로소 인간에게도 직접적인 시술이 이루어질 만한 단계(두 여성의 난자를 채취하고 그중 하나의 난자 핵에서 DNA를 추출한 다음 다른 난자에 주입하여 결합한 세포를 전류로 자극시켜 자연수정과 유사한 작용을 이끌어내는 시술)까지 이르게 되고, 이에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동성 여성 커플들을 임상실험 대상자로 모집하게 된다.



로지와 줄스는 우연스럽게 만나 운명적인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커플이다. 실용주의적인 측면에 뚝심과 인내심으로 무장한 <포스트> 기자 줄스(줄리엣)와 온화하고 맑은 심성을 가진 서점 직원 로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로 만났던 이 둘은 자신도 몰랐던 성정체성을 깨닫고 아름다운 만남을 지속해왔다. 줄스와 함께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자신들의 아이를 키우고 싶은 소망을 가진 로지와 다르게, 줄스는 회의적인 태도만 보였다. 그런데 포츠머스대학의 난난 임신이 가능하다는 발표를 접하자 이내 생각을 전환하게 된다. 사랑하는 로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이에 대한 제안을 하는 줄스, 로지 역시 기뻐하며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빛나는 상상을 더해본다.



여러 커플이 응했지만 최종 두 커플만 임신에 성공하게 되고, 이때부터 줄스의 고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야기는 적정선의 속도로 차분히 진행되지만, 건더더기 없이 팩트만 전달하는 방식으로 몰입감을 더해준다.



언론의 집요한 괴롭힘, 정치판의 쇼, 무지한 연대의 편견과 거짓된 정보를 통한 선동으로 인해 폭력을 배제한 하루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일상이 이어진다. 10년을 넘게 직접 발로 뛰며 느꼈던, 기자로서 언론의 습성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던 줄스는 철저히 무시와 무응답으로 가려 하나, 여론은 사그라들지 않고 파파라치와 실질적인 위협을 가해오는 괴롭힘과 폭력성은 단계를 거치며 점차 심화된다.



처음은 의심과 배신, 그리고 시험으로 이어졌고, 애써 꾹꾹 눌러왔던 고통의 울음이 터지자 분노가 일었다. 그렇게 힘들게 움튼 생명이 로지의 뱃속에서 자라나고 있을 때, 전혀 기쁘지 않고 아이를 갖고자 했던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던 예전으로 돌아가고픈 줄스, 아예 없던 사실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괴물처럼 느껴지고 스스로를 옭아매는 사슬이 된다.



여기서 더 나빠질 게 있을까 싶지만 놀랍게도 파국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가속이 붙어 두 사람의 관계마저 흔들리게 만든다. 읽는 내내 줄스의 인내심에 감탄해 마지않았는데, 예전에 어떤 영화에서 봤던 대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은 그 불행에 있는 걸 더 안정적으로 여긴다는 표현을. 줄스는 계속해서 언론의 관심이 식기만을 기다리지만, 언론이 한 번 잡은 먹잇감을 놓지 않는 법은 없다. 물론 여기서 등장한 ‘언론’이란 진정한 언론이라고 말할 수 없는,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기레기들의 향연이다.



동료와의 관계, 직장생활, 아이에 대한 부담감,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갈등 등등을 비롯한 사람들과 연관된 모든 문제들은 하나같이 더 나빠질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 든다. 등장인물에 이입하여 읽는 독자라면 현실감 넘치는 서사 진행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에 답답해질지도 모른다.



자연에서 비롯된 습성을 인위적으로 변화하면 안 된다는 이들의 주장과 같은 쪽에서 바라봤던 이들이 행한 배신과 상처, 무지와 편견의 악의적인 관심과 괴롭힘의 언어폭력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현실 악플과 다를 바 없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아둔함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으로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심리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어쩜 저런 표현을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도가 지나쳐 되레 너무 실감났다.



답답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줄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일자리 하나 구하기 어려운 시대에 자신의 꿈이었던 기자를 포기할 수 없었고,  사랑하는 로지를 지키고도 싶지만 세상을 홀로 상대하기엔 벅차기만 한, 그래서 자꾸 어두운 그늘 아래 숨으려만 했던 줄스는 이내 스스로를 가뒀던 벽을 깨부수고 깨닫고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참지 않고, 숨지 않고서 실천에 옮기며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더 이상 참지 않고, 숨지 않고서 실천에 옮기게 된다.



