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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끝내 먹먹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뭘까,
<한 스푼의 시간>
명정은 재개발 지역을 앞둔 지역 인근의 오래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 아내는 퇴직 후 빚더미에 얻은 세탁소를 운영에 도움이 되고자 아픈 몸을 모른 척 일하다 먼저 떠나고 말았다. 중매로 만난 아내와는 큰 다툼 없이 무던한 생을 같이 살았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어릴 적 해외로 유학을 가서 연락이 끊긴지 오래되었다. 공부를 마치고 오겠다는 게 삶의 터전으로 바뀌었고, 가정을 이뤘다는 문자 그대로의 서신만 보냈었던 아들은 비행기 사고로 생사여부가 불분명하게 됐다. 그런 아들로부터 커다란 택배하나가 도착하는데, 아들이 근무한 회사에서 개발했다던 인공로봇.
둘째가 생긴다면 짓겠다했던 돌림자로 은결이라는 이름을 얻은 17세 소년의 모습을 한 로봇이 명정의 곁에 남게 된다. 이야기는 명정과 은결이라는 로봇, 그리고 동네에 남은 여러 가구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은결을 작동시키기까지 도와준 이는 동네에서 제일 가방 끈이 긴 영문학 박사를 수료한 세주. 똑 부러진 발음으로 전후 사정까지 알아봐준다. 로봇이 궁금한 아이들 시호와 준교는 심부름을 자초해 세탁소에 다녀간다. 어려운 가정 속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 앞엔 현실은 어쩜 그리 무정한지 잇따른 불행이 일상의 별 다를 놀라움 없이 천연덕스럽게도 잘만 일어난다. 그 사이 은결은 정해진 프로세스로 판단을 내리고 말을 했고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은결도 감정의 동요를 느끼게 된다. 이를 테면 어린 시호가 다 커 어른이 되었을 때, 그에게 전한 소소한 연심이라든지, 그녀가 흘린 눈물에 대한 심장이 저릿하게 느껴지는 듯한 감각을 불안정한 심장박동 수로 느끼게 된다든지. 명정과 함께 하는 생활에서 세탁소 일에서도 별 다른 도움이 되진 않던 비싼 부품만 달고 있는 고급로봇이었던 은결도 성장을 하듯 요령을 익히며 살아가는 것이다.
인물간의 갈등보단 먹고 살아가기 힘든 척박한 현실에서 오는 서글픔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별 것 아닌 것이지만 가해자는 떳떳하고 피해자는 고개를 수그리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상황이 전복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더러운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차곡차곡 쌓인 세월 속에서 동네의 환경을 바뀌었고, 건물주는 세를 올렸으며 인근엔 아파트 단지와 상가가 들어서게 된다. 세탁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명정은 세탁소를 운영한 시간만큼 의도치 않게 동네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는 관찰자가 되었다. 세주는 이혼을 했고, 우울증이 시달리는 와중에 갓난쟁이를 돌봐야 했으며 양육비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다. 준교는 아픈 것을 참다 큰 병으로 도진 아버지를 잃고 지방의 대학에서 공부를 이어나가게 됐다. 시호는 행복과 희망을 꿈꾸지만 나아지는 게 없는 삶에서 일방적 폭력의 피해자가 됐고, 가족 구성원에게 위로조차 받지 못한 채 피로함만 느끼게 된다.
잔잔한 듯한 일상 속에서 작은 파동들이 수차례, 아프게 일어난다.
서글픈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한다. 그런 척박함 속 은결이라는 인공로봇이 뜻밖의 매개체가 되어주기도 한다. 뭔지 모르겠지만 이음새 역할을 해주고 있다. 로봇이기 때문에 전후 사정을 묻지 않고 들어줄 수 있으며, 별다른 여지없이 기대어 울 수도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른 만큼 은결의 내부도 점차 삐걱댔지만 그보다 먼저 떠나게 된 명정에 이어 은결은 처음으로 충동적 행동으로 그의 유언을 찢는다. 항상 조심해야 했던 이불 빨래를 직접 발을 담그고 열심히 밟아댄다. 더불어 삶을 종결하려는 시도였다.
