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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꽃 위픽
정이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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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잇에 적힌 한 단어 짜리 유서와 인도행 티켓. 내 여행의 유일한 이유였다.
무국적자가 되고 싶던 나날을 기억한다. 너와 나에게 흑백논리에 불과한 분류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국적도, 성별도, 어쩌면 이름까지도. 우린 인지적 편의를 위한 라벨들을 거부했다. 영혼을 위한 이름은 아니었으니까. 단 한 가지로도 표현할 수 있는 존재 양식이란 없기에 우린 초라한. 명칭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정이담의 <환생꽃>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논 바이너리로, ‘너’는 트랜스젠더로 이 세상을 살았고, ‘나’는 ‘너’를 사랑해왔다. 그런 너의 죽음으로 나는 그의 죽음을 추적해 나간다. 이 글은 내가 너를 추모하기 위해 떠나는 인도행이었다. 이 글을 읽으며 나 또한 그 애가 생각이 났다. 그 애가 자주 하던 말들이 정이담의 <환생꽃> 곳곳에 퍼져있었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해할 수 없는 그 애의 심경을 나는 이 책을 통해 조금은 볼 수 있었다.

글은 넘치게 화려했다. 주인공 ‘나’는 무채색을 좋아하고 죽음을 택한 연인인 ‘너’는 화려한 색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를 추모하는 그의 심경은 무채색보단 짙고 화려한 색감의 꽃과 같았다. 십 대에 내가 나의 꿈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북받쳐 오르는 마음으로 써 내려간 글들처럼, 그를 추모하는 ‘나’의 글은 그렇게 넘치고 넘치다 못해 환각상태에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만약에 마약을 하는 사람의 뇌를 추적할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이 들 수 있겠다. 십 대에 내가 나의 꿈에 도취되었던 것처럼.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그 사람이 돌연 죽음을 맞이할 때의 마음이 이와 같을까.

보고 싶다.
긴 꿈이 이어졌다.
총천연색의 꽃이 건물을 무너뜨린다.
그 사이…… 네가 서 있었다. 꽃으로 만든 면사포가 드레스를 입고 나를 향해 웃는 너.
꽃에 짓눌려 질식하는 사람들 사이,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 오직 너만 사랑을 고백했다. 종교, 자본, 편견, 혐오, 무지가 사랑을 대처하기 이전의 역사를, 네가 고백했다.
세상이 우리의 고백을 금지한다면 어디에도 없는 결혼식을 올리자. 주례는 노숙자에게 부탁하고, 청첩장은 죽어버린 연인들의 이름만 적자. 가장 낯선 결혼식을 올리자. 침수되는 꽃들이 우리의 하객. 주례사는 창백한 혀들을 갈가리 찢을 때 들린다. 당신들의 꽃, 그 꽃을 죽이고 괴물을 움켜쥘 거야 날개 뽑힌 천사가 힘을 보태겠지 아니 키스한 후 죽이고 싶다 이런 숭고한 감정 우주 속의 사랑 거름들이 마침내 바람 속을 기는 밤, 그 밤의 말미에, 꽃은 불탈수록 신선한 냄새가 난다 태초부터 축복이던 연인들의 향기를 알아차리면 꽃은 새벽으로 돌아오겠지 수없이 환생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꽃을 겨누는 동안.



글을 읽으며 슬픈 마음이 들었다. 예민하고 나의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받고 휘청이던 그 작고 여리면서도 악을 쓰는 그 애가 떠올랐다. ‘여자가 대체 뭔데?’ 난 그 애의 그런 말들이 가엾으면서도 꼭 그렇게 저항을 해야 해? 꼭 세상에 인정받아야 해? 생각하면서도. 그 애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 이후 알게 된 여러 작품들과 유튜브 속 그들을 살펴보며, 그 애의 생각들을 조금씩 이해했다. 지금 이 책처럼. 그들의 입장이 한 번이라도 되어보지 않았다면 과연 이런 책을 쓸 수 있었을까. 그런 슬픔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저울대에 올라가야 하면서도 그렇게 올라가길 마침내 자처하는. 귀찮게 저항하고 소리를 지르는 그들의 무지갯빛을. 그들에겐 성이 이슈겠지만, 누구나 각자 이 세상의 저울과 라벨로 분류되는 것에 저항하는 것 하나쯤은 있지 않나. 우리가 얼마나 사회에 제대로 소속되었기에 의기양양하게 그들의 존재를 다름으로 분류하나. 우리또한 저나름의 소수자로 살고 있으면서. 사회에 소속되기 위해 소의 귀에 박힌 플라스틱 라벨처럼. 학교, 직장, 성별, 나이, 국적, 종교, 자본, 출신…….


