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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아침에게
윤성용 지음 / 멜라이트 / 2023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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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용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다시 살아가려는 마음으로 쓰인 글로, 어려운 시기를 지나가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안이 되기를 바라는 글이라 소개한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게 서툰 편이라, 위로를 받을 거란 생각보다 위로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생각했다. 위로를 하기 위해 썼다는 것이 사실 굉장히 대담한 생각이 아닌가. 알고 있는 가족이나 친구조차 위로하는 게 그리 농록하고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누군가를 글로 위로할 수 있다는 것에 호기심을 느끼며 책을 펼쳤다.
오십여 개의 소제목에 짧게는 한 문단 길게는 일곱 여덟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치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글을 훑어보는 느낌을 받았다. 하루를 시작하는 법, 양치하는 법, 아침에 듣는 보사노바 음악, 이불 정리의 의미, 좋아하는 책, 책 정리하기, 면도하는 법 등 같은 집에서 사는 연인이나 동거인을 관찰하거나 누군가의 브이로그를 보는 듯 편안한 글이 이어졌다.
책탑을 쌓아두고 열댓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게으름뱅이지만, 기한이 정해져있는 책은 국수 말아 먹듯 후루룩 읽어버리는 편인데. 이 책은 프롤로그에서도 예감했지만 첫 두세 장을 읽고 급히 국도로 빠져나갔다. 작가가 한두 문단에 독자의 호흡을 결정짓는 것도 능력이다. 개인사와 감상이 주가 된 글을 읽을 땐 이해력과 공감력이 만취 상태처럼 둔해져서 이기도 하고, 글이 명상하듯 고요해서 이기도 했다. 혹여라도 내가 놓치는 행간의 의미나 공감하지 않고 넘어가면 아무것도 읽지 않고 책장을 넘기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글의 이런 분위기와 박자감이 호흡을 느리게 만들어줬고, 아마도 이런 면들이 내용을 떠나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는 근사한 글의 재료가 아닐까 싶다.
글이 여러 개의 파편처럼 흩어져 있고, 일상에서 떠오르는 단상을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거대한 것을 하나로 뭉뚱그려 이 부분이 좋았다고 나열하기엔 책 이곳저곳을 누빌 때마다 거론하기엔 너무 사소하고 담지 않기엔 무엇을 담아야 할지 모르겠는 그 모든 것들이 있었다. 그중 사람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은 구석도 있을 땐 드디어 뭔가 공감 코드를 잡은 것 같아 기뻤다. 이를테면 성공하려면 일어나자마자 반드시 이불을 개라는 영상을 종종 보면서, 일상적으로 이불을 당연히 개는 거지 이게 그렇게나 의미가 있는 일이었나 생각했는데 작가님도 같은 이야기를 했던 대목이나,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 자체가 어떤 초능력처럼 여겨진다는 이야기, 아침은 초기화의 시간이라는 이야기들이 그렇게 읽혔다.
작가가 글을 쓸 때, 그는 글이 기울어진 바닥에 굴러가는 구슬처럼 우울한 글을 쓰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여러 차례 고백했다. 독자의 입장에선 우울한 글을 읽는 것에 피로를 느낄 수 있으니, 그 부분에 대해 걱정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글의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노력한다는 대목이나, 좀 더 밝을 글을 쓸 수 있게 격려하는 아내에 대한 이야기, 그의 우울하고 자기혐오를 경험했던 원초적인 원인이라 여겨지는 유년기의 아픈 경험에 대해 밝힌 대목을 보면서. 참 글이 솔직하다고 여겨졌다.