논란이 되는 화두는 명확하다. 여성끼리의, 즉 동성 간의 임신이 가능하다면 더 이상 남성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게 아니냐는 여론과 닫힌 사고방식 위에 선동하는 정치놀음이 이어진다. 생명윤리에 대한 이야기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고자 하는 개인과 단체, 그리고 사회의 신념은 그렇기에 더욱이 두려움이 대상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짐들을 떠안고 힘겹게 한 발 내딛어 가던 두 사람 앞에는 빛나는 존재만이 오롯이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고통과 갈등, 고민, 걱정 모두 한 번에 잠식시킬 만한 감사한 일만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스스로를 짓누르고 있던 자책과 절망 모두 한 번에 사라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모성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이고,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확답하기엔 이른...)



출산에 대해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모성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과연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가. 많은 질문거리를 던져주는 문제작인 이 작품은 단순히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떠나서 사회의 이중적인 면모와 반향, 현실 그대로를 담고 있다.



등장인물의 심리묘사 역시 섬세하고 과장되지 않아서 좋았다. 오히려 이입이 너무 잘돼 공감가는게 커서 문제였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각자의 가치관과 신념이 다르듯 그 다름을 받아들일 만한 태도와 자세 역시 개인이 가진 몫인 것이다.



궁금하여 검색해보니, 그저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실제로 비슷한 실험이 이루어진 사례가 있었다. 중국의 한 과학연구소에서 암컷 쥐 두 마리에서 제거되더라도 큰 문제가 없는 유전적 영역을 삭제함으로써 살아있는 새끼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유전적 각인이란 DNA에 부착된 작은 화학적 태그(chemical tag)로, 특정 유전자의 스위치를 끄는 역할을 한다. 그런 태그들은 지금껏 약 100개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상당수는 배아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http://www.ibric.org/myboard/read.php?Board=news&id=298443&SOURCE=6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야기될 여러 사회적 논점은 어쩌면 명확하기도 하다. 물론 아직은 요원한 일이다.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학계 내 연구자들 입장 역시 각기 상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생명을 다루는 일에는 늘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하기 때문에. 실존과 근원적 물음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멀지만 오지 않으리란 법도 없기에. 우선은 늘 염두에 둘 논점들에 생각해보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을 가지는 게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결론은 이 작품이 단순한 흥미로운 요소로만 다뤄지는 것뿐 아니라 다양한 논제거리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는 데서 좋은 소설이란 걸 말하고 싶다. 정말 좋은 소설인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개인의 취향을 떠나서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관심있는 독자들이면 꼭 한 번 읽어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이 리뷰는 한스미디어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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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시선 429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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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닫힌 문』







‘시요일’ 30만 독자가 사랑한 박소란의 신작시집 

닫힌 문을 두드리며 건네는 다정한 인사


 2009년 등단 이후 자기만의 시세계를 지키며 사회의 보편적인 아픔을 서정적 어조로 그려온 박소란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이 출간되었다. 시인은 “사회적 약자와 시대의 아픔을 개성적인 어법으로 끌어안았다”는 호평을 받은 첫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창비 2015)로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하며 시단의 주목을 받았고, 시 전문 애플리케이션 ‘시요일’ 이용자들로부터도 특히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출처: 예스24 책 소개)


 

**

 


■ 물기 어린 나날들


삶의 기본 구성요소인 것 같은 ‘슬픔’은 여러 얼굴을 하고서 존재하는 것 같다. ‘울음’이란 것만 해도 힘찬 생의 기운이 실려 있거나, 비통의 무게가 담겨 있듯이, 각기 상황과 주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살아가며 문득 서글퍼지는 순간들은 무수히도 많다. 울컥하고 터지는 슬픔을 애써 억눌러보기도 하고, 또 부러 외면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이 모두를 버텨내고 이겨내고자 하는 건 곧 지금의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 의 처음 문을 여는 시 <벽제화원>만 해도 읽자마자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게 된 순간부터 이 세상에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고, 문득 되살아난 기억에 괴로워하면서도 함께 했던 순간의 행복함이 떠오르기도 하는, 복잡한 심정에 어느 때부터는 그를 만나기 위해 살아간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상실을 겪은 사람들에게 앞으로의 삶의 시간은 남겨진 자들이 감당해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죽은 자를 위하여


나는 살아요 나를 죽이고

또 시간을 죽여요

 


11쪽, <벽제화원> 중에서


 

시인의 시 세계에서는 직접적인 단어나 표현이 등장한다 해도 결코 과하지 않다. 차분하고 덤덤한 어조로 서술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울컥하는 감정과 눈물이 차올라 목이 메이는 걸 ‘목이 자란다’는 것으로 표현하며, 그 사이 등장한 ‘슬픔’은 흩어져 있는 시어들을 한데 엮어주고 서로 잘 맞물리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목>). 


