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도 100퍼센트의 휴식
박상영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6월
평점 :
품절


약 300페이지 정도의 글인데도 책을 다 읽고 나니. 전국투어나 해외 여행을 한두달 다녀온 사람처럼 짐을 어디엔가 풀어두고, 양말을 벗고, 빨래를 돌리고, 씻고, 밥을 먹고, 곧장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이라는 제목에서 나는, 아 이번에도 꽤나 감상적인 글들이 이어진다면 좀 곤란할지도 모르겠는데. 다른 책으로 넘어가고 다시 읽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 책 저책을 들쑤셔 두었다. 그런데 웬걸 이 책에서 단 한순간이라도 나를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의 구덩이로 빠트리지 않았다. 그리고 제목과는 매우 다르게 작가가 진정 제대로 쉬는 순간은 단 한순간도 나오지 않는다. (한번 출발하면 멈추지 않는 기차같다, 쉬러 가서도 쉬지 않는 그런 사람)

여행을 싫어하면서도 미친 듯이 여행을 다닌다는 이야기에 이 사람도 역마살로 고생 깨나 하는 사람이겠구나 싶었는데. 여행이야기는 둘째치고, 시종일관 유쾌 상쾌하고 재기 발랄한 문장들이 연이어 쏟아져 나와 이 사람은 타고난 만담꾼이자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읽어야 할 읽고픈 책들이 태산처럼 쌓여있지만,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외향적이고, 성격이 화끈하고 충동적이고, 솔직하고 재치 있는 사람이 이토록 진지하게 작가가 되길 바라고 작가가 되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보통 에세이를 읽다 보면 사뭇 진지하거나 여백과 여유, 센티함, 세련됨, 우아함과 같은 낱말들과 어울리는 문장들이 많이 나온다.

단 한 문장도, 식상하거나 흔한 인상을 주는 문장이 없었다. 이 사람은 단 한문장을 쓰기 위해 몇번의 머리회전을 할까? 아니면 이게 타고난 걸까? 유머는 지능이잖아. 싶었다.

이렇게 수많은 이야기를 300페이지 가까이를 꽉꽉 채워 놓고도 왠지 이 사람은 사실 할 말이 더 남아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보통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생각과 코멘트를 다는 습관이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친 문장들은 대부분 톡톡 튀는 재기 발랄함 때문이었고. 내가 쓴 코멘트의 99%는 ㅋ으로 시작해서 ㅋ으로 끝났다.

그의 유쾌한 유머감각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나를 빵빵 터지게 했다. 내가 어린 시절 정말 유쾌하게 읽었던 <공중그네>의 작가 오쿠다 히데오가 만약에 에세이를 쓴다면 이만큼이나 재밌는 글을 쓸까? 생각하면서도, 왠지 이 천성에서 묻어나는 유쾌함은 아마도 박상영 작가가 한 수 위일 거란 확신이 책의 말미에서 확실히 느껴졌다.

한때 김영하 작가님의 팟캐스트를 애청하던 독자로서, 그가 하던 이야기 중 하나가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을 읽은 후에 느껴졌다. ”좋은 글은 어느 부분을 정확하게 집어낼 수는 없지만 좋다고 느껴지는 작품이 정말 훌륭한 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 기억에 의존해 썼기 때문에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신 건 아니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난 김영하 작가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때 이 말을 절실하게 공감했다. 내가 훌륭하다고 느꼈던 대부분의 작품엔 이런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에세이, 소설류의 책들은 특히나 그렇다. 박상영 작가의 글은 정말 그랬다. 어느 한 부분을 집어내기 어렵지만 하나 확신이 들었던 것은 확실히 기성세대의 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뉘앙스의 자신만의 색이 뚜렷한 작가라는 점. 작가가 늘 진지하고 긴장되거나 어떤 아우라를 만들어 내는 인공적인 느낌 없이 솔직하고 투명한 그대로도 이렇게나 멋진 분위기를 담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가 유머러스하게 글을 시종일관 이어나갔기 때문에, 그가 진지하고 무게감 있거나 트라우마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에 오히려 그 대비 감 때문에 그 이야기가 더욱 진지하게 다가왔다. 이 부분에선, 사람이 노상 진지하다고 어떤 작위적인 카리스마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로서 철저히 자신을 솔직하게 담아내려는 노력, 특히 책에 나오는 친구들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허락을 받고 이렇게 쓴 걸까? 싶은 구석이 있을 만큼) 쓴 내용들을 보면서 참 용기 있는 작가구나- 싶었다.

박상영을 한 번 알게 되면 이 작품이 마지막일 순 없을 거란 걸 깨닫게 한, 내가 그를 알게 한 첫 작품이다. 책 구석구석에 그가 언급한 자신의 작품들 덕분에 (홍보를 재치있게 잘 해둠) 더 읽고 싶은 책들도 생겼고, 쓸데없이 자세한 그의 친구들과의 이야기들 덕분에 박상영 작가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 속에 아니라면 어떻게 알 기회가 없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조차도 농밀하게 잘 알게 되어 마치 박상영이라는 사람을 내가 지인으로 알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런 시시콜콜한 친구들과의 여행 이야기 속에 나온 여행지들, 특히 지네와 그리마와 태풍과 피난 위험이 있는 가파도의 그 레지던스로 한 번 놀러 가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