한 호흡으로 쉬지 않고 읽어나가서일까, 시호의 이야기에 이어 은결의 자살 시도처럼 보이는 행동을 했을 때,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로봇도 자살을 할 수 있는 것인가. 홀로 남은 적막함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로봇연구원으로 일하고 싶다던, 그래서 명정이 미리 부탁했던 대로 이뤄지진 않았지만 은결의 삶은 준교의 조카를 마주할 만큼 이어가게 된다. 정해진 프로세스와 판단, 한다와 하지 않는다, 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한다. 등등 말의 함축적 의미를 헤아리고 행간을 읽어내는, 인간적 감성을 더해진 로봇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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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작가의 작품은 『아가미』 이후 두 번째로 접해보게 되었다. 『아가미』 역시 신비로운 분위기가 일상 속에 침투한 소설이었다. 『한 스푼의 시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전의 작품의 문장은 어떠한지 잘 모르겠지만 이 작품에선 몇 번씩이나 되풀이해서 읽어야 할 만큼 걸리는 문장들이 많았다. 어조 자체가 로봇에 대한 서술이나 로봇이 말하는 부분이니 더 논리적으로 진술해야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복잡한 회로를 들여다 본 듯이 어지러이 몇 번이나 되돌아가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의 힘이 탄탄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구체성이 담보되었기 때문에, 그저 설정만 가져온 것이 아닌 로봇의 발화를 했기 때문에 다소 딱딱하게 느껴졌지만 역으로 실체를 느껴볼 수 있던 게 아닌가 싶다. 좋은 소설이다.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이다. 아프지만 봐야 할 현실에서 오리무중의 상태로 회피하고 있었던 나를 반성해야 되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구절
일반인이 잔일에 부려먹기에는 다소 기능이 과하다 싶은 고가의 로봇보다 중요하거나 피곤한 일들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빨래처럼 일상 곳곳에 널려 있다. 세상은 한 통의 거대한 세탁기이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젖은 면직물 더미처럼 엉켰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닳아간다. 단지 그뿐인 일이다. 29쪽
혈연을 비롯한 모든 관계를 한순간에 잘라내는 도구는 예리한 칼날이 아니다. 관계란 물에 적시면 어느 틈에 조직이 풀려 끊어지고 마는 낱장의 휴지에 불과하다. 51쪽
"보편적인 삶은, 아니 그냥 삶은, 어떤 것입니까" (…) 데어버리도록 뜨겁고 질척거리며 비릿한 데다, 별다른 힘을 가하지 않고도 어느 결에 손쉽게 부서져버리는 그 무엇 114-115쪽
그러면 가족이란 결국 무거운 부담과 막대한 담보 및 거미줄 같은 채무로 연결된,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인질인가. (…) 가족이 휴식이나 피난처가 아니라 피로와 염증을 유발하는 일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둘러선 구성원의 표정이 상기시킨다. 150쪽
아무런 약품을 집중 분사해도 직물과 분리되지 않는 오염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부주의하게 놓아둔 바람에 팽창과 수축을 거쳐 변형된 가죽처럼, 복원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157쪽
그러나 사람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면서 살아갈 수 없다. 대개 적의와 비난의 언사로 흘러넘치는 세계에서 그나마 들어줄 만한 말이라곤 공허한 말장난이나 모호한 비유 정도일 것이다. 그 밖에도 만나고 싶지 않은 얼굴들을 마주 대하며, 하기 싫은 일을 많이 양보해서 다섯 번 가운데 한 번은 하고, 맞추고 싶지 않은 분위기를 띄우며, 때론 누군가를 휴지통으로 삼기는커녕 누군가 뱉어낸 쓰레기를 자신이 기꺼이 삼켜주는 일도 한다. 170-171쪽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지. 그 우주 안의 콩알만 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 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떻게 스며들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애져 있지. 184쪽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지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간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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