문틈에 새어들어 온 ‘빛’은 곁에 머무르는 듯 싶지만 이내 멀어지고, 어두운 얼굴은 나를 부르고, <검정>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존재하는 것이라 말한다. 시적 자아는 <검정>을 버려야겠다고 다짐하지만, 끝끝내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검정’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다. 내면이 가지는 근원적 고독 혹은 부정적인 마음, 혹은 구멍처럼 뚫려 있는 공허 등등 모두 읽는 이로 하여금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첫 시집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시집에서도 역시 생활을 다루고 있는 시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사람 사는 모습, 살림살이 대체로 다 비슷하단 생각에 특히 공감이 갔다.


우리의 일상과 다를 바 없는 여러 상황들이 등장하는데, 이를테면 계단 오르는 것에 대한 버거움을 ‘발목을 붙잡는 손’이 있다고 말하며, <상추>를 구입하며 ‘좀 건강해지려고’ 하고, ‘남들처럼 잘 살아보려고’하는 것. 또, 추운 겨울에도 <전기장판>만 있다면 ‘어떤 슬픔에도’ 무던히 잘 견뎌낼 수 있고, ‘가스레인지도 보일러도 켜지지 않는 저녁’에 옆집에서 건네준 설익은 감자를 맛있게 먹는 것(<고장난 저녁>)도, <오래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지긋지긋한 먹고 사는 얘기’를 나누는 것 모두 보통의 생활상을 담고 있다. 


 


종일 떨다 돌아온 날에는 온도조절기에 빨갛게 불이 들

어온 것만으로 안심이 된다

세상 끝 옥탑에 보일러가 도는 기분


(…)


전기장판에 누워 겨울을 난다

어떤 슬픔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74-75쪽, <전기장판> 중에서




시적 자아는 서글프고 지난한 생활 속에서도 아름다운 것을 찾고자 한다. 슬픔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는 말은/아름다운 것’이고 ‘그것을 잃고 난 후/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그것을 아주 갖지 않는다는 것’(<잃어버렸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 또한 아름다운 일이다. 어떤 삶이든 어느 한구석에 자리한 틈이란 게 있을 것이고, 허락하지 않아도 비집고 들어선 존재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순간 마주하면 놀라 비명을 지르게 되기도 한다. 시인은 이처럼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제 ‘한 사람’이 ‘닫힌 문’을 두드린다.


 


말해보세요 당신,

우리가 어떤 슬픔을 저지른 것인지

슬픔은 왜


또 끝끝내 아름다워지려 눈물을 감추는 것인지



67쪽, <말해보세요> 중에서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

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64-65쪽, <감상> 중에서

 


■ 사랑, 다정한 인사



닫혀 있는 공간으로의 진입, 그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한 여는 행위가 이뤄진 데는 ‘그저 누가 있을 것만 같아서’라는 이유를 바탕으로 한다. 


문을 열고, 손을 잡고 온기를 나누는 것, 혹은 낯설지만 친숙한 누군가에게 막연한 다정한 마음을 가지며 인사를 건네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

 

‘손잡이가 돌고 도는 사이/손들은 너무 쉽게 뜨거워지고’ 마치 사랑을 하는 사이에 온기를 나누는 것 같지만, 실은 손으로 치환된 손잡이는 본래의 역할로 돌아가는 것. 


휘청거리는 공간에서 붙잡고 중심을 지탱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렇게 ‘손잡이가 돌고 있는 사이’에 화자는 ‘문 저편/그럴듯한 삶을 시작해’(<손잡이>)보자고 제안하기도 하며, 감추고 있는 것을 차마 내보이지 못하지만, ‘양말을 벗어본 적 없는 내가/너의 곤한 맨발을 오래 들여다보는’(<양말>) 것처럼 나의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고 싶고, 너를 향한 고요한 응시를 하고 싶은 것.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삭은 깍두기 접시를 가운데 두고 함께 밥을 먹는 새벽‘(<가발>)의 소박함, 두 개의 뚝배기가 전해주는 온기야말로 진짜라고 말하는 사랑. 서로가 가진 벽을 허무는 일은 ’누가, 그 누가/부른 적 없는 사랑이 쳐들어‘(<벽>) 온 것과 같다.



