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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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의 우아함, 러시아 혁명 그 이후




『모스크바의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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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각기 다른 환경이라는 게 주어진다. 이 환경에 어떻게 순응하여 조화롭게 적응하느냐에  따라 삶의 태도 또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그저 핑계로만 말한다면 이 환경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불만과 포기밖에 남지 않을까. 환경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일단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니. 


여기 두 번의 혁명 이후, 1920년대 러시아,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이 한 순간 뒤바뀌게 된 사람이 있다. 바로 성 안드레이 훈장 수훈자, 경마 클럽 회원, 사냥의 명인인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다. 혼란한 시대 파리로 여행을 떠났다가 어떠한 사정으로 인해 다시 돌아오게 된다. 프롤레타리아의 시대. 곳곳에서 혁명 이후 바뀐 현상들이 뒤섞인 가운데 사라져야 할 지위지만, 과거 자신의 쓴 시가 혁명에 동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명목 하에 평소 머물고 있던 메트로폴 호텔 '종신 연금형'을 선고 받게 된다. 


붉은 양탄자가 안내하는 스위트룸에서 하인용 다락방으로 옮기고 모든 특혜와 재산을 국가로부터 몰수 당하게 되었지만, 빼앗긴 자유와는 달리 백작의 세련되고 기품 있는 취향에 따라 피난처로써 좋은 터전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는 백작의 훌륭한 품성이 바탕이 되어 마주하는 사람들 또한 좋은 사람들이었기에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결코 나쁘게 보지 않는, 상대를 다른 시기심 없이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을 대해도 변함없을 것 같기도 하다. 


길고 긴 한 사람의 인생을 담고 있기에 분량은 방대하다. 그저 백작의 생활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고, 그 안에 녹아든 당시의 시대상을 아주 적절히 잘 보여주고 있는 게 이 작품의 또다른 강점이다. 러시아 문학에서 흔히 부딪히게 되는 장벽은 일단 어렵고 긴 이름들이다. 긴 이름이 연이어 나오면 누가 누군지 헷갈려서 메모해가며 읽어나가도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그 중심을 따라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어려움은 한결 덜었다. 심지어 번역의 딱딱하고 어색한 곳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재밌고, 가독성 또한 훌륭하다. 


또한, 백작의 신분의 특성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당시 시대상은 물로 문화, 역사, 음식, 인식, 예술적 특징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로도 충분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장면이나 행위를 묘사하는 부분 역시 굉장히 매력적이다. 때문에 낯선 부분들을 재밌게 접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자주 가는 단골 이발소의 이발사의 가위질을 묘사하는 것도 춤 동작에 빗대어 설명해준다. 머릿속에 아주 잘 그려질 수 있도록. 



야로슬라프는 가위 두 개를 동시에 들고 은발의 신사에게 마법 같은 기술을 발휘하고 있었다. 야로슬라프의 손에 들린 가위는 처음에는 무용수가 뛰어올라 두 다리를 공중에서 교차하는 동작인 앙트르샤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이발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손은 점점 더 빨라져서 마침내 가위는 고파크를 추는 카자크 사람처럼 뛰어올라 다리를 내치곤 했다.  61쪽  


호텔 곳곳에 백작의 취향을 존중해주며 잘 대해주는 직원들이 존재하고, 공주가 되고 싶어했던 이상주의자 니나, 백작의 연인이 될 인연이었던 배우 안나, 친구 미시카, 다정한 부녀의 인연 소피야 등 분량 만큼이나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물론 백작도 현실을 의연하게 받아 들이며, 잘 적응하는가 싶었지만 참을 수 없는 묘멸감이나 불현듯 찾아오는 공허함은 견디기 힘들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앞에서 다시금 생의 의지를 불태우게 하는 건, 결국엔 기억 속 그리운 고향의 맛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흥미로웠던 점은 답답한 호텔 생활에서 노동을 시작하게 된 백작의 모습이었다. 사색과 독서 등 나름의 규칙과 생활 패턴으로 살아왔지만, 생활 반경이 극히 좁아진 데에서 비롯되어, 이미 사라진 신분 앞에 백작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자신의 취향과 기품 있는 태도를 잘 살릴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 당연하지만 의외성을 가지고 다가와 신선하게 느껴졌다. 너무 자연스럽게 그 옷을 입고 일하는 백작의 모습, 시대의 흐름을 타고 변화하고 흔들리는 여러 인물들 사이에서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고, 자신의 가족을 지키려 애썼던 백작이 행복한 삶의 마지막을 가져갔으면 한다.


세상살이 팍팍하고 한 주간의 시작만으로 숨이 막히는 지금, 이 작품은 훌륭한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백작이 묘사하는 장면, 음식, 문화 등 흥미로운 부분들이 군데군데 있었고, 너무나도 인간적인 면모에 공감이 가고, 안도하는 한편 존경스러웠다. 무기력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에게 권해주고 싶다.  




세상은 돌고 도는 거야. 

사실 지구는 지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동시에 태양 주위를 돈다. 은하수도 돈다. 더 큰 바퀴 속의 작은 바퀴인 셈이다. 천체는 돌면서 시계의 작은 망치가 내는 종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자연의 소리를 낸다. 그 천체의 종소리가 울리면 아마 거울은 불현듯 자신의 보다 더 진정한 목적에 맞게 일할 것이다. 즉, 우리 인간에게 자신이 상상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그 실제 모습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65쪽 

  


"원칙적으로 말해서 세 시대는 이전 세대의 구성원들에게 어느 정도 고마움의 빚을 지고 있단다. 우리의 나이 많은 분들이 밭을 경작하고 전쟁에 나가 싸웠어. 그분들이 예술과 과학을 바런시키고, 일반적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한 거야. 그러한 노력을 해왔으니, 설령 그 노력이 변변찮다 할지라도 그분들은 마땅히 우리의 감사와 존경을 받아야 하는 거란다." 

84쪽 



그렇지만 아무리 역사적 근거가 넘친다 하더라도 하나의 충고가 모든 사람에게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와인과 마찬가지로 이웃한 동네에서 태어난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도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 예로서, 옛날에 살던 집의 폐허 앞에 선 이 여행자는 충격이나 분노나 절망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수풀이 무성한 길을 바라보면서 지었던 것과 똑같은 아쉬움과 평온함이 깃든 미소를 지었다. 옛 모습이 거의 대부분 사라졌을 것이라고 예상하고서 과거의 장소를 찾는다면 즐겁게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716쪽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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