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김선우 지음 / 새움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떻게 다를까,


『우리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김선우 시인의 산문을 처음 접한 건 최근 출간된『부상당한 천사에게』를 통해서였다. 

이전에 시를 맨 처음 접했을 때, 나의 감상을 비롯하여 어떠한 닫힌 생각 속에서 바라봤기에, 주목하지 못한 작가이기도 했다. 


어떤 책을 만나는 데에는 뚜렷한 목적도 있겠지만, 많은 긴장 속에서 느슨한 여유가 필요할 때, 알고 있었으나 잊고 있었던 이름으로 인해 꺼내 들기도 한다. 내겐 김선우 시인이 그러했다. 곧 다른 산문 역시 더 읽어 싶어져 찾게 된 책이다. 2007년도에 나왔으니, 올해로 나온지 10년이나 된 책이다. 그래도 이제라도 만나서 참으로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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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총 세 장으로 나눠 구성되어 있다.
1장은 꿈의 학교라는 제목으로, 부산에 있는 '인디고 서원'에 방문하여 그곳의 아이들과 토론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서점은 청소년을 위한 서점이라고 한다. 시인은 아픈 몸을 이끌고, 아파도 절대 잘 안 챙겨 먹던 약까지 먹으면서까지 이곳을 방문한다. 여기서 시인은 맑은 눈을 가진 아이들과 꿈, 삶,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두 가지 정도가 있는데, 첫 번재는 아이들이 가지는 꿈에 대한 태도였다. 장래희망이나 목표, 또는 이상향과 상상력과 합심한 꿈까지, 다양한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 

두 번째는 그곳의 선생님으로 계신 어떤 질문자가 던진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녀가 아픈 어머니를 간병하며 얻게 된 시선은 자신 안에 내재된 또다른 여성성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과거에서의 모습이 아닌 지금보다 훨씬 더 시간이 지난 뒤의 중년, 노년의 여성으로서의 태도나 시선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닌 이미 그 속에 내재된 모습이었다는 것이 뜻밖이었다.
마치 계절이 바뀔 때마나 그때 그때 옷을 꺼내 입듯이, 이미 내 속에 있는 수많은, 늙은 여성의 모습들을 그때 그때 꺼내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질투가 아닌 안타까워하며 포용의 자세로 너른 품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은 어릴 적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 개천가에서 오줌을 눌 때 그곳에서 함께 오줌 누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그러면 안된다며 혼이 났다고 했다.
여자는 조신해야 하기에 바깥으로 뛰어놀기 보다 좀더 얌전한 태도를 가져야 하며, 남자는 강해야 하고 일생에 딱 몇 번만 울어야 한다는, 이상한 강요점들은 여전히 사회 전반에 만연한 것들이다.

생리현상에 성은 구별 지을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생물학적인 차이일 뿐이라고 말한다.

지금을 남성보다 강한 여성이 활약하는 여성성의 시대로 보는 게 아니라,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성차별주의가 발생시키는 억압과 부자연스러움, 착취의 문제에 물음표를 던지는 게 작가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인 것이다. 이는 모두가 더불어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던지는 물음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대다수의 수컷 동물들이 보이는 힘을 통한 서열 정하기, 강자를 중심으로 서열이 정해지며 경쟁하는 건 인간 사회 속 남성의 힘의 논리와 가깝다고 말한다. 평화가 필요하기에 여성성에 대한 화두가 던져진 것이고, 생명을 잉태하고 보살펴 온 몸의 기억들, 친밀성, 공명하는 힘, 사랑하고 연민하는 힘이 구원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모두가 공생하며 지속 가능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원적 능력이라고 생각하기에, 여성성이라고 통칭되는 것들을 드러내서 적극적으로 발현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장은 천 개의 뜨거운 심장이 뿜어내는 신호음이라는 제목으로, 일간지에 연재했던 칼럼과 시사주간지에 실었던 글을 모아놨다. 사회를 바라보는시인의 날선 시선들이 담겨 있는데, 이는 최근에 나온 산문집에서의 글들과 그 성격이 별반 다르지 않다. 

시인이 쓴 산문 속 그가 가진 일관된 태도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횡포에 부끄러워하며, 죄스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이 그러하다. 인간에게는 그러할 권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순되지만 인간의 법규와 절차에 따라 그 생태계가 무참히 무너지고 있는게 현 세태의 부정적인 모습 중 하나이다.

피를 먹고 자란다는 민주주의 '민주'의 행방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시대가 퇴보되는 것과 같이 동일한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 잘못된 실수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의 타락상, 노조라고 다르지 않음을, 약자로 향할 때 더 슬프기만 한, 보살핌 노동은 관습적으로 여성에게 요구되어 온 일들이었으며, 여성과 노동의 가치가 폄훼되는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 공동체의 비극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자연 속의 생명력을 귀하게 여기며, 조심히 그 세계 속에서 고요히 한 생 거쳐갈 뿐인 인간들이 산과 물과 바람의 길을 막아 재해를 일으키고, 이를 막기 위한 해결 방안 역시 인간의 편의로만 판단하기에, 생태계는 점점 오염되고 있다고 한다. 

그와중에 이득을 취하는 구조 역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뉘고 있으며, 가진 자의 이득을 위해 건설되는 것들이 못 가진 자들의 터전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 그 피해는 오로지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주민이라는 것도 슬픈 현실이었다. 

문화, 해외파병, 한미FTA , 위안부, 교육, 이민 등등 그 시절의 뜨거웠던 주제에 대한 시인의 태도는 새로운 시각을 하나 더 열어주기도 했고, 같이 분노하며 슬퍼하게도 했다.