사랑을 말하는 자아는 골목의 풍경도 모두 살아 있고 빛나는 것들로 보게 되고, <불쑥> 왔다가고 아무런 예고 없이 고백하고 싶기도 한다. 그렇게 갑자기 피어난 마음은 가까이 다가서기를 주저하기 않고, 오히려 더 무방비한 상태 그대로 거리를 좁혀가는 적극적인 태도도 보이고 있다. 그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척박한 삶 속에서도 담아낼 수 있는 고운 마음이 있다는 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려는 의지가 있다는 게. 


혹은 개인이 가지는 고독의 색채가 짙어져서 역으로 그런 빛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양말을 벗을 수 없다

이 속에 죽은 발톱이 있다고


고백할 수 없다

어둡고 습한 것 불길한 것이 있다고

나는 있다고



48쪽, <양말> 중에서

 


 


곁에 없는 당신

지금 당신도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다고, 빈방에 들어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주저앉은 당신은

구겨진 얼굴을 감싸 쥐고서 아무도 모르게 운다

 

그런 당신 곁에 나는 조금씩 있을 수 있다고


 

53쪽, <마음> 중에서

 


우리는 자주 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무방비의 감정에 대해,

나도 모르게 

손바닥을 활짝 펴 불을 쬐는 시늉을 할 때가 많았다

(…)

 

불을 끄려면

불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고


 

68-69쪽, <불이 있었다> 중에서

 


우리는 헤어집니다 단 한번 만난 적도 없이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내 이름은 소란입니다



95쪽, <모르는 사이> 중에서 


 

■ 살아있다,는 감각.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또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새기기도 한다.


공중에서 떨어졌지만 부서지지 않는 ‘나’는 ‘벽돌’을 닮았고(<이 단단한>), 여전히 살아 있으며,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고 멈추지 않으며, 숨 쉬고 있‘고, 괜찮아, 라고 답하기 위해, ‘아직 살아 있기 위해’ 아무도 내 시계를 모르게 한다(<시계>).


흔한 웃음소리와 표정을 하고 있지만 텅 비어 있고, 버리는 일에 골몰해있는(<깡통>) ‘나’는 ‘약을 사 들고 달려가는 밤’(<약>)의 숨소리에서, 때로는 ‘걷는 있는’ 것에서 살아 있음을 실감하기도 한다. ’계속 걸어‘가며 ’모퉁이를 돌아 다시 걸어오‘고 무심코 ’우측보행을 하는 것‘(<천변 풍경>)과 같이 습관처럼 행해지는 것들에서 살아 있다는 감각은 되살아난다.


때문에 '살아 있다는'는 감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아침에 눈을 뜨고 출근하고 일하고, 다시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고. 반복된 일상 속에서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낄 순간이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죽어있는 상태로 살아 있는 척 행세를 했던 건 아닐까, 그러면서도 아주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 웃거나 분노하거나 다시 슬퍼하기도 한다. 어쩌면 생의 감각이 발현될 때는 몸에 밴 습관들처럼 그 찰나에 나타나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무수한 익명의 그리움이 떠올랐다. 상실을 겪게 되었을 때 그가 없는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해 애써 모른 척 해왔던 시간들에 대해, 이를 직면하고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는 시적 자아를 보며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꿈속에서나마 그리운 인사를 건네고, 잊으면 그만이지만 잊을 수 없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과거의 멈춰진 시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머뭇거렸던 순간들에 대해서도. 더 이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염려하지 않고, 지나간 시간들에 미련 두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아직도 모호한 답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모두 괜찮다, 라는 자기 최면을 걸어 살아갈 뿐 정말 괜찮은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답답하지만 아직은 미성숙한 채로 이렇게 살아 있으며, 살아갈테니 말이다.



