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범우사상신서 3
에리히 프롬 지음. 방곤,최혁순 옮김 / 범우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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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은 통찰력이 참 뛰어난 사람 같다. 삶의 양식을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으로 나누어 바라보고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존재양식(번역에 따라서는 사는 양식으로 되는지 모르겠다)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개인적인 성찰 뿐만 아니라 사회체제의 변혁이 필요하다고 한다. 결국 "이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렇게 살기가 아예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참 힘들다, 그러니 체제를 변혁해야 한다. 그러나 체제만 변혁하고 의식이 변화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의식도 변해야 한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김규항의 "혁명이란 사람들의 가치관을 변혁시키는 것"이란 얘기와 같은 얘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은 후에 본 <사랑의 기술>도 같은 맥락이다. 이 책에서 프롬은 사랑은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라고 본다. 근데 소유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항상 대상에 집착할 뿐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는지(여기에서 어떻게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라든지 뭐 그런 연애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랑은 에로스적인 사랑도 있지만 그 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전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에는 관심이 없다.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존재양식의 삶을 살아야 한다. 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후의 논의는 다시 <소유냐 존재냐>로 이어진다. 

 

그렇다. 참 좋은 생각이고 좋은 책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고 읽은 사람들은 다시 좋은 내용이라고 말을 한다. 그런데 왜, 세상은 바뀌지 않는 것일까. 이 책이 직설적이고 과격한 말로 혁명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내용만 보면 굉장히 급진적이랄 수 있다. 책의 결론을 보면 이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인류의 행복은 도무지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끝까지 읽는다면 주의깊게 보지 않아도 이런 주장을 파악할 수 있다. 근데 왜 이 세상은 이 모양일까. 한 때 교양인의 필독서로 여겨지며 거의 모든 대학생들이 한번 쯤은 읽었던 <사랑의 기술>과 <소유냐 존재냐>. 사람들은 프롬의 사상을 거부한 것일까, 아니면 자기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한 것일까. 

<소유냐 존재냐>를 읽을 무렵 난 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돈과 명예와 같은 세속적인 가치를 좇는 소유의 길을 갈 것이냐 아니면 다른 길을 갈 것이냐(이 길이 꼭 존재양식의 길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다른 길에 비하면 더 존재양식의 길에 가깝다). 결국은 난 소유양식의 길을 택했다. 이 책을 나름 잘 이해하며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이 책이 나를 변화시키진 못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 볼 것도 없이 나부터 이런 모양이니 이 세상에 희망을 기해하는 것은 어쩌면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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