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에 대하여
아리요시 사와코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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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개의 시선이 엇갈리는 미스터리, 

도미노코지 기미코 그녀는 과연 '악녀'일까,





『악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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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전후 격변의 시대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여성 사업가의 수수께끼 같은 죽음, 그리고 그녀와 관련된 27명의 인물들의 인터뷰로 구성된 작품이다. 


어느 화창한 날, 도쿄 빌딩가 뒷골목에 미모의 여성 사업가가 마치 새빨간 꽃 한 송이가 떨어진 듯한 모습으로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젊은 나이에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업의 여왕’ 도미노코지 기미코의 돌연한 죽음에 언론에서는 일제히 ‘자살인가 타살인가’, ‘허식虛飾의 여왕, 수수께끼 같은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한다. 온갖 억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한 작가가 그녀의 삶을 추적하기 위해 관련자들을 찾아 나선다. 27인의 중요한 관련자들이 각자의 시점에서 풀어놓는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도미노코지 기미코의 실체를 점점 더 미궁으로 몰아넣는다. 그녀가 뒤틀어놓은 순수와 허식의 꼬리는 쉽게 잡히지 않고 진실은 갈수록 모호해진다. ('책소개' 참고)


소설 속에서는 인터뷰의 주제가 되는 기미코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진 않는다. 27개의 에피소드 전부, 그녀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등장하고 있다. 차례대로 한 인물씩 인터뷰가 나열돼 있으며, 서로 모르는 사이 얽혀 있는 관계 속 인물들간의 시간도 묘하게 겹쳐 있기에 퍼즐조각을 맞춰가듯 읽는 재미도 있다. 실로 치밀한 구성으로 계획하지 않는 한 개연성 확보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개연성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이야기가 가지는 힘이 탄탄한 것은 물론, 뛰어난 흡입력으로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작가의 내공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문장이 장황하게 늘어지는 것도 없으며, 소설 내 정확한 사실을 전달할 때와 인물 심리를 묘사할 때의 완력 조절이 잘 되어 있다. 드라마같은 서사와 27인의 인물 설정 또한 각각의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기에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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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개의 시선, 한 사람의 생에서 마주한 인물들


스즈키 기미코, 그녀는 채소가게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전후시절, 어려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사정이 어려워진 모녀는 귀족 출신인 비토 가의 식객으로 얹혀 살게 된다. 기미코는 중학교 의무과정을 마치고 야간대학을 다니며, 비토 가에서는 가정부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며 살아간다. 낮엔 보석점에서 저녁엔 중화식당에서 야간엔 부기학원까지. 잠깐의 짬내기도 힘든 일정 속에서 그녀는 참으로 다양한 관계를 쌓아간다.


결혼과 출산, 이혼, 레스토랑 사업과 보석, 여성들을 위한 사교클럽에 방송까지, 굴곡을 넘어 화려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만큼, 그녀를 기억하는 27명의 시선 또한 천차만별로 다르다. 부정적인 시선과 긍정적인 시선, 적당한 관심에서 나오는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이 과반수 이상이었다.


어떤 마음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간에 하나같이 가지는 첫인상은 대체로 비슷했다. 대단한 미인은 아니나 예쁜 얼굴을 가졌으며, 고귀한 언품을 구사하고,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가진 여자라는 것이다.


사람을 홀리는 듯한 매혹적인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음에 분명한 듯한 진술들이 이어진다. 자신만이 그녀의 진정한 사랑이었음을 고백하는 남자들의 말들은 모두 한결같다. 비슷한 색채를 지녔거나 그보다 더 못한 인물 유형만 빼고. 


차분한 말투에 화려한 언변으로 신뢰도를 높였기에, 있어 보이거나 허술해 보이는 인물들을 이용해 잇속을 챙기기도 하지만, 고용한 사람들에겐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며, 이해관계 또한 확실히 했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녀가 부렸던 인물들에게서는 놀랍게도 부정적인 평가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했던 여러 사업들을 키워가는 과정은 다양한 술수가 섞여 있었다.  보석 매매와 부동산 매매에서 또한 그러하다. 


이렇듯 기미코는 해내고자 했던 일들에 대한 열의와 천부적인 사업가 기질, 타고난 감으로 이뤄낸 것들도 많았다.


같은 시기 비슷한 관계로 겹쳐 있는 인물들의 증언을 읽다 보면, 어떻게 이렇게 하나같이 서로를 엇갈리게 관계를 이어 갔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했고, 한편으론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러한 활동력과 계획성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에게 한결같은 이미지로 비춰졌음에도 불구하고, 극과 극을 오가는 기억을 남기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이토록 많은 성과를 더불어 많은 관계를 낳게 했던 것일까.


한 사람이 살아가는데 만나는 인물, 인연, 형성된 관계들은 또 어떠한가.



스스로를 속이는 인물, 생화보다 생명력 있는 조화


기미코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이 하는 거짓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출생에 관한 것이다.

바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자신이 사실은 귀한 집의 자식일 가능성이 있는 업둥이라는 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출생과 도벽이 있는 어머니의 기질을 부끄러워 하며, 그 혈연을 감추고 싶어 스스로부터 속이려던 게 아닐까 싶다. 거짓말이 힘을 가질 때는 그 속에 일말의 진실이 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그녀는 올바른 삶을 지향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여지게끔 행동한다. 그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그리고 인식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의 이상적 자아를 만들어내고, 그를 연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그녀를 대하는 이들의 기억의 일부에선 그녀가 원했던 방향으로 기억할 수 있게 돕게 된다. 그렇게 믿고 행동하는 힘의 결과가 놀랍다. 