(…)

 

숨이 터져나온다 골목 곳곳 익은 숨이

밥물처럼 흘러 흘러넘쳐

때 낀 밥그릇을 껴안고 잠든 개들을 깨운다

개들을 향해 헐떡이며 짖어대는 나의

그림자 짙붉은

나는 살아 있구나


나는 살아 있구나

이 활활한 것을 어서 가져다주어야지



72쪽, <약> 중에서

 


고작 감기일 뿐인데 죄송해요

울먹이면서

멀쩡히 잘 살아갑니다, 실없는 꿈속에서


어디야? 전화를 받지 않는 엄머

거기 먼 집

닫지 못한 문이 있고 여태

늦된 겨울을 건너다보고 있을 엄마, 감기 조심해

 


125쪽, <독감> 중에서



잊으면 그만인 것

 

잊을 수 없다

상자는 있는지 아직 여기 있는지, 죽은 엄마라면

알 것 같다 상자의 안과 밖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129쪽, <선물> 중에서



 **


 

이렇게 또 다시 비루한 서평을 쓰려는 시도를 하게 될 줄이야,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 듯 싶다. 같은 짓을 반복하게 되는 걸 보니 말이다. 



박소란 시인의 시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어느 팟캐스트를 통해서였다. 시인분들이 직접 나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말하고, 낭송하고. 이에 디제이 분들이 시 한 편을 골라 노래로 만들어 들려주는. 그렇게 들었던 시인의 목소리가 일단 너무 좋았고, 낭송하는 작품들이 하나같이 마음이 콕콕 와 박히는 듯이 인상 깊었기에 바로 시집을 구해 읽어보았다. 물론 내멋대로 그냥 읽어보는 것이었다. 



잘 설명할 순 없지만 시 속 세계 분위기랄까, 부족한 표현력의 한계를 실감하며 말하지만, 그저 좋다는 느낌 뿐이었다. 실린 시들 하나같이 삶, 그리고 생활과 연관된 것들인데 그 안의 폭은 깊고 또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돼 있었고, 진솔한 느낌을 주었다. 낯설게 느껴지는 시어들이 한데 모인 듯 하지만 오히려 현실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었고, 여운이 남았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되고 슬픈 현실이 서술되는데 공감이 가면서 위로가 되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도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면 참 뿌듯하고 행복하겠다, 싶은 동경과 함께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덤덤하게 말하는 게 오히려 더 진한 파동을 일게 하였고, 하물며 시집 제목 자체가 『심장에 가까운 말』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 후로 박소란 시인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면 무엇이든 찾아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따끈따끈한 신작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이 출간되었다. 『한 사람의 닫힌 문』에는 ‘한 사람’으로 지칭되는 존재가 등장한다. 그저 명명되었을 뿐이다. 굳게 닫혀 있는 문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열고 마는, 삶의 진창에서 마냥 아파하는 게 아니라 낯선 이에게 막연한 다정한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온기를 나누기도 하고, 그리운 존재를 그리워하며 살아 있다,는 감각을 실감하는. 


물기 어린 슬픔은 여전하지만,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많은 위안이 되어줄 그런 시들로 가득하다. 정말 덤덤하지만 다정한 인사를 건네준다. 

추위에 움츠러들었던 심신에 시의 온기를 나눠주는 고마운 시집을 더불어 나누듯 누군가에 꼭 선물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 역시 참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리뷰는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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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테 안경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희정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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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테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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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개】


‘기억의 작가’ ‘페라라의 작가’로 불리는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숨은 거장 조르조 바사니(Giorgio Bassani, 1916~2000)의 1958년작. 단편집 『성벽 안에서―페라라의 다섯 이야기』, 장편소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과 함께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바사니의 경장편 소설이다. 


『금테 안경』을 두고 이탈리아 작가 엘사 모란테는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설의 하나”라 했고,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이고, 아마도 바사니의 최고작일 것”이라 극찬했으며, 안드레아 카밀레리는 2000년 바사니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페라라의 위대한 작가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았다. 또한 이탈로 칼비노는 이 작품을 읽은 직후 프랑스 세유Seuil 출판사의 프랑수아 발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사니를 “요사이 등장한 이탈리아 작가 가운데 가장 수준 높은 작가 중 하나”로 평가하기도 했다.  (출처: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작품 속 주인공은 페라라의 성공한 의사 아토스 파디가티다. 온화한 성품의 지식과 교양을 겸비한 의사이자, 풍족하고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중년의 신사이다. 페라라 시민들의 관심과 존경을 받으며 잘 살아가던 이 신사에게 사람들은 문득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이렇게 훌륭한 성품의 인물이 왜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생활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말은 많이 모일수록 점차 사실화가 되는 바 소문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예로, 파디가티의 성향이 동성애자라며 수군거리게 되었고, 어느새 납득하게 되었으며, 곧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시대적으로 구속받는 상황이었기에 사람들의 관심도 점차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물론 당사자는 그 어느 하나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반드시 이 선량한 신사에게 모욕을 주고 농락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매력적이지만 오만한 젊은 청년은 고통과 상처만 주는 존재이다. 자신이 대단한 인물인양 착각하는 이기적인 인물에 매혹되는 어리석은 존재가 또 인간이기도 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연인이라고 지칭될 수 없는 관계 속에 얽매이고 한줄기 희망도 품었다가 친숙한 사람들 앞에서조차 욕보이게 되고, 종국엔 비참하게 버림받는 인물, 파디가티는 초반에 묘사된 모습과 달리 줄곧 당황하고 상처받고 휩쓸려 끝끝내 비극적인 선택을 남기게 된다.