‘보호’란 ‘가해자’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중략)
만약 우리의 다양성을 남김없이 드러내도 존중받는 사회라면, 성향과 지향을 이유로 공격하거나 추행하지 않는 사회라면, 타인의 입장에서 다양한 경계를 상상할 수 있는 사회라면 모두의 숨통이 트일 텐데, 더위에도 앉지 못하는 남자들과, 그들의 접근을 막는 성벽처럼 둥글게 좌석을 둘러싸고 창밖만 바라보는 여자들 속에 하릴없이 실려 이동했다. 그들은 내 이방인 다운 헤어스타일에 시선을 몇 번 주었다. 그건 차라리 한 가지 특징을 과도하게 오독하는 일보단 나았다. 난 점점 삶을, 이 여행을 판단할 수 없었다.


제3의 성, 작가는 그 자신을 제3의 성이라고 불렀다. 글이 좀 과격하고 낭만적이고 넘치는 낱말들로 범벅이 되어 있지만.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분명하다. 세상은 사람을 그들의 편의로 분류하고 주된 분류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인정하지 않지만. 사실 이 세상을 제대로 분류하려고 하면 남성, 여성이란 간편한 말들로는 그들을 제대로 분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그들을 인정하지 않고 사회 보호의 울타리 어디에도 두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다.

“ “사람의 몸은 언젠가 노쇠하며 수만 가지로 변한다. 우리의 몸은 필연적으로 경계를 건넌다. 자연은 원래 혼란하다. 그걸 이분법 안에 두고 정상이라 부르는 일은 인간의 오만이다. 통제를 위해서만 발명된 구분을 숭상하는 건 우습다. 세상엔 100만 개의 신, 100만 종류의 여성, 100만 분류의 남성이 필요하다. 제3, 제4, 제5와 제6의 성이 발생하고, 제11의 성과 제13의 성이 동반자가 되어 ‘남성’같은 개념 따위 가장 작고 초라해질 때에야 영혼엔 자유가 찾아올지도.”

그가 여행하는 인도라는 지리의 문화적 특성상 특히나 여성의 인권이 바닥에 있기에 좀 더 적나라하게 여성이란 존재가 존재만으로도 불온할 수밖에 없는 현실. 거기에 성 정체성마저 내려놓고 그에 목소리를 내며 분개한다.

인도 여행 중 그가 발견한 인도에서 신에게 바치는 푸자 꽃처럼. 연약하고 부드럽기보다 눈이 아플 만큼 쨍한 노랑, 자주, 주황…… 불꽃처럼 강렬한 마리골드. 현란하고 극적인 꽃 더미 같은 건 이 글도 마찬가지라 여겨졌다. 변두리에도 걸쳐 있지 못한 배척되는 소수자이지만 그 무엇보다 강렬한 색채를 띠는. 그래서 이 회색 도시에 그들이 배척되는 걸까, 그들이 뒤섞일 수 없는 화려한 색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글이 역시나 화려하고 극적이고 또 시적이다.


본색을 드러낸 꽃들이 세상을 활보한다. 바닥의 검은 것들이 꽃인지 사람인지도 알 수 없다. 우박처럼 쏟아재는 꽃이 전봇대를 무너뜨린다. 그림자마저 꽃의 색으로 찬란하다. 배가 아팠다. 강한 본능을 간직한 장이 꿈틀거리며 몸부림친다. 난 왜 아직도 살고 싶을까. 살고 싶어도 되나. 이미 지옥이나 다름없는 이승에서 무엇을 위해 생명을 이어야 하나. 눈물은 증발했다. 인간에게 눈물은 사치다. 인간은 신에 가까운 것들을 수없이 죽였다. 그 결과 더 많은 신들이 태어났다. 아마 너도 저 너머에서 꽃의 신이 되었을 테지. 경계와 차원을 넘나들고, 더 많은 사랑을 피우는 존재로 진화했겠지.


그가 인도행을 선택한 이유는 그 사람이 인도에 오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인도는 제3의 성을 인정한 나라였다. 여행을 하면서 그는 ‘히즈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히즈라는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환경에서 생식기를 제거한다. 생식기능을 상실하게 되면 그 대신 타인에게, 특히 새로 태어난 아기와 그 가정에 축복을 내리는 능력이 생긴다. 히즈라가 기도하면 불임이던 곳에 아기가 태어나기도 한다. 그게 바로 바후차라 마타의 신성을 물려받은 히즈라의 숙명이다. 인도의 신들은 여러 인격을 가졌고, 대부분은 양성적이다. 그 신격을 물려받은 존재가 바로 #히즈라 다.