다양한 화두에 대해 시원스럽게 말하는 시인이 참 좋았다. 내면 속으로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또 그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이 참 반가웠던 것 같다. 이렇듯 시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그 언어에 잘 담겨 있으니 단어도 문장도 모두 생명력이 넘쳐 읽는 독자에게도 생생하게 전달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마지막 장은 손가락이여 심장들이여, 어떻게 이 고양이를 살리죠? 라는 제목으로 시인과 비평가의 관계성에 대해 주목했다. 시인은 시를 쓴 운명적 계기를 앞서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시를 분석하는 시 비평에 대한 시인의 솔직한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시인은 비평가와 더불어 공생할 관계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좋은 비평이 나와야 함을, 때문에 원로 작가든, 신인 작가든 상관없이 비평 그 자체로서 문학성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또 다른 세계로써 그 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도록, 그러한 이성적인 관계성을 가지기를 기대한 것이다.

시 비평이란 무엇일까, 이전에는 일반 독자들에게 좋은 시들을 소개하는, 그리하여 자신이 비평하는 대상 시에 대한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대하고 있는, 주로 언급된 인물로는 김현이 있다. 김선우 시인은 시인과 평론가의 상호보완적 관계를 획득하여 더불어 문학의 길을 함께 걸어가길 바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부 평론가들의 일종의 선언들이 시인들이 만들어나가는 시 세계에 대한 자기검열의 압박이나 권력적인 용어 선택으로 인해 이분법적으로 구분 짓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일례로 나는 읽으면서 소위 2000년대 이후 등장한 '미래파' 시인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정작 그 용어로 묶인 시인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시적 발화 자체가 자기 부정의 일환인데, 문학은 역시 어느 것을 통해서든 인간을 바라보는 것인데, 이를 '주체의 자기동일성'이라든지, '탈주체'라든지, '자연의 매트릭스'라든지, 이러한 선을 긋고 일방적으로 나눠버리는 게 문제인 것이다.


소통을 거부함으로써 다른 매개체를 통해 소통을 하려는 노력이나, 주체가 대상에 빙의해 발화하는 샤먼적 언어에 대한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또한 그러한 용어 사용으로 인해 카테고리 안에 갇혀진 시인들과 그 밖의 시인들이 스스로 가하는 자기검열과 소외감은 어떻게 할 것인가. 

비평의 권위적 용어에 갇히게 되고, 억압 받게 되는 것에 강렬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이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나 담론으로 엮인 시인들은 어떠한지, 혹은 그 시대를 살았으나 다른 미적 가치를 추구하여 또다른 세계관을 구축해가는 시인은 어디에 엮으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점이 들기도 하다. 


물론 시에 대한 진정성 있는 태도로 바라보는 좋은 평론가도 분명 존재한다. 앞서간 과거의 인물이 계속 소환되지 않도록, 더 좋은 평론가도 만나볼 수 있음 좋지 않을까. 실제로 이젠 비평의 장벽도 너무 높게 느껴진다. 지성을 강조하고 문제적 주제 선점을 위한 선언은 단언하건대 자중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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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는 그의 몸을 자유자재로 통과하며, 혀와 잇속을 지나는 바람소리, 굴리는 발음에서 오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특유의 관찰력으로 전달해준다. 각 구절 별 문장 속에서, 그 문장 속 단어 하나하나에서 읽으면 읽을수록, 시인은 우리 언어에 특화되어 있음을 실감한다. 시를 통해서도 그렇지만 산문 또한 이토록 매력적이라니, 그렇게 알차고 리듬감 있게 전개되는 방식이 더욱 좋다. 한데 뒤섞여 씹히는 말이 아닌, 각각의 방향으로 한껏 뻗어나가는 자태가 참 부럽기도 하다. 


시인의 산문을 읽고 난 후, 시를 읽게 되면 이전과는 다른 풍경과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성성의 변주로만 읽었던 것들에서 천진한 인간성으로 더 폭넓게 해석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시인의 다양한 시각과 관점들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전혀 떠올리지 못했던 색다른 관점도 있었지만, 어떤 부분은 한쪽으로 쏠려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미당에 대한 시인의 생각과 나의 생각은 일치하여 신기하기도 했다. 


다음은 시인의 신작 시집과 더불어 또 다른 에세이도 찾아보려 한다.




우리가 문명의 힘으로 가하고 있는 무수한 폭력들, 강자인 인간으로서 약자인 인간 이외의 생물종들에 대해 보이는 오만과 폭력, 강자의 논리로 약자를 집어삼키려는 무수한 전쟁의 역사, 힘의 논리 속에 폭력적으로 착취되어온 계급과 인종의 성의 역사...도처에 끊임없는 전쟁들을 보세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구요? 정말 그래요? 함부로 말할 수 없을 거예요. 언제나 이 비교격이 문제예요. 우리 모두는 사람 하나 꽃 하나가 다 귀한 존재들이거든요. 공생하고 연대하고 보살피고 껴안고 가야 할 많은 것들에 대해 우리는 종종 너무나 오만해요. 이 오만한 폭력의 기원에 슬프게도 손의 자유가 있어요. 손이 자유를 얻어서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참 아름다운 것들이 있지요.(...)그런데 지금 우리의 손은, 우리가 안아준 것보다 더 많은 악행을 함께 저질러 오고 있잖아요. (...)이것이 인간의 손을 바라볼 때 거의 언제나 어떤 복합적인 슬픔을 느끼게 되는 이유일 거예요. 직립의 슬픔이기도 하겠구요.

/63 -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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