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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바위보
앨리스 피니 지음, 이민희 옮김 / 밝은세상 / 2023년 5월
평점 :

서평,<가위바위보> 앨리스 피니
이민희 옮김
출판사 밝은세상
어떤 장르를 가장 좋아하세요?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누구예요?
아, 시나리오도 보세요?
어떤 작가 좋아하시는데요.
살면서 가장 많이 받아본 질문들이다. 좋아하는 영화, 소설, 작가는 그 시기에 어떤 작품을 보느냐에 따라 답변이 바뀐다. 많이 볼 수록 가장 좋아하는 것을 뽑는건 거의 불가능하다. 좋아하는 것이 많아지고, 더 가치있게 보이는 것도 변한다. 시절인연처럼 그 시기에는 매해 빠짐없이 오십번은 족히 본 영화를 다시 안찾게 되는 시기가 오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방치한 만인의 명작 <이터널 선샤인>이 마침내 내 인생의 방점을 찍게 하는 시기가 온다. 그러니 영화광을 자처하던 어린시절처럼 베스트를 꼽기 어렵다. 추궁하듯이 상대가 질문을 연거푸 하면 이런 답으로 대신한다.

“정확히 말하면 장르를 선호한다기 보다, 사람의 심리를 다루는 영화를 좋아하는 것이고. 가장 맛있는 메뉴가 있는게 아니라 맛있는 요리가 좋은 거니까요.”
이 답변의 끝엔 여름이 오면 추리 스릴러가 떠오른다고 말한다. 이열치열 이냉치냉. 한겨울의 추운날 아이스 아메라카노나 아이스크림이 더 맛있고, 무더운 여름날 마라탕같은 추리스릴러가 확 땡긴다. 사람의 심리를 본격적으로 가장 많이 다루고 자극적이고 맛깔나게 다루는건 단연 추리스릴러니까.

올 여름의 추리스릴러, 앨리스 패니의 <가위바위보>를 다 읽고, 문득 영화 <리미트리스>의 주연 브래들리 쿠퍼가 떠올랐다. 주인공은 작가였는데 쓰는 글마다 고전하고, 출판사로부터 거절을 당하다가 급기야 생활고를 겪고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된다. 우연히 두뇌의 부스트를 최대치로 올리는 알약을 먹고 하루 아침에 밤새도록 글을 써서 출판사에 보내는데. 그가 쓴 원고에 깜짝놀라 편집장이 그를 찾아 수십통의 전화를 거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을 보면서 주인공은 대체 어떤 원고를 썼을까 궁금해했는데, 앨리스 피니의 <가위바위보>가 그런 작품이라면 설득이 되지 않을까.

추리 스릴러만큼 입이 근질거리는 서평이 또 있나. 대체 이 엄청난 반전에 대해 서술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서평을 남길 수 있을까. 그렇다고 내용을 밝힐수도 없고. 온라인에 00대나무숲이 많은데도 그 쓸모를 몰랐는데, 만약에 엘리스피니 <가위바위보> 완독자들의 대나무숲이 있다면 그곳에 가서 딱 한마디를 하고 싶다.
“이런 발칙한 여자-!”
난 정말 당신이 아는 아내, 당신이 모르는 아내는 전혀 다른 사람일 수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책의 끝지점에 다다를때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트위스트의 여왕 앨리스 피니라기에, 그간 쌓아온 추리스릴러 짬밥을 더해 끝에 다다르기 전에 답을 다 알아내려는 요량으로 단서의 기미가 보이기만 하면 밑줄을 긋고 생각되는 옵션들을 모두 써내려갔다. 그 중에서 몇가지는 맞출 수 있었지만… 올해들어 와, 하고 입을 벌려 감탄하게 되는 순간이 작품이나 전시를 통해 자주 찾아온다. 이번달만 두번째다. 이정도의 필력과 천재적인 반전을 꾸려갈 수 있을때 비로소 추리소설작가라는 간판을 내밀수 있는 것인가. 게다가 더 아리송한건 20개국이 넘는 나라에 판권이 넘어가고, 영상화가 실현된다는 건 어떻게 예측한걸까. 하기사 이런 작품을 내가 썼다면 이정도의 예측은 할 수 있었겠지. 논쟁을 할 때 상대를 이기는 방법은 애초에 그들이 갖고 있는 개념이나 질문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반전에 대해 서술하지 못하고 머뭇거릴 수 밖에 없다는게 너무 안타깝다. 383쪽이었는데 스토리에도 올렸듯 기대 이상으로 재밌어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동네방네 정답을 모두 알려주고도 독자가 답을 알아낼 수 없을 만큼의 반전이라니.
미야베 미유키의 추리스릴러를 사랑하는 이유처럼, 엘리스 피니의 글은 매우 매끄럽고 유려하고, 심리 묘사가 탁월했다. 굳이 추리스릴러라고 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여느 연인이나 커플의 이야기를 몰래카메라로 관찰하는 기분이었다. 정확히는 아내가 쓴 편지를 뜯어본 것이지만. 보통 인물이 교차해서 서술하는 글은 누가 무엇을 말하는지 기억하기 어렵고 혼란스러울텐데, 그런 지점이 전혀 없었다. 책이 꽤 두꺼워서 한번에 읽지 않고 나누어 읽을 줄 알았는데 카페에 들어가 앉은 자리에서 완독할 수 있었다. 각 독백을 넘어갈 때마다 아침드라마 급의 여운을 남기며 다음장을 넘기지 않을 수 없었고, 부부나 연인간에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불신하고 배척해내는데 안타까움을 느끼고. 진실로 서로를 사랑할때 어떤 마음까지 가질 수 있는지 볼 수 있었다. 종탑위에서의 그 광할한 마을 풍경은 글을 읽는 것 만으로도 아름답게 눈에 보이는 듯 했고, 이 모든 반전의 반전의 반전의 반전과, 각 등장인물이 나와 하는 모든 말들 하나하나가 주옥같았다. 아, 글을 읽으면서 이정도 필력이면 그냥 작가를 해도 되겠는데? 라는 생각을 했는데, 내 생각이 맞았다는 점도. 넷플릭스 시리즈로 나오는 것도 기대되지만, 넷플릭스를 봤다는 사람마다 이 책을 추천할 거다.
앨리스 피니의 다른 소설들이 몇 권 더 있음에 감사하며,
올 여름은 앨리스 피니의 <가위바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