그는 히즈라가 죽으면 어떤 식의 장례를 치르는지, 히즈라가 죽으면 그들이 영세에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알고자 한다. 난 아마도 이 대목이 히즈라의 운명이 그 자신과 그녀의 운명과 비슷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히즈라의 신성을 그들이 물려받은 것은 아니지만, 신성을 제외하곤 그들과 별다를 것이 없는. 3억의 신과 공존하는 인도에서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좀 더 이해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왜냐면 이해할 수 없는 건 계속해서 머리에 남아있기 마련이고. 그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선, 제대로 그를 추모하기 위해선 몸을 비행기에 실어 인도로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에 정확한 대답을 해줄 거라고 믿었던 그루는 이미 죽었다. 그녀의 유골이 담겨있던 병은 실수로 깨트려 강가로 흩어졌다. 히즈라가 거짓말을 했고 그녀는 그 도중에 방황한다.

강가에서 팔려나가듯 늙은 남자에게 결혼을 강매당하는 어린 소녀를 바라봤다. 어린 소녀의 언니가 급사하게 되었는데, 인도에는 신부의 지참금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돈을 갚을 여력이 되지 않으니 어린 나이에도 팔리듯 결혼할 처지에 놓였다. ‘나(차이)’는 이 장면을 보며 분개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너머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실패했고, 갠지스강에 머리를 담가 보았지만, 그저 비릿하고 역겹게 오염된 물에 불과하다. 그 강가에서 힘없이 팔려나가는 소녀를 바라보다가, ‘나’ 차이는 그녀가 몰래 이 결혼에서 도망갈 수 있게 노를 건넨다.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족쇄같이 목을 휘감던 꽃목걸이와 장신구를 벗어던지며 그 결혼으로부터 탈출한다. 소녀의 해방을 도운 건 마치 ‘내’가 이 세상에 여성의 육신으로 태어나 얻은 부조리로부터 벗어나고픈 그의 소망이 담긴 것이 아닌가. 죽음을 함부로 선택할 수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후를 이해할 수도 없지만. 소녀를 탈출시키며 세상이 부여한 여성성에서 벗어나고픈 그녀만의 의식이 아니었을까.

위픽의 다른 시리즈였던 조예은의 <만조를 기다리며>가 떠올랐다.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떠나는 추모의 여행. 하지만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도, 어투도, 모든 것이 사뭇 달랐다. 글이란 낱말이 500여 쪽이나 되게 모여있다고 해서 괜찮은 서사나 인물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란 걸 위픽과 근래에 읽었던 책을 통해서 여실히 느꼈다. 처음엔 위픽 시리즈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분량은 너무 작고, 책도 작고, 이게 과연 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이젠 좀 알 것 같다. 기간과 분량이 제한된 상황에서 작가들이 펼칠 수 있는 역량의 다양성을 관찰하는 것이 하나의 유희가 되었다. 짧은 시와 열댓 권의 대서사가 담긴 책을 두고 무엇이 더 훌륭한가 운운하기 어려운 것처럼. 아 글의 가치란,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란 쪽수나 분량의 문제가 아니구나. 시간의 제약 때문에 완성도를 더 올리지 못한 게 아쉬울 수 있지만. 그동안 작품이 될 수 있지만 작품이지 못했던 이런 작은 단편들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만약에 내가 작가라면, 이 위픽 시리즈에 도전한다는 것이 작가로서 큰 의미를 가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두꺼운 책의 정가와 이 책의 정가가 같다는 것에 나는 더 이상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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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데아
이우 지음 / 몽상가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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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데아 #이우 #몽상가들 #책리뷰 #서평 #이우장편소설 #책제공

인스타그램 피드를 넘기다가, 서울 이데아라는 낱말을 봤다. 문득 이 블로그에 2016년도 즈음 썼던 ‘사막 이데아’라는 글이 떠올랐다. 내가 만들어낸 나만의 낱말들 중 하나였는데. 내가 정의한 의미와 그가 정의한 의미가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평단을 신청했다.

막상 책을 받아서 읽어보니, 중간에 사막에 대한 대목이 나와 놀라기는 했지만 내가 사용하던 의미와는 결이 매우 달랐다. 이우 작가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에 정착하고, 카페 카리온에 자주 가서 그의 데뷔작인 레지스탕스와 본 작품인 서울 이데아를 썼다고 밝혔다.

<서울 이데아>는 스무 살 청년 준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의 어머니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모로코에서 그를 키우고, 파리 그랑제콜에 다니게 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준서는 모로코나 프랑스 파리 어디에서도 마땅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모든 걸 포기하고 한국 대학교에 들어와 자신의 힘으로 살아내 보기로 결심한다. 막연한 서울에 대한 향유, 서울이 마치 그가 상상한 이데아와 닮아있을 거란 생각으로.