그러한 자아는 본래의 자아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자신을 포장하는 기술도 남다르다. 예를 들어 방송을 출연하게 된 그녀가, 실제로는 온갖 고생을 해왔으면서도 자신은 고생 한 번 한 적 없음을 강조할 때 더욱 그러하다. 모든 게 신뢰에서 얻어진 사랑을 통해 이뤄진 것이라니. 실로 이상적인 발언이 아닌가 싶다. 현실의 지지부진한 비루함은 모두 걷어낸 채, 힘든 일 하나 없이 순탄하게 흘러온 삶, 귀하게 살아온 사람인 것마냥 꾸며대는 태도. 이는 뜻밖에도 현실의 척박함 속에서 아름다운 희망을 그려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열광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녀가 옷에 달았던 많은 조화들. 생화보다 조화를 좋아했던 것처럼, 살아있는 '진짜' 꽃보다, 만들어진 '가짜' 꽃에 담긴 향기는 그녀 자체를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 나는 죄가 없어요. 그저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했을 뿐이랍니다.




일본의 '여성'에 대한 시선, 왜 '악녀'라고 지칭되는 것일까


한편 이 소설은 그 시대의 여성에 대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지금과 크게 다르진 않는 듯 하다. 정조를 강조하며, 남자는 되지만 여자는 용납해줄 수 없는 것들.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쓸 지는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린 것이지만, 도미노코지 기미코는 이를 자신이 가진 매력에 더불어 배가 되도록 활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하면서 그 방식은 올바르지 않는 모순을 보여준다. 어떤 측면에선 기발하고 영리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꽃뱀이라 불리는 데는 그런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 관계를 강박적으로 밀어붙이기도 한다. 그러한 시도는 번번이 실패에 이르고, 너저분한 관계들만 이어가게 된다. 그래서 과연 그녀의 진의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실은 그녀 자체도 모르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어떤 여성들을 대할 때 붙이는 수식어로 '악녀'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듯 하다. 그러나 악녀란 무엇인가. 그게 붙여질 만큼의 일들을 행한 것일까. 일부에서는 여성을 아래로 보는 듯한, 깎아내리는 듯한 말이 아닐까. 언론이 간과하는 듯한 말의 힘은 실로 대단한 게 아닌가. 작정하고 몰아가면 정말 그렇게 보이는 경우가 다반사다. 기미코의 행실이, 그 삶이 마냥 옳고 타당했다고 주장할 수 만은 없을 테지만. 하루 만에 열광했다 하루 만에 식고 마는 세태. 한 사람을 공격할 때 쓰이는 말들 중에 좋지 않은 여파를 지닌 단어들을 사용할 땐 극히 주의해서 써야 한다. 그저 궁금했다. 왜 악녀라는 불리는 것일까.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해자를 말하건 피해자들 말하건, '-녀'라고 붙여지는 것들의 습성에 대해 늘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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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라고 수식됐지만, 그것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는 소설이다. 꽤 심도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기미코라는 인물의 죽음의 성질이 타살인가, 자살인가에 대해서 궁금하여 읽게 된 독자에게 깔끔한 결말이 주어지진 않는다. 그저 한 사람의 생에서 마주한 인물들의 여러 관계 속에서 문득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 것인가. 나와 관련한 사람들 속에서 나는 과연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 것일까. 흐릿한 존재감으로 누구에게도 민폐를 끼치기 싫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민폐를 끼치게 된 경우도 있지 않을까, 누구에겐 좋은 사람이지만 누구에겐 싫고 불편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사람은 보통 한결같이 지니는 본래의 기질이나 속성과 다르게 여러 얼굴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흔히 행하는 오류이다. 쉽게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기도 하다. 때문에 편견과 선입견이 생겨나기도 한다.


기미코에 대한 여러 인터뷰 중에서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과 또 다른 인터뷰이가 말하는 그 사람의 얼굴은 다른 것이기에 흥미롭다. 직접적으로 연결된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평가가 각기 다른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단순한 오락성에 더불어 또 하나의 힘이 여기서 형성된 게 아닐까 싶다. 인간관계와 상대에 대한 평가, 보여지는 것들에 대한 생각과 의문.


그러나 후반부의 인물들 인터뷰 중 몇 개는 되레 개연성이 떨여져 보이기도 했다. 순서대로 창작했을지는 알 수가 없으나, 다소 긴장이 풀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친어머니와 큰 아들의 증언들이 그러했다. 아무리 드라마식 서사라 해도 그렇지 알랭 들롱같은 인물이 카운터에 있다니 소설 속이라고 해도 과한 게 아닌가. 


아리요시 사요코는 남성 중심의 일본 문단에서 당당하게 본인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작가라고 한다. 애초에 문학에서조차 여성의 언어, 목소리를 가지게 된 게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저 남성의 시선에서 여류라고 폄하되었을 뿐이다. 우위에 서서 일컫는 말이다. 여자치고는 잘 쓰네, 하는 시선이 담긴 말.


직설적인 성품으로 문단에 도전을 했다는 이 작가는 글에 대한 집중도가 대단했다고 한다. 글을 쓸 때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않아 얼굴이 새파래지기도 했으며, 한 작품이 끝나면 탈진하여 입원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가독성이 좋았고 힘 있는 문장 덕분에 단숨에 읽어나가게 됐다. 당연히 다음 작품 또한 기대가 된다. 오히려 거창한 것이 아닌, 지적 받았던 드라마식 서사가 가지는 통속성이 더 맘에 들었다. 과감한 도전의 시도처럼 느껴졌다. 작가의 또다른 작품을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바라본다.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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