어릴 때 자주 들었던 말 중 하나가 솔직하게 글을 써서 매력적이라는 말이었는데, 점점 커 갈수록 내가 보는 내 일기장에서조차 왠지 누군가가 내 일기를 볼 거라는 생각이 누군가의 이름이나 사건조차 숨기고 숨겨서 쓰는 경향이 생겨버렸다. 우원재의 향수라는 노래에서도 나왔듯이, 누가 자신의 일기에 침을 뱉겠냐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지나간 과거, 자신의 일기장에서조차 사건을 보기 좋게 각색하기 마련인데. 자신의 이름과 신상이 다 나올 수 있는 작가가 자전적 에세이에 이토록 자신을 투명하게 적어내려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무라키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도 느꼈듯 작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용기가 필요하고, 용기가 있음에도 견디기 어려운 직업인지 사무치게 느꼈지만. 그런 고행의 길로 수행자처럼 조용히 산길을 걸어가는 듯한 작가의 글이 더없이 투명하게 여겨졌다. 아마도 이런 그의 투명함이 정말 별것 없는 사소함을 이야기할 때조차 읽는 사람의 마음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일까. 티 없이 맑은 어린아이나 강아지 고양이 코끼리 팬더 거북이 당나귀 같은 동물 영상을 볼 때처럼 이유 없이 마음이 맑아지는 걸까.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우울함에 대해 고백하는 글들이 머리끝까지 쌓이더라도 아무것도 감추지 않은 그의 투명한 글에서 사람들은 똑같이 위로를 받고 함께 투명해질 수 있는 것 아닌가. 꼭 밝고 따뜻한 햇볕이 아니더라도 그가 가진 순수함, 솔직함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계속 그가 고백을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 노력하지 않아도 타고난 성정이 나오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자기 불신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누구나 겪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또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이런 감정들과 싸워왔다. 아침에 일어날 시간을 강박적으로 정해 일어나서 달리러 나가도 밤새 생각을 떨치지 못해서 잠을 자지 못한 날이 많아 달리기를 시작한 횡단보도, 언덕에서 머리가 핑글핑글 돌 때도 많았다. 그러다 정말 사소한 어떤 순간이 열쇠가 되어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나는 이런 경험이 작가에게도 찾아오길 기도한다. 작가가 어린 시절에 경험한 상흔은 너무 중요한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시의 정서가 현재까지 주된 정서로 자리 잡혔을지도 모른다. "내가 다시 밝음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는 대목에서 아마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 대목이 매우 슬프게 읽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대목으로 애쓰는 대목에서 왠지 희망참보단 오히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에서 느껴진 농도 짙은 멀미가 느껴졌다. 그림자조차 사랑받는 것이 문학인데 애써 기울어진 땅을 평평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이대로도 이렇게 빛나는 것을.
글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둔감한 공감력이 생생하게 살아나고 살집을 불렸다는 걸 느꼈다. 그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강릉에서 자라 눈이 많이 오면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넉가래를 들고나와 눈을 정리하는 장면이 마을 축제처럼 여겨졌다는 글을 보며 그 틈바구니로 들어가 작지만 야무진 나의 넉가래로 그의 마음속에 쌓여 반짝이는 눈의 무게를 좀 덜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가 느끼는 감정의 크기가 매우 커서 그 무게가 너무 무거운 나머지 그의 마음이 무거운 것이 아닌가. 사실은 그 안에 쌓여 있는 것은 모두 이렇게나 아름다운 백색의 눈인데. 눈이 녹으면 그 모습이 회색빛으로 더러워지지만 본질적으로 눈은 아주 아름다운 흰빛으로 세상의 빛을 온 세상에 내뿜고 고요하게 만들지 않은가.
글 소재로 쓰였던 '겨울 입김'을 이용해 겨울을 닮은 작가님의 이 책을 더 묘사해 보자면. 겨울 아침 출근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와 하얗게 쌓인 눈앞에서 허- 하고 따뜻한 입김을 한 번 쏟아내고, 사람들 틈바구니에 들어설 때.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건 하지 않건 모두가 각자의 입김을 달고 다니는 모습이 말 주머니를 달고 다니는 것 같았는데. 이 책이 그런 겨울의 입김처럼 별 이야기가 있건 없건 소소하게 어떤 글자 모양을 하고 하나씩 차곡차곡 책장을 채우고 있었다. 그 소소함으로 읽는 내내 이런 것이 위로인 건가, 위로는 어떤 것인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마침내 그의 바람대로 사람들에게 나눠준 위로를 그가 다시 돌려받는 날이 오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