막상 그가 한국의 대학교에 들어와 활동을 해봤지만. 그는 모로코나 파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소속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과 연대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 모로코에서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과외를 하고도 하지 않는다고 다 들통이 난 거짓말을 반복적으로 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배척되었다. 파리에선 생테스와 테니스를 치기 위해서 파리 도심에서 벌어진 총기 테러 사건에 대한 시위에 참여하지 않고 등을 돌려버린다. 한국으로 와서 소속감을 느끼고자 하면서도. 막상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도 테니스 동아리를 다닐 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 테니스를 잘 하려는 게 목적이라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결국 뜻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 테니스 동아리에서 나와버린다. 그가 대학교 학생회까지 들어가게 만들었던 SIA에 들어가 학생 권익을 위해 운동을 했던 것도 그 집단의 목표보다 그가 좋아하던 주연과 교류하기 위해 들어갔다.

책 자체는 450여 페이지로 꽤 두꺼운 편이었지만, 그에 비해 글양은 비대하지 않았고, 글도 매우 술술 쉽게 읽히는 종류의 글이었다. 글이 긴 것에 반해 큼직한 사건이랄 게 없어서 좀 잔잔하고 그가 생각하는 서울 이데아란 무엇인지, 그가 서울에서 찾고자 하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같이 의미를 찾아 나가려는 목적으로 사건들은 잔잔하고 빠르게 시야에서 흩어졌다.

사건들을 차근히 읽어나가면서도, 준서가 하는 행동이 논리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이기적이거나, 독단적이고, 처세가 부족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의 마음조차 잘 읽어내지 못한다거나, 상대의 입장에 대한 서술도 1차원적인 부분이 많아서 종아리 정도까지 물이 찬 강가에서 송사리 떼를 구경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자신이 진정한 한국인이 되기 위해서, 다문화가정을 꿈꾸는 외국인 은혜를 매정하게 내치거나, 한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소속감을 얻기 위해 서울 땅을 밟았으면서도 막상 그가 집단 안에서 겉도는 모양새는 대부분 그가 독단적인 모습들은 아마도 작가가 의도한 준서의 모습이었을 테지만, 캐릭터 설정이 그래서인지 더욱 그가 서울에서 이데아를 찾기란 어려움이 컸을 걸로 보였다.

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그가 그렇게 바라던 서울 이데아, 서울에서의 소속감의 결정체가 다름 아닌 연애 감정에 마침표가 있었단 점이다. 335쪽에 이런 서술이 있었다.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면 어쩌면 자신은 파리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가 모로코나 파리에서 정착하지 못한 이유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곳에서 찾지 못해서란 말인가? 이 긴 서울 이데아의 끝, 그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제대로 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해서인 이유가 사랑을 찾지 못해서라는 귀결이 과연 맞는가?

난 오히려, 러시아인의 겉모습이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란 빅토르가 한국에서 모델 활동을 하는데. 그가 자연스럽게 겉모습 때문에 스태프에 의해 외국인으로 분류되고 영어로 지시를 받을 때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고 서술된 부분이 꽤 훌륭한 관찰이 담겼다고 느꼈다. 빅토르는, 그동안 자신이 이십여 년간 한국에서 살아오면서, 그가 한국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 거기에 피로감을 느꼈던 것을 그 순간에 알아차렸다고 말했다.

서울 이데아를 읽으며, 나는 호주에서 이민 2세대로 살아가는 친구 알렉스를 떠올렸다. 그 자신이 호주 사람이란 건 잘 알지만 언젠가 한국어를 한국인처럼 할 수 있는 날이 오거든 한국에 찾아올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그가 호주 사람이지만, 여전히 그가 그들 사이에서도 호주인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피로감을. 나는 준서도 빅토르처럼 느꼈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은혜와 잘 어울리지 못했던 이유도, 그녀가 이성적으로 매력은 있었지만, 그가 한국인이란 정체성을 부여하는데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에 배척했듯이. 그가 보다 한국인이 되기 위해, 한국인으로서 소속감을 느끼기 위한 행동들이 몇 박자씩 엇박이 나는 모습들을 관찰할 때 난 그가 그래도 차근히 서울의 한 대학가에서 소속감을 찾아가고 있다고 느꼈는데. 이 모든 노력들이 여자 하나 때문에 휘청이고, 울분과 화로 이야기가 끝나버린다는 게. 그래서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과, 그 자녀의 대학 비리, 광화문 촛불시위 같은 큼지막한 사건을 SIA와 관련된 사건에 녹여서 서술한 점은 흥미롭긴 했지만. 서울 이데아라는 의미가 광화문 촛불시위에 쓰인 서울 이데아의 의미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그가 향유하고 싶은 서울 이데아의 실체를 찾는 내용인지도 애매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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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도 100퍼센트의 휴식
박상영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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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00페이지 정도의 글인데도 책을 다 읽고 나니. 전국투어나 해외 여행을 한두달 다녀온 사람처럼 짐을 어디엔가 풀어두고, 양말을 벗고, 빨래를 돌리고, 씻고, 밥을 먹고, 곧장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이라는 제목에서 나는, 아 이번에도 꽤나 감상적인 글들이 이어진다면 좀 곤란할지도 모르겠는데. 다른 책으로 넘어가고 다시 읽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 책 저책을 들쑤셔 두었다. 그런데 웬걸 이 책에서 단 한순간이라도 나를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의 구덩이로 빠트리지 않았다. 그리고 제목과는 매우 다르게 작가가 진정 제대로 쉬는 순간은 단 한순간도 나오지 않는다. (한번 출발하면 멈추지 않는 기차같다, 쉬러 가서도 쉬지 않는 그런 사람)

