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유곤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하루키의 에세이 집인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하루키의 책 몇권을 사서 읽어 보기로 했다. 전에도 하루키의 책을 몇 권 인가 읽었다. <상실의 시대>는 누나가 선물로 받아 대충 훓어 보는 정도로 읽었고 <스푸트니크의 연인>과 몇 편의 단편집은 군대 시절 고참의 책을 빌려서 읽있다. 근데 그닥 내 취향은 아니어서 이번에도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읽기로 했다. 그래서 고른 것이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이다. 그리고 또 하나 소설을 하나 골랐는데 그것이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이다.  

소설임에도 <신의 ...>를 읽기로 생각한 것은 그것이 하루키 소설의 일종의 전환점이 되는 소설이라는 평 때문이었다. 그전의 하루키 소설이 굉장히 개인적이고 허무적이었다면 이 소설로 인해서 사회참여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는 평이 여럿 있었다. 나도 전에 하루키의 소설에서 부르주아틱한 개인주의와 뭔가 현실감이 많이 떨어지는, 적어도 나와는 많이 동떨어진 이야기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별로 공감도 되지 않았고 재미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 소설은 어떤가? 정말 그 전의 소설들과는 느낌이 많이 다를 것인가? 대답은 글쎄다... 다. 하루키 전문가 들에게는 그런 것이 깊이 느껴졌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전의 소설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상징과 은유에 약하기 때문에 내가 느끼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하루키의 소설은 독자들에 따라서 굉장히 다양하게 읽힌다고 하니 나의 방식도 뭐 그리 틀리다곤 할 수 없을 테지. 

다만 <개구리군, 도쿄를 구하다>라는 단편은 마음에 들었다. 전에 읽은 <달리기...>에서 약간 감동을 받았달까 하는 점이 하루키의 허무를 받아들이며 살아나가는 모습이었는데 <개구리군...>에서도 그런 점을 좀 느꼈다. 이 단편소설에서 개구리군은 도쿄의 시민을 구하기 위해 지진을 일으키려는 지렁이군과 한바탕 싸움을 해야 하고 그 싸움에서 주인공(이름을 잊어버렸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겨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지면 목숨을 잃는다. 아니 이기더라도 죽거나 불구가 될 거다. 인류라는 어찌보면 허무한 삶들을 구하기 위해.  

이것이 이 연작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아닐까. 인간의 삶이란 것은 허무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허무를 무릎쓰고 살아나가야만 한다. 살아나가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서로를 도와야 한다. 대지진이라는 천재와 지하철역 독가스 살포라는 인재가 일어나는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를 돌보며 서로서로 관심을 갖고 지켜보며 살아가야 한다. 뭐 이런... 단순한 나는 이렇게 밖에 느끼질 못하겠다. 

 

얼마전 부터내가 자주 이용하는 전철역 책방에 하루키의 책들이 몇권씩 꽃여있다. 몇권이 있다가 한두권 나가면 다른 책이 꽃여있곤 하는 식이다. 그 모습을 보니 하루키의 책은 헌책방에서 구입하는 것이 알맞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정가를 주고 사 보기에는 아깝단 얘기냐고 묻는다면, 뭐 그런 생각도 좀 있다. 일단 신간도 아니고 한 때 일었던 하루키 붐으로 하루키의 책은 헌책방에도 넘쳐나니까. 그 만큼 읽고 또 읽고 곱씹을 만큼 걸작은 아니란 얘기도 되고. 아무튼 그래서 며칠 전에는 그 책방에서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을 샀다. 하루키 초반기의 작품으로 알고 있다. 나중에 천천히 읽어볼 생각이다. 그리고 또 며칠 전에는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를 보았다. 이런, 알라딘에서 샀는데... 이럴 땐 많이 안타깝다. 하지만 할 수 없지 다음에 가면 그 옆에 있던 <슬픈 외국어>라는 또 다른 수필집을 사야겠다. 이 것 역시 알라딘에서 사려했었는데 이럴 때 횡재를 한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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