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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 여행 내 삶이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이재형 지음 / 디이니셔티브 / 2023년 7월
평점 :
서평, <프로방스 여행>
이재형 지음
디이니셔티브 출판

240여 쪽의 작은 책인데도 불구하고 책에 메모와 포스트잇, 밑줄이 가득 찼다.
나중엔 포스트잇을 붙이려다가 포기하고 밑줄과 메모만 남겼다. 붙이는 게 무의미해져서.
책을 읽고 이동 중에 핸드폰을 뒤적여 프로방스 배낭여행을 검색했다. 프랑스는 영어가 안 통할 테니 여행할 정도의 회화를 터득하는 데 걸릴 시간, 누구와 함께 갈 것인지, 부모님을 따로 보내드릴 때 들 비용, 최적의 시기, 나야 대처하겠지만 부모님이 인종차별을 경험하지 않을까…, 그때 대처방안까지 구상했다. 책 한 권에 몇 푼이 드는 건가.
큰 명분이 없는 한 프랑스로 여행할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르다. 직접 보고픈 반 고흐 흉상, 생폴 드 모레 정신병원 안에 전시된 그의 자화상, 촬영이 금지되어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마티스가 만든 로사리오 예배당,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배경이 된 이프성, 프랑수아즈 사강의 첫 소설 <슬픔이여, 안녕?>의 배경이 된 생트로페 항구, 피카소가 그토록 원했던 그리말디 성 내부, 길을 거닐며 마실 파스티스, 시장에서 살 마늘소스, 거닐며 알은척 이야기를 풀고픈 곳, 그렇게 원 없이 달큼한 보랏빛 라벤더 향과 밝은 태양에 피부를 태울 곳…….

아,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마티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꾸베 씨의 사랑 여행> <세상의 용도> <인간 불평등 기원론> <사회계약론>등 무려 150권 넘게 다양한 분야의 프랑스 작품을 번역한 내공답게 그의 이야기는 아주 유려하게 그 장소에 얽힌 갖가지 이야기를 적당한 깊이와 농담으로 풀어낸다. 작가 이재형은 영화, 예술에 조예가 깊어 어떤 정보는 생략해도 되고 어떤 시시콜콜함을 풀어야 좋을지를 잘 알고 있다. 지리, 세계사, 미술사, 영화, 예술, 작가와 그들의 작품에 대한 이 정보들이 담백한 몇 마디의 감상과 함께 실려 있는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크레타섬을 찾아가고 이 걸작을 번역해서 세상에 내놓은 적이 있다는 그의 소소한 고백이 얼마나 그가 이 예술 작품들을 사랑하는지, 각 작품들을 대할 때 그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가 티를 내지 않아도 눈에 보였다.
가장 반한 구석이 있다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겨우 두 문단으로 여행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는 점인데. 그런 그의 소소함이 책 전반에 묻어 있었고, 그것이 참 매력적이라 여겨졌다. 그 성품이 마치 로사오리 예배당을 디자인하던 마티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설계 초안에 들어있던 많은 요소들, 특히 그가 직접 디자인했던 문화적 기물들을 하나씩 버렸다는 대목에서 내가 감탄을 했던 그런 결이 그의 책에도 묻어났다. 마치 자신의 목소리를 최대한 묻히지 않으려고 자신이 애정 하는 작가의 글을 번역하는 번역가처럼.
프로방스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 쥐어볼 만한 책. 아, 난 꼭 들고 갈 거라.
+ 여담을 추가하자면.
여행 욕구가 목 끝까지 다다랐던 지난 주말 처음 보지만 알고는 있는 어떤 사람과 서유럽 어딘가를 누볐다. 그의 반짝이는 총명한 눈 뒤로는 샤를 가르니에가 건축한 우아한 신 바로크 양식의 고급 건축물이 있었다. 인파가 많은 광장에서 지중해 과일 몇 개를 사들고 그와 한참을 재밌게 이야기했다.
모자도 쓰지 않은 채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얼굴로 그는 지리, 역사, 그 지역 음식과 와인, 식물, 예술, 건축물과 그에 담긴 역사, 예술가 이야기와 그곳을 사랑한 작가, 철학가, 예술가들의 처음 들어보는 여담을 늘어놨다. 말로는 채 설명할 수 없는 감탄도 팔꿈치로 그를 툭 건드리면 요리 레시피 읊듯 모두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이, 우리는 꽤 죽이 척척 잘 맞았다.
주로 그 남자가 설명하고 나는 들었다. 속으론 그 해박함이 부러워 책을 몇 권 더 읽지 못한 게 아쉬웠다. 알은척하지 못한 것보다 그 이야기에 지금보다 더 감탄할 수 없음이 아쉬웠다. 원래 유럽을 계속 여행하다 보면 생전 처음 보는 것보다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을 보고 더 감탄하기 마련이니까.
사람이 너무 많아 땀이 난 두 어깨와 눈을 뜨기 힘들 만큼 빛나는 태양에 피로함을 느끼면서도 그와의 여행이 즐거워 반 흥분 상태였다. 그 흥분의 정점은 그가 손바닥 크기의 흰 종이를 꺼내 들었을 때였다. 방문해야 할 미술관, 박물관, 연주회, 레스토랑, 교회, 수도원, 예술가들의 생가 등을 적은 목록을 내게 건네 주었다. 아, 완벽하다.
난 여행을 갈 때마다 매번 새로운 사람과 여행했다. 궁합이 맞는 와인을 곁들이는 게 중요하듯 여행도 지역마다 함께하는 사람과의 합이 중요하다. 그래서 간혹 여행을 망치면 새로운 사람과 다시 그곳을 찾았는데, 이번 여행은 그저 훌륭했다. 여행지 때문인가, 아니면 그 종이 때문인가? 행복에 겨워 입이 느슨해질 즈음 알람 소리에 단잠에서 깼다. 알람을 끄지 않은 걸 후회하면서 그와 마저 가지 못한 리스트가 눈에 아른거렸다.
얼굴 오른쪽으론 이재형 작가님의 <프로방스 여행>이 있었다. 책을 읽다가 약에 취해 잠이 든 모양이었는데, 아마 책과 맞물려 꿈을 꾼 거란 생각이 들어 신기했다. 아 다시 읽고 그 꿈을 연이어 꿀 수만 있다면…. <프로방스 여행>은 남 프랑스 이야기니까, 작가님이 쓴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를 읽으면 되는 건가. 파리까지 가게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