여행을 싫어하면서도 미친 듯이 여행을 다닌다는 이야기에 이 사람도 역마살로 고생 깨나 하는 사람이겠구나 싶었는데. 여행이야기는 둘째치고, 시종일관 유쾌 상쾌하고 재기 발랄한 문장들이 연이어 쏟아져 나와 이 사람은 타고난 만담꾼이자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읽어야 할 읽고픈 책들이 태산처럼 쌓여있지만,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외향적이고, 성격이 화끈하고 충동적이고, 솔직하고 재치 있는 사람이 이토록 진지하게 작가가 되길 바라고 작가가 되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보통 에세이를 읽다 보면 사뭇 진지하거나 여백과 여유, 센티함, 세련됨, 우아함과 같은 낱말들과 어울리는 문장들이 많이 나온다.

단 한 문장도, 식상하거나 흔한 인상을 주는 문장이 없었다. 이 사람은 단 한문장을 쓰기 위해 몇번의 머리회전을 할까? 아니면 이게 타고난 걸까? 유머는 지능이잖아. 싶었다.

이렇게 수많은 이야기를 300페이지 가까이를 꽉꽉 채워 놓고도 왠지 이 사람은 사실 할 말이 더 남아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보통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생각과 코멘트를 다는 습관이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친 문장들은 대부분 톡톡 튀는 재기 발랄함 때문이었고. 내가 쓴 코멘트의 99%는 ㅋ으로 시작해서 ㅋ으로 끝났다.

그의 유쾌한 유머감각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나를 빵빵 터지게 했다. 내가 어린 시절 정말 유쾌하게 읽었던 <공중그네>의 작가 오쿠다 히데오가 만약에 에세이를 쓴다면 이만큼이나 재밌는 글을 쓸까? 생각하면서도, 왠지 이 천성에서 묻어나는 유쾌함은 아마도 박상영 작가가 한 수 위일 거란 확신이 책의 말미에서 확실히 느껴졌다.

한때 김영하 작가님의 팟캐스트를 애청하던 독자로서, 그가 하던 이야기 중 하나가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을 읽은 후에 느껴졌다. ”좋은 글은 어느 부분을 정확하게 집어낼 수는 없지만 좋다고 느껴지는 작품이 정말 훌륭한 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 기억에 의존해 썼기 때문에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신 건 아니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난 김영하 작가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때 이 말을 절실하게 공감했다. 내가 훌륭하다고 느꼈던 대부분의 작품엔 이런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에세이, 소설류의 책들은 특히나 그렇다. 박상영 작가의 글은 정말 그랬다. 어느 한 부분을 집어내기 어렵지만 하나 확신이 들었던 것은 확실히 기성세대의 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뉘앙스의 자신만의 색이 뚜렷한 작가라는 점. 작가가 늘 진지하고 긴장되거나 어떤 아우라를 만들어 내는 인공적인 느낌 없이 솔직하고 투명한 그대로도 이렇게나 멋진 분위기를 담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가 유머러스하게 글을 시종일관 이어나갔기 때문에, 그가 진지하고 무게감 있거나 트라우마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에 오히려 그 대비 감 때문에 그 이야기가 더욱 진지하게 다가왔다. 이 부분에선, 사람이 노상 진지하다고 어떤 작위적인 카리스마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로서 철저히 자신을 솔직하게 담아내려는 노력, 특히 책에 나오는 친구들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허락을 받고 이렇게 쓴 걸까? 싶은 구석이 있을 만큼) 쓴 내용들을 보면서 참 용기 있는 작가구나- 싶었다.