이런 파디가티에 대해 말하고 있는 화자인 ‘나’는 이 중년 신사에게 연민을 가지게 되고 곧 친구가 된다. 관찰자이자 방관자의 입장을 고수하던 ‘나’ 역시 페라라에 사는 시민이자, 볼로냐 대학을 다니던 학생이었고, 또 유대인이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살았지만 과거의 아픈 역사가 있기에 언제고 불안함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던 나는 반유대주의적 인종법 시행을 앞둔 1930년대 어두운 시대 속에서 불안과 두려움 속에 절망에 잠긴다. 무솔리니 파시즘 체제가 들어선 1920년대 이후, 체제의 위기의식 없이 안일한 동조를 하며 살아가던 유대인 공동체는 갑작스러운 인종법 시행 발표 관련하여 배신과 당혹에 휩싸인다. 반유대주의라는 반복되는 역사의 불안함에 어두운 밤거리를 헤매는 나와 그리고 홀로 남게 된 쓸쓸한 중년 신사 파디가티,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떠돌이 개 한 마리.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 공간은  페라라와 볼로냐, 리초네, 다시 페라라로 이동하는데 서사를 전개하는데 각각의 전환점이 되어준다. 특히 해변 휴양지 리초네에서는 쌓여있던 갈등과 긴장감이 표출되어진다.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이 느끼는 고독감과 외로움은 이야기의 끝을 향해 갈수록 더 짙어지는데, 과연 그들이 그 안에 속해 있었을 때에도 고독하거나 외롭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작품 속 이 두 인물은 얼핏 평화로워 보이는 세계 속에서 위선과 경멸에 휩싸인 시선과 시대상에 맞물려 폭발하는 시점을 마주하고, 이내 버려지고 외면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 모든 서사는 직접적인 사건들로 존재하지만 표현방식은 직유든 비유든, 에둘러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인지 더 유려하고 비극적인 인상을 남기는 듯 하다. 어두운 밤거리, 고독한 두 인물의 배회랄까, 그리고 그 마지막은 매우 쓰기만 하다. 



머릿수로 결정되는 무리의 가치관의 무서운 점은 바로 이런 지점이다. 자신들이 믿는 게 옳다는 신념으로 확신하는 태도,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외면하는 태도 말이다. ‘그들’과는 엄연히 다르고, 더 우월한 존재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음. 모든 게 평화롭게 수용하는 세계란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조심스럽게 천천히, 그렇게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지금도 이렇게 삭막하게 위태로운데 작품 속 시대에는 얼마나 더 숨 막히고 참혹했을지 가히 짐작도 가질 않는다. 


바사니의 작품을 처음 접해보는데, 그렇게나 많은 작가들이 하나같이 좋은 문체라고 칭송하는 데는 이러한 태도가 뒷받침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모순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환경적인 요소와 그가 느꼈을 심리적 요소가 부합되어 특유의 문체가 완성되었을 것 같다. 차분하고 담담하면서도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비극과 모순된 태도에서 아름다운 문체가 발현되니 역시 문학은 행복한 삶을 가진 사람이 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슬픔과 아픔이 있고, 좌절과 절망이 있기에 이를 위로하고 위안을 주기 위해 글을 쓰게 되는 것이 아닐까, 문득 생각해본다. 



