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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평점 :
누군가의 등에서 당신을 보았다,
왜 당신은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환상의 빛
계절에 바뀔 때, 따스함이 조금씩 스며들 때 묘한 감정들이 그 모습을 달리 드러내곤 한다. 이를 테면 해질 무렵 저녁 즈음에 부는 바람이라든지, 푸른빛이 도는 밤하늘이라든지, 나뭇가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빛이라든지. 딱히 그리워하는 것이 없는데도 자꾸만 그리워지고, 향수에 젖어드는 것이다. 이런 낯선 감정들. 너무 많이 무뎌져서 슬픈 날엔 이런 기분, 코끝에 맴도는 그리움의 향 같은 걸 다시금 느껴볼 수 있길 간절히 바라보곤 한다.
임시방편으로 찾는 게 바로 아름다운 이야기나 문장들인데, 그래도 뭔가 조금 아쉽긴 하다. 아마도 너무 큰 기대는 안한 것만 하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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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은 어느 유명 펑론가들의 추천에 의해서 접하게 되었다. 물론 구매한지는 좀 되었는데, 읽지는 않았었다. 지적 허영심은 있으나 게으른 사람의 특징이다. 어찌 됐든, 우연히 도서관에 마주한 이 책을 집어들고 그 자리에서 간만에 집중력을 발휘하며 열독했다. 처음 단편이 참으로 좋았다.
표제작인 단편은 자살한 남편의 등과 바다 끝에서 마주한 빛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한 여자, 유미코가 등장한다. 그녀의 과거 어린 시절, 남편과의 첫 만남, 인연이 이어질 때까지. 그리고 결혼생활이 지속된 가운데 갑작스런 그를 잃게 됨으로써 변하게 되는 생활의 어느 부분, 새로이 시작된 인연과 관계 속에서, 멍하니 질문을 던지는 유미코가 계속해서 뒤돌아선 남편의 등을 찾게 되는 상황과 왈칵 쏟아진 울음과 새로운 가족들 사이에서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들이 인상적이다.
담백한 문장들이 유미코의 심리를 대변해주는 듯 하다. 일본의 문학작품 중에서도 처음 접하게 되었던게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이었는데, 그때의 느낌이 다시 떠올려지기도 했다. 상실과 공간과 외롭고 고독한 인물, 그리고 그 인물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감정들이.
그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나는 왜 그의 등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지,
이 질문의 답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인지...
혼이 빠져나가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기에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다는. 무심코 던진 질문에 유미코의 새 남편이 해준 답. 그리고 전남편의 잔상과 상실에서 비롯한 여러 감정들이 유미코의 시간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는 게 인상적이다.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건 인정하기 힘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난하지만 조촐하게. 제 삶의 형식에 맞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소중한 사람이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선택으로 떠나가버린다면, 당연히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갑작스런 상실에 따른, 그에 대응해나가는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이다.
이어진 다른 단편들도 가족이나 친구, 타인의 상실로 인해 남겨진 사람들의 어떻게 느끼고 살아가는지를 덤덤하게 보여주고 있다.
오래 전 이혼한 부부가 갑작스런 사고로 인해 아들을 잃고, 홀로 남겨진 집에서 마당에 핀 밤 벚꽃으로 인해 엮인 다른 인연의 이야기 <밤 벚꽃>, 상성이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인연에 과거 어느 특정한 사건을 비밀스럽게 간직한 친구의 죽음으로 떠올리게 된 이야기 <박쥐>, 어릴 적 두 번의 고비끝에 결국 떠나버린 친구와 낯선 침대 차에서 보게 된 어느 노인의 울음, 그로 인해 떠오른 이야기가 이어지는 <침대차>
모두가 무채색과 같은 이야기들인데, 그나마 가장 색채가 짙은 이야기는 역시 <환상의 빛>이다. 그래서 아쉽다는 것이다. 뭔가 더 여운이 깊은 소설이 나올 것 같은데, 그쳐버린 느낌이라서. 분명 이 작품은 덤덤하면서도 아련한, 그리고 생의 기운을 불어넣는 듯한 분위기를 가졌다. 하지만 묘하게 처음 접한 단편의 좋은 점이 갈수록 옅어져서 비슷한 이야기들의 나열로만 느껴졌기에...
비슷하면서도 다른, 또다른 색채를 가진 작품으로 구성되었다면 더 좋았을 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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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보니 이를 각색한 영화가 있는 듯 하다. 그 작품 또한 많은 추천을 받은 것 같다. 이번엔 역으로 기대를 하지 않고 찾아봐야 겠다.
요는 그렇다. 표제작인 단편은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
봄날 오후, 소소하게 자기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며 읽기에 좋은 책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