박상영을 한 번 알게 되면 이 작품이 마지막일 순 없을 거란 걸 깨닫게 한, 내가 그를 알게 한 첫 작품이다. 책 구석구석에 그가 언급한 자신의 작품들 덕분에 (홍보를 재치있게 잘 해둠) 더 읽고 싶은 책들도 생겼고, 쓸데없이 자세한 그의 친구들과의 이야기들 덕분에 박상영 작가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 속에 아니라면 어떻게 알 기회가 없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조차도 농밀하게 잘 알게 되어 마치 박상영이라는 사람을 내가 지인으로 알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런 시시콜콜한 친구들과의 여행 이야기 속에 나온 여행지들, 특히 지네와 그리마와 태풍과 피난 위험이 있는 가파도의 그 레지던스로 한 번 놀러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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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아침에게
윤성용 지음 / 멜라이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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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공 #멜라이트 #윤성용_친애하는아침에게 #친애하는아침에게_윤성용 #북스타그램


#책리뷰 #오늘의책 #위로 #회복 #에세이 #윤성용 




윤성용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다시 살아가려는 마음으로 쓰인 글로, 어려운 시기를 지나가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안이 되기를 바라는 글이라 소개한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게 서툰 편이라, 위로를 받을 거란 생각보다 위로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생각했다. 위로를 하기 위해 썼다는 것이 사실 굉장히 대담한 생각이 아닌가.  알고 있는 가족이나 친구조차 위로하는 게 그리 농록하고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누군가를 글로 위로할 수 있다는 것에 호기심을 느끼며 책을 펼쳤다. 



오십여 개의 소제목에 짧게는 한 문단 길게는 일곱 여덟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치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글을 훑어보는 느낌을 받았다. 하루를 시작하는 법, 양치하는 법, 아침에 듣는 보사노바 음악, 이불 정리의 의미, 좋아하는 책, 책 정리하기, 면도하는 법 등 같은 집에서 사는 연인이나 동거인을 관찰하거나 누군가의 브이로그를 보는 듯 편안한 글이 이어졌다. 



책탑을 쌓아두고 열댓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게으름뱅이지만, 기한이 정해져있는 책은 국수 말아 먹듯 후루룩 읽어버리는 편인데. 이 책은 프롤로그에서도 예감했지만 첫 두세 장을 읽고 급히 국도로 빠져나갔다. 작가가 한두 문단에 독자의 호흡을 결정짓는 것도 능력이다. 개인사와 감상이 주가 된 글을 읽을 땐 이해력과 공감력이 만취 상태처럼 둔해져서 이기도 하고, 글이 명상하듯 고요해서 이기도 했다. 혹여라도 내가 놓치는 행간의 의미나 공감하지 않고 넘어가면 아무것도 읽지 않고 책장을 넘기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글의 이런 분위기와 박자감이 호흡을 느리게 만들어줬고, 아마도 이런 면들이 내용을 떠나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는 근사한 글의 재료가 아닐까 싶다. 



글이 여러 개의 파편처럼 흩어져 있고, 일상에서 떠오르는 단상을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거대한 것을 하나로 뭉뚱그려 이 부분이 좋았다고 나열하기엔 책 이곳저곳을 누빌 때마다 거론하기엔 너무 사소하고 담지 않기엔 무엇을 담아야 할지 모르겠는 그 모든 것들이 있었다. 그중 사람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은 구석도 있을 땐 드디어 뭔가 공감 코드를 잡은 것 같아 기뻤다. 이를테면 성공하려면 일어나자마자 반드시 이불을 개라는 영상을 종종 보면서, 일상적으로 이불을 당연히 개는 거지 이게 그렇게나 의미가 있는 일이었나 생각했는데 작가님도 같은 이야기를 했던 대목이나,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 자체가 어떤 초능력처럼 여겨진다는 이야기, 아침은 초기화의 시간이라는 이야기들이 그렇게 읽혔다. 


작가가 글을 쓸 때, 그는 글이 기울어진 바닥에 굴러가는 구슬처럼 우울한 글을 쓰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여러 차례 고백했다. 독자의 입장에선 우울한 글을 읽는 것에 피로를 느낄 수 있으니, 그 부분에 대해 걱정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글의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노력한다는 대목이나, 좀 더 밝을 글을 쓸 수 있게 격려하는 아내에 대한 이야기, 그의 우울하고 자기혐오를 경험했던 원초적인 원인이라 여겨지는 유년기의 아픈 경험에 대해 밝힌 대목을 보면서. 참 글이 솔직하다고 여겨졌다. 