**



빛을 등진 그의 모자는 날벌레 무리에 둘러싸인 듯 보였다. 하지만 그는 드높은 가지 위의 거대한 새처럼 걸터앉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날카롭고 단호한 목소리로 한 점 한 점 득점 수를 외치며, 경기가 끝날 때까지 공평한 심판이라는 자신의 임무에 몰두한 채 그 위에 머물렀다.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하루하루 밀려오는 지독한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91쪽 

 


자신을 멸시하는 연인으로 인한 그의 고통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고백하자만 그의 마음을 가늠하는 순간 내가 느낀 것은 연민보다 혐오감이었다.   97쪽


 

매우 가까운 장래에 그들, 이교도**들은 칠팔십 년 전에야 마침내 우리가 벗어났던 참담한 중세 구역의 구불구불한 좁은 길에다 또다시 우리를 떼거리로 몰아넣으려 할 것이다. 우리는 겁먹은 많은 짐승들처럼 철책 뒤에 차곡차곡 쌓일 것이고, 거기서 절대 탈출할 수 없을 것이다.     111-112쪽


**Goi, 유대인 입장에서 비유대인, 이교도를 가리킬 때 쓰는 말. 히브리어로 ‘백성’이라는 뜻으로, 보통은 Goy로 쓴다.


 

(…) “이처럼 자신의 본성을 받아들여야겠지.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지? 너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을까? 인간에게도 다분히 동물성이 존재하는데, 과연 인간이 복종할 수 있을까? 동물이라는 것을, 단지 한 마리의 동물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123쪽


 

지난 두 달 동안 내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고독감이 바로 그 순간 한층 더 심해졌다. 총체적이며 결정적이었다. 나는 나의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142쪽




** 덧붙이며

매우 늦은 후기이지만 고마운 이웃 연꽃폴라리스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좋은 작품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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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지하철
마보융 지음, 양성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용과 지하철』




타고난 이야기꾼인 마보융의 위력은 이미 국내 첫 출간되었던 『장안 24시』로 증명된 바 있다. 역사소설을 비롯한 미스터리, SF판타지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고 있는데다,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묘사와  더불어 구성이 촘촘하기 때문이다. 그가 구축한 작품세계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빨리들여 가는 듯한 강력한 흡인력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이야기가 가진 힘이 강력하다. 가독성 좋으면서 작품성까지 갖추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걸 가뿐히 해내고 있으니 타고났다는 표현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 그의 신작이 나왔다니 당연히 기대가 됐다. 과연, 이번엔 판타지적인 요소가 주를 이루고 주인공은 어린 소년인데다, 이야기 속  배경은 익숙한 장안성이라니 한층 더 반가웠다.










**



대장군 이정의 아들 니타는 순수한 마음과 타고난 대담함과 더불어 의협심과 모험심이 가진 소년(가히 주인공이 가질 만한 성격 요소를 모두 갖추었음)이다. 오랜만에 가족간의 재회를 기대하며 장안성으로 향하는 길, '얼룡'이라는 용 형상의 검은 기운에 공격을 받게 된다. 기막힌 타이밍으로 니타가 탄 마차는 천책부 공군 덕에 무사히 생명의 위협을 벗어날 수 있게 되지만. 위기의 순간 추락하던 니타를 구해준 천재 비행교위 심문약 덕에 하늘을 비행하는 짜릿함과 자유로움을 만끽하게 된다. 그렇게 무사히 아버지와 재회를 하게 된 소년은 미로처럼 끝없이 펼쳐진 장안성이란 낯선 도시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보호자를 자처한 옥환공주를 통해  지하룡을 처음 타 본 소년은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편리함과 달리 살아있는 용을 도구로만 이용하는 데에 불편함을 느낀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 소년의 눈엔 오히려 본래 가졌어야 할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감정없는 냉담한 눈으로 지하에 갇혀 사람과 짐을 싣고 나르는 그들의 생활이 가엾기만 하다. (이는 물론 필연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겪게 된 동시에 하늘을 나는 즐거움을 겪어본 것이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연찮게 지하룡들의 거처인 선로 관제소에 숨어들게 되고, 주머니 속에 가득 채워둔 달콤한 과자와 주전부리들 덕에 식탐 많고 정 많은 한 용의 용주를 얻어 그들의 언어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처음엔 단순히 실수로 떨어뜨린 사탕액이 묻은 용의 차가운 눈빛에 대한 사연을 듣고 그를 구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좌절을 겪게 되고. 소년의 순수한 진심이 전달되자, 많은 지하룡들의 요구로 그들에게 손수 이름을 지어주게 된다. 열살배기 어린 소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이 소년은 지하룡 막대사탕, 식탐이, 천둥, 매화반점과의 우정을 통해 지하룡들이 겪는 고통과 죽음에 대해 더 가까이 경험하게 된다. 


