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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영웅전설 - 제8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6월
평점 :
800쪽이 넘는 책을 억지로 읽고 난 후에 좀 가벼운 책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이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펜클럽>이 참 재미있었고 분량도 200쪽을 넘지 않은 것이 가벼운 책을 찾는 내게 딱이었다. 선택은 좋았다. 역시 재미있어서 출퇴근 길의 졸음도 참아가며 금새 읽었다. 역시 쉬운 글이 잘 읽힌다.
소설의 뒤에 쓰여진 인터뷰를 보니 <삼미...>를 쓰기 전에 쓴 소설이다. 그래서 그런지 <삼미...>보다 유머의 재치가 덜하다. 하지만 여전히 재미있다. <삼미...>에서는 자본주의 가치관을 재미있으면서도 날카롭게 비판하는데 여기에서는 미국을 비판한다. 정확하게는 미국의 지배계급이겠지. 책에 등장하는 미국의 영웅들은 각자 미국의 힘을 상징한다. 슈퍼맨은 군사력을, 배트맨은 자본을, 원더우먼은 문화산업을, 아쿠아맨은 항공모함 또는 이지스 전대를 상징한다. 참 잘도 도식화 시켰다. 아귀도 잘 맞아 돌아간다. <삼미...>에서도 느꼈지만 박민규는 시대의 문화코드와 사회관계를 연결 짓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별 생각없이 넘어갈텐데. 하긴, 그러니까 작가지.
책의 풍자가 그렇게 새롭진 않았다. 아무리 수구신문들이 판을 친다 하지만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도 미국의 위선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겉으론 민주화니 인권이니 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힘을 앞세운 온갖 만행을 저지른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그리 새로운 풍자는 아니지만 미국의 그 위선을 영웅들을 통해 다시 구성한 재미가 쏠쏠하다.
사족을 덧붙이면 인상적인 한 군대가 있었다. 로빈에 관해서다. 배트맨과 함께 나오는 로빈 말이다. 로빈은 미국의 꼬붕 영국을 상징한다. 로빈은 배트맨의 학대에 못이겨 운다. 세계는 끝이라며 흐느낀다. 주인공이 위로하자 로빈은 말한다. "바보야, 예전엔 다 우리꺼였단 말이야!" 작가는 영국지배계급의 제국주의도 놓치지 않는다. 미국이든 영국이든 지배계급이 원하는 것은 같다. 단지 힘의 강약 차이가 있을 뿐이지. 한국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그놈이 그놈이니 비판할 꺼리도 없다거나 세상은 어차피 그런 거 아니냐 는 식의 생각은 아니다. 문제는 지배계급이 아니라 체제 자체다. 먹지 않으면 먹혀 버리는 이 체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