어릴 때 자주 들었던 말 중 하나가 솔직하게 글을 써서 매력적이라는 말이었는데, 점점 커 갈수록 내가 보는 내 일기장에서조차 왠지 누군가가 내 일기를 볼 거라는 생각이 누군가의 이름이나 사건조차 숨기고 숨겨서 쓰는 경향이 생겨버렸다. 우원재의 향수라는 노래에서도 나왔듯이, 누가 자신의 일기에 침을 뱉겠냐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지나간 과거, 자신의 일기장에서조차 사건을 보기 좋게 각색하기 마련인데. 자신의 이름과 신상이 다 나올 수 있는 작가가 자전적 에세이에 이토록 자신을 투명하게 적어내려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무라키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도 느꼈듯 작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용기가 필요하고, 용기가 있음에도 견디기 어려운 직업인지 사무치게 느꼈지만. 그런 고행의 길로 수행자처럼 조용히 산길을 걸어가는 듯한 작가의 글이 더없이 투명하게 여겨졌다. 아마도 이런 그의 투명함이 정말 별것 없는 사소함을 이야기할 때조차 읽는 사람의 마음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일까. 티 없이 맑은 어린아이나 강아지 고양이 코끼리 팬더 거북이 당나귀 같은 동물 영상을 볼 때처럼 이유 없이 마음이 맑아지는 걸까.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우울함에 대해 고백하는 글들이 머리끝까지 쌓이더라도 아무것도 감추지 않은 그의 투명한 글에서 사람들은 똑같이 위로를 받고 함께 투명해질 수 있는 것 아닌가. 꼭 밝고 따뜻한 햇볕이 아니더라도 그가 가진 순수함, 솔직함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계속 그가 고백을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 노력하지 않아도 타고난 성정이 나오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자기 불신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누구나 겪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또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이런 감정들과 싸워왔다. 아침에 일어날 시간을 강박적으로 정해 일어나서 달리러 나가도 밤새 생각을 떨치지 못해서 잠을 자지 못한 날이 많아 달리기를 시작한 횡단보도, 언덕에서 머리가 핑글핑글 돌 때도 많았다. 그러다 정말 사소한 어떤 순간이 열쇠가 되어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나는 이런 경험이 작가에게도 찾아오길 기도한다. 작가가 어린 시절에 경험한 상흔은 너무 중요한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시의 정서가 현재까지 주된 정서로 자리 잡혔을지도 모른다. "내가 다시 밝음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는 대목에서 아마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 대목이 매우 슬프게 읽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대목으로 애쓰는 대목에서 왠지 희망참보단 오히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에서 느껴진 농도 짙은 멀미가 느껴졌다. 그림자조차 사랑받는 것이 문학인데 애써 기울어진 땅을 평평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이대로도 이렇게 빛나는 것을.



글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둔감한 공감력이 생생하게 살아나고 살집을 불렸다는 걸 느꼈다. 그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강릉에서 자라 눈이 많이 오면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넉가래를 들고나와 눈을 정리하는 장면이 마을 축제처럼 여겨졌다는 글을 보며 그 틈바구니로 들어가 작지만 야무진 나의 넉가래로 그의 마음속에 쌓여 반짝이는 눈의 무게를 좀 덜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가 느끼는 감정의 크기가 매우 커서 그 무게가 너무 무거운 나머지 그의 마음이 무거운 것이 아닌가. 사실은 그 안에 쌓여 있는 것은 모두 이렇게나 아름다운 백색의 눈인데. 눈이 녹으면 그 모습이 회색빛으로 더러워지지만 본질적으로 눈은 아주 아름다운 흰빛으로 세상의 빛을 온 세상에 내뿜고 고요하게 만들지 않은가. 


글 소재로 쓰였던 '겨울 입김'을 이용해 겨울을 닮은 작가님의 이 책을 더 묘사해 보자면. 겨울 아침 출근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와 하얗게 쌓인 눈앞에서 허- 하고 따뜻한 입김을 한 번 쏟아내고, 사람들 틈바구니에 들어설 때.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건 하지 않건 모두가 각자의 입김을 달고 다니는 모습이 말 주머니를 달고 다니는 것 같았는데. 이 책이 그런 겨울의 입김처럼 별 이야기가 있건 없건 소소하게 어떤 글자 모양을 하고 하나씩 차곡차곡 책장을 채우고 있었다. 그 소소함으로  읽는 내내 이런 것이 위로인 건가, 위로는 어떤 것인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마침내 그의 바람대로 사람들에게 나눠준 위로를 그가 다시 돌려받는 날이 오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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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만찬회
신진오.전건우 지음 / 텍스티(TXTY)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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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만찬회> 신진오, 전건우