장안에서 매년 열리는 용문절에는 수많은 잉어들이 간절한 바람으로 힘겹고 고통스럽게 호구폭포를 거슬러 올라가 드높은 용문을 통과하여 용이 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운이 좋게 통과하여 무사히 용이 되기도 하지만, 대개 좌절하거나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억겁의 시간을 견디고서도 겨우겨우 용이 되어 비상할 찰나, 천책부 공군과 백운관 도사들의 공격으로 주술과 쇠사술에 묶여 지하에 묶인 신세가 되고만 용들에게서 떨어져 나간 역린(용의 아래턱에서 3척쯤 내려온 곳에 위치한 특별한 비늘). 영혼도 없이 오직 깊은 분노와 원한만 담긴 역린이 변해 얼룡이 되는 것이었으니, 이는 곧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불러온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다.


한편 니타의 아버지 이정과 대척점을 이루는 백운관의 수장인 청풍 도장은 황제의 전적인 신뢰를 얻고 있는 인물. 점차 강하고, 빈번하게 등장하는 얼룡에 대해 대비하는 데에 의견을 달리 하는 이정과 청풍 도장의 기싸움에서 권력다툼의 조짐이 보이나 싶었는데, 다행히 더 심화되는 양상은 아니었다. 어른들의 다툼과는 상관없이 니타는 자신을 보호하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고통인, 죽음의 문턱에 선 막대사탕을 구해내기 위해 온힘을 다한다. 그리고 마침내 소년 니타가 이뤄낸 기적이 하나씩 새로운 변화를 불러 일으킨다. 멀미에 힘들어하던 어린 소년은 첫 인상과 달리 어떠한 상황에서도 본인의 의지를 가지고 비범하게 행동하며, 이야기의 힘을 더해준다. 


소년과 용 막대사탕의 우정을 읽어가며  한순간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가, 긴장감에 마음을 졸이게도 하였으며, 모두가 공존하여 잘 살 수 있는 행복한 결말을 기대하기도 했다. 이들의 우정이 영원하길 간절히 바라며, 흐뭇한 웃음으로 책장을 넘길 수 있어 무엇보다 좋았던 작품이다. 



"날아! 비상은 용들의 숙명이야!"

이 말은 붉고 강렬한 전류처럼 모든 용의 신경을 자극해 전율하게 만들었다. 이 치기 어린 목소리에 갑자기 많은 용들이 사납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수백 마리 용들이 뿜어내는 질풍노도와 같은 포효가 한데 모여 강한 기류가 형성됐다. 마치 비범한 진룡이 탄생할 때처럼 바람이 일고 구름이 피어오르며 천지가 개벽하는 것 같았다. 


 제12장 대얼룡  中 (223-224쪽)





**




다행스럽게도 이 소설 내엔 권력의 다툼 속 존재하는 이기적인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조화를 이루는 구조였기에 편하게 읽을 수 있던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불현듯 닥친 위기를 무난히 잘 헤쳐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의 힘이 강력하면 없던 집중력도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되는데, 바로 이 소설이 그러했다. 긴장이  고조되어 제발, 제발하는 마음으로 한 장씩 넘겨가며 안도하는 상황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영상매체 제작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소식을 봤던 것 같은데 이미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로 선명한 묘사가 이어지니, 보는 즐거움까지 더한 듯 하다. 소년 니타의 순수한 마음과 용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아름답게 펼쳐치고, 마음까지 따뜻해지니 감히 치유소설이라고도 부르고 싶다.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를 짐작하여 살펴보면, 인간의 탐욕에 대한 경각심과 조화로운 공존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그동안 운좋게도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쪽으로만 편중된 독서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그 세계에만 갇혀 있었음을 고백해본다. 중국소설도 '마보융'이라는 작가를 통해 그 매력을 새삼 알게 된 것이다. 『용과 지하철』에 실린 그의 다른 단편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와닿지 않고, 별 매력도 잘 느끼지 못하였지만. 


작품의 여운이 남아 그 다음을 자꾸만 그려보게 됐다.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된 막대사탕과 니타의 이야기를 좀더 이어졌으면 어땠을까 싶고, 혹은 틈만 나면 투닥거리기 바빴던 옥환 공주와 심문약의 이야기도 덧붙여져 있었으면, 완벽한 마무리가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개인적으로 정말 재밌는 작품이었기에 소소한 아쉬움을 덧붙여보았다. 하지만 역시 믿고 읽는 마보융, 다음 작품도 너무 기다려진다.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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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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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기대됩니다. 황정은 작가님 소설집!! 제발 선착순 안에 들어서 사인본 받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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