#책제공 #호러만찬회 #텍스티 #신진오 #전건우 #호러소설 #공포소설 #스릴러소설

<호러 만찬회> 신진오, 전건우

<호러 만찬회>는 여덟 편의 단편으로 엮어 만들어진 단편집이다. 첫 네 작품인 <헤이, 마몬스> <얼룩> <딩동 챌린지> <네발 달린 짐승>은 신진오 작가가, <신딸><추락><만성 활력><반딧불의 산>은 전건우 작가가 썼다. 작가의 말까지 총 350여 페이지였는데 근래 본 책 중 가장 단숨에 읽혔다. (밑줄 코멘트 아예 없는 책도 오랜만 ㅎㅎ) 읽으면서도 내 눈 시선 끝이 날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빨리 잘 읽히는 이유는 글이 보통 그만큼 흥미로워서, 잘 읽혀서, 혹은 다음 서술이 어느 정도 예측이 되어서 이기도 한데, 이번 리딩에선 내 눈이 공포감을 감지하고 싶어 안달이 난 느낌이었다.

원작인 웹툰을 각색한 것이라고 하는데, 평소에 웹툰을 전혀 보지 않아서 어떤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작가의 말에서 신진오 작가는 <헤이, 마몬스>가 이 단편집의 시작 작품으로 처음 각색을 하면서 방향성을 잡을 수 있었던 작품이라고 서술되어있다.

<헤이, 마몬스>는 아버지가 어린 주인공에게 선물했던 악마 모양의 마몬스 인형이 주인공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며 펼쳐지는 이야기다. 어릴 적에 들었던 남겨있던 피에로 인형이 어린 딸을 잡아먹어 버리고 마침내 엄마까지 집어삼킨 이야기처럼 인형에 대한 공포감과 어린아이가 가질 수 있는 사이코패스적인 성향, 나름의 작은 반전이 흥미로웠다.

<얼룩>은 신진오 작가가 쓴 작품 중 가장 흥미롭고 작품성이 있었다. 마지막에 작업하고 각색 과정에서 애를 가장 먹으셨다고 했지만, 여러 수정을 거친 탓인지 구성도 꽤 탄탄했고, 작가님의 말씀처럼 아동학대, 고독사의 사회 이슈도 건드릴 수 있어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어릴 적에 본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식스 센스>만큼의(? 혹은… 생략) 반전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한국 토속신앙이나 한국의 전통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한 공포 스릴러물을 매우 선호하기도 하고, 한국 전통 소재의 공포물이 세계 영화시장에 하나의 장르를 만들길 바라는 입장에선,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신진오 작가님이 각색을 맡은 영화가 나오길 바란다.

<딩동 챌린지>는 할리우드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친구들 간의 내기 소재로 작은 반전이 있었지만, <네발 달린 짐승>과 신진오 작가가 작업한 다른 소재처럼 인간의 이기심이 키워드인 내용이라 이야기를 각자 보자면 흥미롭지만 단편집으로 연이어 보기엔 아쉬웠다.

전건우 작가는 <밤의 이야기꾼들><소용돌이><고시원 기담><살롱 드 홈스><마귀><뒤틀린 집> 등 여러 작품의 장편소설을 발표한 소설가다. 그가 작업한 이야기 중 <반딧불의 산>이 가장 여운이 컸다. 신진오 작가 작품에서도 그렇고, 공포물에서 차별성을 만드는 건 공포감과 대비되는 인간성이 나올 때가 아닌가 싶다.

<만성 활력>도 그런 의미에서 소재는 참신했지만 어쩐지 이야기가 다시 건드려져야겠다는 인상이 들었다. 공포스러운 장면을 만드는 건 인간의 이기심이나 저주, 인간이 제어하지 못하는 순간일 수 있지만 이런 소재가 반복되어 노출되다 보면 공포심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흔한 레퍼토리만 남는다. 그래서 미야베 미유키처럼 끔찍한 순간에서도 인간의 따뜻한 면모나 심리를 섬세하게 쓰는 글들이 하나의 이야기로서 입체감과 끝을 더 진하게 남긴다.

심리물에 욕심이 있는 편이라, 읽으면서 무엇이 인간에게 공포감을 주는가. 특히, 소설처럼 극적인 씬 반전, 사운드(텍스티 출판사에서 사운드 제공을 해주긴 했는데, 공포감은 별로 들지 않았다.)가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공포 소설을 공포스럽게 쓰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시 한번 느꼈다. 전건우 작가의 말처럼 여덟 편의 이야기를 읽으며, 맛이 각기 다른 츄파춥스를 꺼내 먹는 기분이었고, 두 작가님들의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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